낙방길과 장원급제길
새재의 여러 길
조생원은 올해도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야 했다. 초시인 생원으로 이미 합격은 하였으나 대과에는 계속해서 낙방을 하였기에 그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였다. 조금만 더 가면 진남교반이 나오고 험난한 고모산성길을 돌아가야 새재의 입구에 도달할 수 있다. 벌써 집을 떠난 지 닷새가 지났고 곳곳에서 숙박은 하였으나 옳게 자본 적도 없었다. 집을 나설 때 노모가 성황당 앞까지 바래다주면서 이번에는 꼭 되게 해 달라고 비는 모습을 뒤돌아 보지 않았던가. 초시는 그나마 두 번 만에 합격하였지만 대과에는 벌써 몇 번째 낙방하였단 말인가. 그는 새재 밑에 있는 마을에서 하루를 묵기로 하였다. 그곳에는 작년에도 함께 올라간 상주에서 온 박생원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먼저 박생원이 말을 걸어왔다.
“아이구, 조생원께서 올해도 만나보게 되는구만요. 그간 공부를 많이 하셨는지 얼굴이 좀 수척해 보이네요. 실력은 만점인데 그 넘의 운이 안 따라 주니 고배를 마신 게 아니던가요. 이번에는 차분히 답안지를 적어 다 같이 금의환향 해 보입시다.”
“허허, 내가 공부를 많이 하였다기보다는 그 시험장에서 안 떨리고 올바르게 답안을 작성할 수 있을는지를 걱정하다 보니 그런가 보오. 그 넘의 시제를 받아 들기만 하면 적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시간을 허비해 버려 올바른 답안을 제출 못한단 말씀이오. 그게 운이라는 게 아니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도 실력이라고 봅니다.”
“하하, 조생원의 말씀을 듣다 보니 그럴듯하네요. 나도 몇 번이나 그랬지만 고사장에 앉아서 문제를 보면 눈앞이 캄캄한 게 글 자체가 보이지를 않은 적이 몇 번이나 있었지요. 아마 이번에는 기필코 되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그렇게 만든 것 같고요.”
“맞는 말씀이오. 실력으로 보면 여기 박생원을 따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요. 나와 마찬가지로 재수가 아니고 삼수를 하다 보니 자신감도 떨어지고 꼭 되어야 한다는 심적 부담감이 영향을 미쳤겠지요. 그러니 마음을 잘 다스리는 그것도 실력이니까 할 말은 없네요.”하고 조생원과 박생원이 함께 나눈 말이었다.
조생원은 고향이 경상도에서도 남도에 있고. 박생원은 그나마 새재 아래인 상주에 있기에 지리적으로는 박생원이 한양으로 가기에 덜 고생하는 셈이었다. 둘 다 몇 번의 낙방을 하였지만 시험에 집착하지 않는 여유로움도 있었다. 박생원은 상주에서도 이름난 부농 집안 출신이어 벼슬길에 나가던 못 나가던 살아가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조생원은 비록 집안 살림은 넉넉하지 않으나 가문의 풍도는 벼슬길을 절대시 하지 않고 삼강행실을 존숭 하는 선비 가문출신이었다. 그러니 두 사람 모두 다 과거시험에 목을 매어달 정도는 아니었다. 다시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이어졌다.
“조생원, 이번에는 필히 급제를 하셔야 하겠지요. 벌써 다섯 번째 도전하니 세간의 이목도 있고 하니 말입니다. 나는 이제 삼수째인데 벌써 이름이 바뀌었네요. 박삼수라고 말입니다.”
‘하하, 박생원께서 조금 놀림을 받는 모양입니다. 삼수 정도는 양반이지요, 나는 이미 조삼수에서 이제 조오수가 되었고 잘못하면 조육수가 될 판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번이 마지막이고 더이상 과거를 안 보려고 합니다.“
“조생원께서 이번에 안 되시면 실력이 아닌 운명이라 여기고 초야로 돌아가십시요. 나도 이번을 마지막으로 끝내려고 합니다. 무슨 과거시험이 인생의 전부도 아니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헛웃음이 나옵니다.”
“허허, 그래도 박생원께서는 이제 삼수이니 적어도 오수까지는 도전해 보셔야 지요. 박오수라는 별칭이 그런대로 부르기가 괜찮네요. 하하, 저가 조금 실례되는 말을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박생원은 상주에서도 이름난 부잣집 출신이 아닙니까. 가만히 계셔도 먹고살고 또 낭만을 즐길 수도 있으니 무슨 걱정이란 말씀이오. 일 년에 한 번씩 한양구경도 하고 유람 삼아 과거를 보시면 되시지요.”하고 조생원과 박생원이 오랜만에 만나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농담도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그 두 사람은 실력이 부족한지 운이 없던지 또 급제해야 하는 의지가 모자라는 것인지 몰라도 낙방을 자주 하였다. 그런데 낙방에는 크게 연연치 않고 매년 한 번씩 만나 술을 매개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큰 즐거움이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과거를 보러 가되 술벗을 만나기 위함이 더 큰 의미가 있는지, 며칠 후 치를 시험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찌 보면 너무 시험장이 긴장되고 한편으로는 경쟁에서 이기려는 살벌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려는 요량이기도 하겠다. 그 두 사람은 새재를 넘어가면서 여러 길이 있는데 어느 한쪽을 선택하였다. 그 길 중에는 장원급제길이라는 길도 있었고, 시집가는 길, 유배 가는 길, 장사하러 가는 길 등 여러 길이 있었다. 그 길에는 팻말이 없다 뿐이지만 장원급제길은 사람이 많이 다녀서 그런지 길이 빤질하게 드러나 보였다. 시집가는 길은 좀 서글픈 분위기를, 유배 가는 길은 억울하게, 장사하러 가는 길은 요란하게 보였다. 새재를 넘는데 이렇게 샛길이 많은지 그 사연도 많았을 것이라고 보였다.
그 두 사람은 연풍을 지나 수안보에서 하룻밤을 또 묵어 가기로 하였다. 먼저 박생원이 말문을 열었다.
“아이구 다리야 허리야. 우리가 장원급제길을 넘어왔는데 그 소원이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양을 오가면서 세상을 구경하고 주막에서 한잔 하는 것이 바라는 바가 아니겠는가요.”
“허허, 박생원께서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는가요. 예부터 입방정이라는 말이 있지를 않던가요. 오는 길에 산신당에도 돌을 던지고 마애불에도 빌고 하지를 않았는가요. 이번에는 꼭 급제하셔서 금의환향을 하십시요.”
“하하, 저는 이제 마음을 비웠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과거에 급제해야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하지만 무리라고 봅니다. 다행히 초시는 되었으니 선비가문이라고 부르는데 만족을 합니다.”
“아이구, 박생원께서도 어찌 그리 내 마음하고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하건대 저도 급제하는데 부족도 하거니와 어지러운 세태를 보니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 권력도 좋지만 자유가 없는 삭막한 인생길도 그렇고 말입니다.”하고 두 생원이 수안보에서 나눈 이야기였다.
그 두 사람은 이미 과거의 결과를 짐작하기나 한 것처럼 자탄과 냉소로 떠넘겼다. 그러고 보니 실력도 문제이지만 의지 자체가 돈독하지 못했고, 붕당을 지어 당파싸움을 하는 세태에 환멸을 느낀 것도 한몫을 하였다. 두 사람 모두 다 고사장에 앉으면 시제에 대한 발상이 나오는 게 아니고 불안과 초조 그리고 회의감이 밀려왔기에 모자라는 실력에다가 집중까지도 못하니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왜 시제를 받으면 그토록 긴장을 하게 되는 것이었을까. 그들은 역적 누구를 탄핵하라느니, 이런저런 예송논쟁 등 쓸데없는 제도에 대해 논하라는 던가 하는 위험하기도 무의미하기도 한 시제를 맞닫게 되니 글이 잘 나오지를 않았던 모양이었다. 비록 출세하기 위해서는 역적을 탄핵하고 시류에 따른 논쟁에 편승하는 게 맞지만 그것은 선비정신의 훼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고사장에서 망설이다 보니 제대로 시간 내에 충실한 답안을 제출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보였다.
그들은 이윽고 한양의 초입인 천안 삼거리에 당도하였다. 객줏집과 주막들은 과거를 보러 온 선비들로 붐볐고, 그 풍경 또한 심각하기도 재미있기도 하였다. 아마 충청도와 호남에서 올라온 선비들끼리 나눈 이야기로 보였다.
“이보시게 정생원. 어김없이 올해도 천안 삼거리에 또 만났구마이 시방. 제발 내년에는 서로 안 보도록 하더랑께. 매년 한양 나들이하듯이 즐기려고 오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여.”
“아따, 이생원은 사돈 넘말 하고 있지라. 길거리에 돈만 깔아 내버리고 하는데 이제 집안 대들보는 남아 있는지 모르겠으라. 제발 한양 구경은 그만하고 내년에는 서로 안보는 게 대수가 아니것소 시방.”
“허허, 이런 과거시험 아니고는 언제 한양 구경을 하것시오. 급제는 하늘이 점지해주는거시고 진인사 대천명이라고 사람이 할 바는 다해야 되는 게 아니것소.”
“허이구, 진인사 대천명을 하려면 오늘 주막에 들를게 아니고 여인숙에서 공부를 하여야 하는 게 아니것소. 하기사 소 뒷걸음치다가 쥐를 잡는다는 법도 있다고는 합니다만 좀 껄적지끈하네요.”하고 삼거리 주막에서 반쯤 술이 된 두 선비가 농을 주고받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대과를 치르기 위한 선비들은 영호남에서 올라와 천안삼거리에서 만나서 한양으로 줄을 지어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그 대열에 끼어있는 선비들은 새로운 얼굴보다도 자주 본 얼굴이 많은 걸 보니 낙방한 선비가 재도전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비록 실력이 안되더라도 한번 대과에 응시하였다는 명분도 쌓고 또 칠전팔기 까지는 아니지만 한 삼 세 번까지는 해봐도 된다는 세간의 관용도 한몫을 하는 것이었다. 이토록 과거에 운명을 거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개천에서 용이 나서 가문의 영광을 가져오기 때문일 것이었다.
드디어 대과를 치르는 날이었다. 조생원과 박생원은 성균관 안에 있는 고사장에 들어섰고, 수많은 지원생들로 마당은 꽉 찼다. 시제를 방으로 써붙이고 지원생들은 붓을 들고 쓰기 시작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생각이 안 나는지 아니면 미리 속에 정리하고 나서 답안을 쓰려는지 붓을 입에 물고 있었다. 이번 시제도 순수한 학문에 관한 것이 아닌 시국과 관련된 민감한 사안이었다. 시류에 맞게 명쾌하게 답안을 작성할 수는 있었지만 조생원과 박생원은 망설여졌다. 과거시험에서 필화는 없었지만 급제하고서도 주변으로부터 성토를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그 둘은 답안을 쓰기가 망설여졌고 정해진 시간 내에 완성된 답안을 적어 낼 수가 없었다. 보나 마나 이번에도 급제를 기대할 수가 없었고, 그들 자신이 생각해도 힘차고 확신에 찬 답안을 적어내지 못했기에 이미 결과를 예견하였다.
그 둘은 결과는 보고 낙향하기로 하고 주막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생원, 이번 시험은 어떻던가. 나는 전번과 마찬가지로 생각이 안 나서 답안을 반쯤 적다 보니 시험 종료 종이 울리데. 그러니 보나 마나 한 게지.”
“아이구, 말 말게, 나도 생각을 하는데 답안을 적기가 망설여져서 완성을 못하고 말았다네. 나도 자네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 걸세. 이제 부모님께 볼 면목도 없고 하니 낙향을 할까 말까 망설여 지네.”
“그러면 이곳 한양에 머무럴수도 없을 테고 고향도 가기가 싫다고 하니 어쩔 셈인가. 정 안되면 우리 집으로 가서 당분간 시간을 보내면서 앞길을 구상하세.”
“그래, 자네 말이 진심인가. 나는 남부끄럽고 해서 낙향을 못할 처지이니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고, 그 인근에서 아주 정착을 하면 어떨까 하네. 집에서 형님이 이왕 부모님을 모시고 있기에 봉양을 안 해도 되고 내게 분재해 주려던 몫도 형님이 가져가면 그런대로 불만은 없을 것이네.”하고 두 명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앞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과거시험의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고 둘이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조생원은 그 시제라는 게 중국의 고사나 문학적인 것이었다면 적을 마음도 생기고 생동감 있는 글을 적었을 텐데 아쉬웠다. 박생원은 예나 제나 시제에 대한 불만도 있지마는 강박감에 의한 발상의 혼란으로 도저히 붓이 나가지 않았으니 다음 시험도 쳐보아야 결과는 뻔하다고 볼 수가 있었다. 조생원은 첫 시험과 두 번째 시험은 나름대로 잘 쳤다고 생각하여 급제를 기대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연속으로 낙방하였기에 무슨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나름대로 시문에 능하였고 글씨체도 반듯하고 하여 따 놓은 당상은 아니지만 주변에서도 기대를 하였던 게 사실이었다. 세 번째도 나름대로 잘 쳤다고 여겼지만 어김없이 낙방이 되었고 나머지 네 번째, 다섯 번째는 그냥 의욕도 없이 부모님의 등에 떠밀려서 과거를 보게 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주변에서 떠도는 이상한 소문이 마음에 거슬렸다.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한 가문의 후손들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등용을 안 시킨다는 그럴듯한 내용이었다. 자신의 가문은 생육신인 어계 조여의 후손이 아니던가. 또 박생원은 사육신인 박팽년 선생의 직계는 아니지만 본관이 같은 순천박씨이기에 보이지 않은 불이익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짐작하였다. 조생원은 세 번째에 낙방하고부터 그런 소문이 사실일 수도 있다고 믿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주변에 보니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한 집안은 등용이 막히고 있는 것도 보았다. 그래서 조생원은 이미 결과를 예측하였기에 의욕적으로 답안을 적을 수가 없었기도 하였다.
조생원과 박생원은 이윽고 문경새재의 관문에 들어섰다. 거기에서 잠시 쉬어가면서 나눈 이야기였다.
“이보게, 박생원. 이제 새재를 넘으면 다시는 이곳을 오를리가 없네 그려. 그 간 새재길을 오가면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고, 오를 때에는 혹시나 해서 장원급제길로 올라오곤 하였였지. 이번에도 어김없이 샛길로 빠져서 가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구만.”
“허허. 조생원도 상심이 크겠지만 나 역시도 마찬가지일세. 나도 이번을 마지막으로 마음을 달리 먹기로 하였다네. 부친을 설득하여 시골에서 서당을 지어 훈장노릇이나 할려고 작정 중이네. 후학 양성도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지를 않겠는가.”
“나도 자네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고향을 떠나서 어느 곳에서 나를 반겨주겠는가. 그냥 빈서당에 훈장 감을 찾는 데가 있으면 박생원이 물색해 줄 수가 있겠는가. 나는 가르치는 데는 소질이 좀 있다고 여겨지네.”
“그러면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우리 고장인 상주에서 터를 잡아서 같이 훈장을 해봄세. 우리 부친도 자네가 거들면 받아들일 것 같기도 하네. 무슨 과거급제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지 않던가.”하고 두 명의 낙방 선비는 새재의 샛길로 빠져 내려가면서 나눈 이야기였다.
그 두 명의 선비는 새재를 벗어나서 진남교반을 지나고 점촌을 거쳐 박생원의 집이 있는 상주에 도착하였다. 마을 입구에는 이미 낙방의 소문이 먼저 도착하였는지 마중 나온 사람들은 없었고 몇 마리 강아지들이 그들을 향해 꼬리를 흔들어주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그래도 박생원은 급제를 하지 못했지만 삼수에 그쳤기에 아직도 기대감이 있는지 부친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아마 다시 달래가면서 다음번 시험을 치르라고 권유할 요량이었다. 그의 부친인 박참봉이 한 말이었다.
“어쩠던 과거시험을 치르려고 한양을 다녀온다고 고생이 많았다. 일단은 쉬면서 다음번을 구상해 보아야겠지. 이제는 나이도 들었고 하니 혼례도 올려 가정도 꾸려야 하지 않겠나. 같이 온 선비는 누구이더냐.”
“예, 아버님. 급제의 소식을 전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는 이번을 끝으로 과거를 안 보려고 합니다. 같이 온 선비는 본관이 함안이고 어계 조여선생의 후손이 됩니다. 벌써 오수까지 하였기에 고향에 돌아갈 면목이 없어 우리 집에서 얼마간 머무르면 어떨까 하고 아버님께 부탁을 드려봅니다.”
“그래, 벌써 오수까지 하였단 말인가. 그 선비의 집안은 충신 가문이 아니더냐. 자신의 인내력이 대단하고 집안에서도 벼슬에 대한 기대가 컸던 모양이다. 오늘은 물러가서 쉬고 내일에 그 선비를 만나 한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구나. 그리고 혼례는 이미 너에게 말했듯이 예천에 있는 김초시 집안의 첫째 딸과 정혼을 하였기에 준비가 되면 올리도록 하자.”하고 박생원은 부친으로부터 질책은 크게 듣지 않고 혼사에는 고개를 끄덕였기에 분위기는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조생원은 박생원의 집에서 머무르며 앞길을 구상하기로 하였다. 이미 집에도 서찰을 보내 귀향하기가 힘드니 불효를 빌었고, 어계 선조처럼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후학을 기르는데 힘을 쏟겠다고 하였더니 아마 기대를 접은 듯이 답신은 없었다. 다음 해에 박생원은 예천에 정혼해 둔 김초시 집안과 혼례를 올렸다. 이제는 어엿한 가장이 되었으니 행동거지도 조심하고 벼슬길은 아니지만 학문탐구에도 열심이었다. 함께 머무는 조생원과도 경학을 공부하면서 우의를 다져나갔다. 우선 그는 부친을 설득하여 마을에 서당을 지어 훈장노릇을 하기로 하였다. 거기에다가 과거시험 동지이자 뜻을 같이하는 은둔의 삶을 추구하는 조생원이 있기에 외롭지 않았다. 그의 집안은 상주골에서도 이름난 부농이 아니던가. 이렇게 하여 일단 박생원 자신은 안정을 찾았으나 조생원의 앞길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박생원이 조용한 주막에서 조생원과 함께 나눈 이야기였다.
“조생원, 과거에서는 나보다도 선배이지만 나이는 동갑이 아니던가. 이제 고향에는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곳에서 보금자리를 터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예천에 있는 처제가 문득 떠오른단 말일세. 이번 기회에 동서지간이 되면서 가문 간의 인연을 한번 맺어 보면 어떨까 하네.”
“아이구, 박생원이 나를 정말로 위해 주네 그려. 안 그래도 이 근방에 터전을 잡아 볼까 생각했는데 사양은 하지 않겠네. 내가 그런 집안의 사윗감이 될 수 있는 자격이 되는지 걱정이 되기는 하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비록 과거에 급제는 못했지만 학문의 깊이는 이미 장원급제의 수준에 이르지 않았던가. 거기에다가 절개를 지킨 생육신의 후손이니 따져보면 우리 처갓집이 좀 기우는 편이라고 봐야제.”
“허허,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기도 하네 그려. 인연이 되면 가약을 맺어보고 그곳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고 싶은 마음도 드네. 배운 게 공자왈 맹자왈 유학이고 시문에도 약간의 소질이 있으니 훈장자리는 하나 생기겠다고 생각이 드네.”하고 두 명의 선비는 일단 약조를 하였다.
박생원은 서당을 지어 훈장을 맡아 인근의 학동들을 모아 가르쳤다. 간간이 조생원도 나와서 동몽선습과 명심보감에 대해 가르쳤으니 학동들이 올바른 행실을 갖춰 나가자 명성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기본적인 천자문은 박생원이 눈감고도 잘 가르치고 거기에다가 조생원이 인격 형성에 영향을 끼치는 명심보감까지 더해지니 그 서당에 들어오려고 하는 학동들이 많아 줄을 서야 할 지경이었다. 그 두 사람은 과거에 급제는 못해 벼슬은 못했지만 미래의 인재를 기르는 데는 한몫을 하였으니 보람도 느끼는 즐거움도 있었다.
어느 날 박생원의 부친인 박참봉이 조생원을 불러서 나눈 대화가 있다.
“이보게 조선비. 내가 보아하니 학식이 높고 인의에 충실한 성품으로 보이네 그려. 거기에다가 내 아들과 뜻이 맞아 비록 과거를 포기하였지만 후학들 양성에 힘을 쏟는 걸 보니 감동이 오네. 세태가 이러니 그 위험한 벼슬길보다는 향리에 묻혀 은인자중 하는 것도 좋은 처세법이라고 생각하네.”
“또 하나, 내가 짐작하는 것이지만 자네 집안이나 우리 집안도 실력이 뛰어 난들 급제하기에는 큰 장애가 있다고 여겨지네. 단종복위운동과 관련된 가문은 관직에 진출하는데 불이익이 주어지고 있다는 풍문이 떠돌기도 하더구만. 우리 가문도 그 많던 급제자들이 이제 가물에 콩 나듯이 찾아볼 수도 없으니 생육신 집안인 자네도 그런 영향을 받았지 않았나 생각이 드는구만.”
“예, 춘부장 어른. 박생원이 저와 뜻이 맞고 의기 또한 비슷하기에 知己라고 여깁니다. 저가 과거에 낙방을 한 것은 실력이 부족하여 그런 것이라고 여깁니다. 고향에 못 내려가는 저를 끌어안아 서당에서 학동들을 가르치는 마당을 펼쳐주신 은덕을 어찌 잊겠습니까.”
“내가 좀 외람된 이야기이지만 자네 혼사에 다리를 한번 놓아 볼까 하는데 괜찮겠는가. 바로 인근의 예천에 있는 우리 아들의 처가가 되는 의성김씨 집안이네. 나중에 성사가 되면 우리 가문과도 사돈지간이 되니 내가 적극 권해보네.”
“예, 춘부장 어른. 갈 곳이 없는 저가 그런 집안에 어찌 사위로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재산도 없고 당장 거주할 집도 없는데 언감생심이기도 하지만 말씀이나 따나 감사합니다. 그 의성김씨하면 학봉 김성일선생의 집안으로 명문가가 아닙니까.”
“허허, 조선비가 너무 겸손하시네 그려. 사람이 중하지 재산은 나중에 일이 아니던가. 그 집안은 전답이 많아 딸에게도 아들들 모르게 살며시 분재도 해줄 수 있을거라 보이네. 오직 자네는 몸만 가면 되니까 그 점에서는 걱정을 말게나.”하고 박생원의 부친과 조생원이 나눈 대화였다.
이윽고 조생원은 예천의 김초시 가문에 장가를 들었다. 물적으로는 가진 게 없지만 정신적으로는 학식과 선비정신을 지녔기에 그것 또한 재산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남들은 달랑 그것 하나 차고 처가살이를 한다고 하지만 자천이 아닌 타천에 의한 것이니 자존심도 지킬 수가 있었다. 김초시는 생육신 집안에 둘째 딸을 보내어 그 집의 귀신이 되도록 하였으니 부모로서 할 바를 다하였던 것이었다. 또 큰 사위인 박생원과도 뜻을 같이하는 친구지간이었기 때문에 그 또한 다행스러운 경우가 아니겠는가. 조생원은 예상한 데로 처가의 도움으로 새살림을 차리고 장인어른이 마련해 준 서당에 훈장으로 취임하였다. 학식과 인품이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출중하니 예천골에서 많은 학동들이 배우러 왔다. 장차 나라의 인재를 만들기 위해서는 학문도 중요하지만 그는 선비정신을 몸에 배이게 하였다. 입신출세만을 노린 과거공부에 한편으로 경종을 울려가면서 도덕과 인의를 체득케 하는 교육방침을 정했다.
어느 날 知己이기도 동서이기도 한 박생원이 그를 찾아와서 주막에서 편안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생원, 이제 예천에 정착하여 후학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있구만. 소문을 들어보니 자네 칭찬이 자자하더군. 천자문만 가르쳐도 그런대로 훈장노릇을 한다고 하는데 명심보감에다 또 인의를 실천한 선비들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니 바로 그게 참 교육이 아니겠는가.”
“허허, 소문이 발이 없어도 상주까지 갔구만 그려. 그냥 내가 가르치고 싶은 데로 한 것뿐인데 칭찬이라고 하니 과분하다고 여겨지네. 우리가 못한 것을 후학들이 나서서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 꿈이 아니겠는가.”하고 두 명은 회포를 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김초시는 두 명의 사위를 주안상에 마주 앉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살아가다가 오늘처럼 기쁘고 감개무량한 날이 더 있겠는가. 두 명의 사위를 불러서 술 한 잔을 나누니 만감이 교차하구만. 비록 과거에 급제는 못했지만 고을에서도 유명한 훈장이 되지를 않았는가. 퇴계선생도 벼슬보다는 후학을 기르는데 열정을 쏟았고 또한 자기 수양을 하지 않았던가.”
“두 명 모두 다 실력이 부족하여 낙방하였다고 보지를 않네. 아직도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한 가문들은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고들 있게나. 우선 큰 사위는 박팽년선생의 순천박씨 가문이 아니던가. 또 둘째 사위는 어계 조여선생의 후손이고 말일세. 의를 생명처럼 여기며 선비정신의 모범을 보인 분들이기에 후손들도 응당 그런 길로 가는 게 도리라고 보네.”
“무엇보다도 귀한 것은 자네들 둘이는 뜻을 같이하는 친구를 만났고, 나도 그런 두 사람을 사위로 맞았다는 것이네. 세상에 태어나 많은 친구를 만들지만 뜻이 아닌 정에 의한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내가 알았기에 자네들 두 명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보네.”
“둘째 사위는 고향으로 낙향을 하기가 어려워 이곳 예천에 자리 잡았는데, 뜻이 맞는 친구와 가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낙이겠는가. 이곳 예천은 물론이고 상주에도 과거를 보러 오가다가 고향으로 갈 면목이 없어 정착한 가문이 숱하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게나. 문경새재의 장원급제길로 내려오지 못했던 수많은 선비들의 애환이 서려있다네. 또 먹고살기 위해 새재를 넘어 물산이 풍부한 상주나 예천 쪽으로 흘러들어온 집안도 많고, 가난한 집안의 딸들이 민며느리로 팔려 온 경우도 허다하다네.”하고 장인어른은 과거를 회상하며 두사위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박생원과 조생원의 장인이 되는 김초시는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경계하여 자식들에게는 소과에만 응시하고 대과는 보지 않도록 하였다. 이왕 과거를 보는 김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다면 가문의 영광이기도 한데 초시까지만 허용하였다. 그는 권력은 언젠가는 허무하게 무너지고 자칫하면 그 예리한 양날의 칼에 의해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비가 가야 할 길은 면학과 경세가 맞지만, 당파싸움에 휘말리면 경세를 펼치기보다는 붕당을 지어 난세로 가는 길일수도 있기에 그러했다. 그러니 기본적인 선비의 도를 알 수 있는 초시 즉 진사까지만 오르도록 하였다. 그러니 과거에 낙방하여 초시에 머무른 두 명의 사위를 흔쾌히 맞이하였던 것이었다. 그 시절은 사색당파로 정국이 혼란하고 숙청에 의한 환국이 빈번하여 많은 선비들이 목숨을 잃거나 유배를 갔었다. 그래서 김초시는 가문을 보존하고 마음의 안정을 얻는 학문의 길을 가기를 자식들에게 강력하게 주문하였던 것이었다. 가문의 가훈도 근신(勤愼)이었고, 액자에는 근위무가지보(勤爲無價之寶) 신시호신지부(愼是護身之符)라고 적어 대청마루 위에 걸어두었을 정도이었다. 성실하게 일하면서 살아가고 매사에 신중하여 자신을 보호하라는 뜻이었다.
세월이 제법 흘러가서 김초시가 먼저 떠나고 박생원의 부친도 그 뒤를 따랐다. 박생원은 훈장을 큰 아들에게 넘겨주었고, 조생원 역시 훈장을 둘째에게 넘겨주어 사실상 은퇴를 한 셈이었다. 그 두 사람은 장인인 김초시가 당부한 데로 자식들을 과거시험에 못 나가게 설득하였다. 장인 집안의 가훈인 근신을 실천하면 가정을 잘 꾸려나가고 위험에도 처하지 않기에 후학들을 양성하는 보람을 느껴보라고 권고하였던 것이었다. 동방주자라고 하는 퇴계 이황이 무슨 큰 벼슬을 한 것도 아니면서 면학으로 자신을 완성하고 훈학으로 후학을 양성하지 않았던가. 어느 날 조생원은 인근 안동에 사는 선비로부터 충격적인 소문을 들었다.
“아이구, 조생원. 이제 남인 세상에서 다시 서인으로 권력이 넘어가는 모양이오. 남인의 거두인 허대감이 사사를 당했다고 하오. 권불십년이라고 하더니만 바로 그런 꼴일세. 또 수많은 남인출신들이 파직당하여 유배를 갔다고 하니 권력무상이 아니겠오.”
“그러게 말이오. 사색당파의 폐해로 병란을 겪고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오. 그 권력의 달콤한 맛에 취해서 결국 목숨마저 넘겼으니 어리석기도 하네요. 무슨 할 짓이 없어 복상이 어떠니 예송논쟁으로 다투고 하니 그것이 학문인지 이론인지 모르지만 한심할 따름이오.”하고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생원은 그렇게 염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권력의 무상함을 다시 느꼈다. 장인어른이 벼슬길을 경계하고 오직 수신제가에 충실하고 면학과 후학양성을 위하여 힘을 쏟으라고 한 말이 금언인 것을 증명하였다. 자신의 선조인 어계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이유도 그러하였으니 비록 급제를 못했지만 자신을 온전히 보전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어느 봄날 조생원과 박생원이 오랜만에 새재 입구인 문경에서 만나서 나눈 이야기가 있다.
“조생원, 저 새재를 오르내린 지가 벌써 수십 년이 지났구만. 나는 세 번을 오르내렸고 조생원은 다섯 번인가 오르내렸었지. 우리가 샛길이 아닌 장원급제길로 내려왔다면 자네하고 노후까지 함께하지 못했을 텐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던가.”
“박생원, 그 시절이 아득한 옛이야기가 되어버렸구만. 내가 장원급제길로 내려왔더라면 어찌 훌륭한 장인어른을 만났을 것이며, 知己인 자네와 이토록 행복하게 노닐 수 있었겠는가. 참으로 길은 나름대로 깊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네. 그 샛길이 그 당시에는 안타까운 길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행복의 길이었다고 생각되네.”
“조생원 자네는 이제 예천에서 씨를 뿌렸으니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번창하여 후일 생원공파라고 부르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 하하.”
“허 그참, 듣고 보니 그럴듯한 말이네 그려. 우리 가문은 영남의 남도에 몰려있는데 내가 나서서 그 씨앗을 조령아래에 뿌렸으니 조령공파라고 불러도 되겠네. 하하.”하고 두 명의 생원은 조령너머로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그 옛날 머물던 주막에서 한잔 술로 취흥을 올렸다.
조생원과 박생원이 젊은 시절 청운의 꿈을 안고 오르던 새재길이 내려올 때는 애처로웠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벼슬이라는 말을 타지 못했지만 안심이라는 학을 탔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여겨졌다. 말을 잘못 타면 낙마도 하고 낙상도 하니 위험하기만 하였다. 학은 비록 탈 수는 없지만 마음의 평안과 장수로 인도하니 청량한 선비정신의 상징이지 않던가. 조생원은 지나고 보니 박생원이라는 뜻을 같이하는 친구와 함께 하는 낙을 누리는 게 타관에 머무르는 결심의 동기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새재의 그 갈라지는 운명의 길에서 만난 두 사람은 知己가 되어 새재 아래 고을에서 터를 잡았으니, 새재는 그들에게 벼슬길보다 나은 샛길을 가르쳐주어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