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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남도의 횃불

녹두장군과 김개남장군의 혼을 달래며

by 벽운

남도의 횃불


날은 추웠고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하늘은 음산하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길은 쌓인 눈에 진눈깨비가 더해져 뽀드득거리다가 마지막에는 질퍽거렸다. 주변의 마을은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밥 짓는 연기는 보이지를 않았다. 무슨 폐허처럼 대문은 허허하게 입을 벌리고 지붕은 미치년 머리칼처럼 눈바람에 들썩거리면서 흩날리고 있었다. 강아지도 지쳤는지 샆작까지 나오지 못하고 축담에 기대어 축 늘어져있었다. 산을 찾아보기 힘든 드넓은 평야는 무엇을 생산하였는지 알 수 없는 정도로 숨을 죽이고 눈을 감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은 오직 차가운 칼바람과 곡성 같은 바람소리뿐이었다. 이리저리 길게 뻗은 신작로는 곡선을 이루어, 나아가는 방향을 쉽게 알려주지를 못했다.


길은 나있지만 어디로 가는지를 알려주지 않고 단지 허허이 벌판 위에 누워있기만 하다. 오가는 사람들이 마주치고 교차하여야 하지만 그 눈길은 황혼이 찾아오자 유령처럼 삐꼼히 눈을 가리고 내다보고만 있다. 그 눈길을 어둠 속에 걷는다는 것은 죽음을 피해 가거나 또 다른 목표를 가지지 않고서는 안될 것이다. 오직 집념에 찬 사람만이 하늘도 보지 않고 추위도 탓하지 않고 배고픔도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가는 모양이다. 밤길을 혼자 걷는다는 것은 두렵고 외롭고 고단할 것이지만 눈앞의 것을 보지 않고 마음의 길을 따라가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동행이 없는 길이기에 입을 벌릴 일이 없기에 콧구멍에서 나오는 김이 수염에 차근차근 얼어붙는다. 신은 짚새기에 새끼줄을 감았지만 한 번씩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여 간간이 놓아버린 정신줄을 챙겨주기도 하였다. 머릿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생각이 떠오르고 좀 지워졌다가 다시 채워지기도 하였다. 때로는 불안하기도 때로는 가슴이 들끓기도 한 번씩 발작적인 경련도 일으켰다. 빈주먹은 추위 탓인지 또 다른 이유 때문인지 더욱 굳게 쥐어져 있다.


그가 집을 나온 지가 이틀째이지만 아직도 갈길이 남았는지 걸음은 멈추지를 않는다. 등뒤에 짊어진 바랑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그런대로 묵직하게 보인다. 어디까지 가는지를 누가 물어보지 않았기에 알 수도 없었다. 혼자서 걷는 길이라 그의 심경을 알려주는 아무 단서도 찾을 수가 없고 오직 음산한 날씨만이 추측해 주는 듯하였다. 이제 나지막한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길가에 주막 한 채가 정자나무를 기대어 흔들리듯 자리 잡고 있었다. 칼바람에 찢긴 장명등이 흔들리는 주막을 그는 살며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구, 이런 날씨에 어디서 오는 길이신가요. 옷도 다 젖고 짚새기에는 얼음이 덕지덕지 얼어붙어있군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서 몸을 좀 녹이시지요.”

“나는 어디서 오는 길이 아니고 어디로 가는 길이입니다. 여기가 아마 삼례가 맞는지요.”

“야, 조금 더 가면 삼례 삼거리가 나오지요. 날도 저물었으니 여기서 주무시고 가셔야 할 듯요.”

“나는 지금 지체할 수가 없어 장국에다 탁배기 한잔만 하고 가렵니다. 그러면 삼포나 덕실도 얼마 안 남았겠네요.”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들어서면 곧장 삼포 가는 길이 나옵니다. 쉬지 않고 걸으면 오늘 저녁 안으로 당도할 겁니다.”


다시 걸어야 했다. 잠시라도 지체할 수가 없었고 오늘 저녁 안으로 그곳으로 가서 일을 마쳐야 했다. 미룰 수는 있지만 미루기에는 너무 늦었고 시기를 놓치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진눈깨비가 이제 눈으로 변해 펑펑 내린다. 차라리 물기가 없는 눈이 훨씬 걷기에 나았고 발도 편했다. 얼마간 쉬었으니 힘도 다시 올랐고 발걸음도 빨라졌다. 어둠 속에 희미하게 만경강이 눈에 들어오고 낮은 구릉과 독뫼만이 어둠 속에서 나아가는 길을 가리켜 줄 뿐이었다. 강물은 흘러서 곧장 바다로 들어갈 것이고 그도 얼마 후에는 그곳에 당도할 것이다. 아마 기다리는 사람이 그곳에서 있을 것인지 궁금하였지만 믿기로 하였다.


사흘 전에 고부에 있는 그에게 기별을 하여 급히 올라오라고 하지 않았던가. 빠른 걸음으로 바삐 왔으니 만날 수가 있을 듯하였다. 그 사람의 얼굴도 모르나 예전에 쓰던 사발통문 방식을 아는지라 문제가 안될 것 같았다. 그 사람이 만나자는 뜻도 대충 알았으나 믿을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자기 같은 말단을 해하려고 만나자고 하지 않을 것이기에 믿는 것이 맞을 것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만경강이 잠시 숨을 고르는 곳에 삼포라는 푯말이 눈에 들어왔다. 방향은 바로 잡은 모양이었고 이제는 다시 산 쪽으로 방향을 틀어 덕실 쪽으로 나아갔다. 그가 받은 통문에는 받은 날로부터 사나흘 되는 날에 덕실 앞 정자나무 옆 서낭당 앞에서 자시를 넘기 전에 만나자고 적혀있었다. 그는 덕실에 도착하였고 서낭당 앞에서 헛기침을 세 번 하였더니 어둠 속에서 힌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혹시 고부에서 오신 분이 맞으신가요. 받은 통문을 보여주시지요.”

“예, 맞습니다. 그날 출발하여 오늘 늦게 당도하였지요.”

“나는 눈이 오는 날이라 내일 정도 오실 줄 알았는데 발걸음이 참 빠르시군요. 저의 이름은 김대치입니다.”

“어찌 지체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박영석이라고 합니다.”

“예리한 비수를 갖고 오라고 하였기에 용무는 짐작을 합니다만......”

“지금 그 작자가 있는 곳이 덕실에서 조금 더 가면 되니, 자시를 좀 넘어서 도착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함께 가서 바깥에서 망을 볼 테니 처리하고 나오시면 됩니다. 선생께서는 체력이 좋고 칼을 잘 다루시고 표창도 잘 던진다는 소문을 듣고 기별을 한 것입니다.”

“허허, 먹고살기 힘들다 보니 백정 노릇을 오래 하였었지요.”


그들은 어둠 속을 헤쳐가며 찬샘골에 도착하였고 몇 가구 안 되는 마을에 그자의 집을 찾아내었다. 이미 김대치가 훤히 아는 집이라 손안에 들어온 것이었다. 마을은 자시를 넘었는지라 모두 다 불이 꺼져있었고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찌 보면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처럼 죽어있는 것만 같았다. 어제까지는 살아있었는데 죽은 것인지 매일 밤이 되면 죽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영석은 바랑을 벗어 얼굴을 가릴 복면을 꺼내고 품속에 있는 비수를 또 표창이 잘 있는지 만져보았다. 허벌나게 많은 소를 잡아보았지만 사람을 작정하고 죽여본 적이 없는지라 떨렸다. 소를 잡을 때 천궁이라는 곳집에 끌고 가서 초를 캐서 명복을 빌고 난 후에 고통을 안 주도록 예리한 망치로 정수리의 급소를 때려 안락사시켜 칼질을 하였던 게 아니던가. 그러면 사람을 죽여야 하는데 예식을 갖추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선제적으로 가격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박선생, 마음이 떨리시지요. 우선 독한 홍주를 한잔 드시지요. 육포도 한점 하시고요.”

“아 예, 내가 막상 하려고 하니 마음이 흔들리네요. 그자의 이름이 무어라고 했었지요.”

“그자는 윤달중이라고 하고 덩치는 크지만 몸이 좀 둔하답니다. 술을 무지 좋아하고, 머리통이 크고 얼굴이 두꺼운 편이라 막바로 알아볼 수가 있을 겁니다.”

“잘 알겠소. 우선 그 집에 개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있으면 불쌍하지만 죽이고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그자가 좀 신중하여 개가 있을 것입니다. 그까지는 못 알아보았소이다.”


먼저 대치가 집 주변을 한번 돌아보고 나와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신호를 하였다. 영석은 손에 표창을 쥐고 천천히 들어가니 개소리는 들리지가 않아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숨을 크게 고르고 방문을 아주 조심스레 스르르 밀었다. 안에는 어둠 속이지만 이불속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낌새를 채지 못하고 곤하게 잠들은 모양이었다. 다시 그의 가슴은 요동치기 시작했고 손도 떨렸기에 그냥 덮쳐서 찌르고 싶었지만 꼭 필요한 추달을 받아야 하니 조금 시끄러을 것 같았다. 그자의 놀란 목소리에 옆방에서 달려 나올 것이기에 어떻게 할까 망설여졌다. 그자의 숨통을 끊는 것은 지금 당장 가능하였지만 그 배후를 캐어야 하니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때가 언제던가. 아마 갑오년이었을 것이다. 박영석은 삽을 들고 들로 나가서 심어 놓은 벼에 물꼬를 열어 물을 대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그 흔하게 넘치는 물은 공짜가 아니라 수리세를 내어야 하니 코웃음이 나오기도 울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였다. 철철 넘치는 물을 수리세를 내고 받아야 하는 게 도대체 무슨 횡포인지, 또 매년마다 수리세를 올리는 것은 무슨 수작인지 도저히 마음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그는 세금 낼 돈도 없었지만 낼 생각조차 없어 마냥 미루어버렸다. 어느 날 가을 추수를 앞둔 시기에 관아에서 인부를 들여 벼를 마구 베어서 실어가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는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들고 있던 삽으로 우두머리 관리의 머리를 내리쳤다. 아차 하는 순간 엄청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관에서도 아무리 그렇지만 수리세를 안 낸다고 물길을 막는 게 아니고 벼를 마구 베어갔으니 이성을 잃게 만든 책임이 있었다. 그 길로 그는 마을을 떠나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은 갈수록 심해지고 농민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도 없었고 하소연 한들 들어줄 곳도 없었다. 이미 관은 물론이고 조정도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농민들이 죽던 살던 관심이 없었다. 풍양조씨의 세도가 하늘을 찌르듯이 높았고 누구도 꺾을 수가 없는 기세였다. 못 먹어서 얼굴이 누렇게 뜬 아이들이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칡뿌리와 풀뿌리를 캐어서 먹지만 그 배고픔을 달랠 수가 없었다. 꾹꾹 눌러두었던 솥뚜껑이 들썩 거리다가 어느 순간 부글거리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전봉준을 우두머리로 한 농민군이 쇠스랑과 낫을 들고 고부관아로 들이닥쳤고 쉽게 점거하였다. 아무런 저항도 없었고 포졸들은 남의 일처럼 그저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미 민심이 떠난 상태라 관의 포고문도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공허한 메아리도 돌아왔다. 조정에서는 이사태를 그냥 두면 나라가 무너질 것 같아 관군을 파견하여 농민군들과 맞섰지만 오히려 그쪽으로 가담하고 말았으니 그 기세를 몰아서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그간 고향을 떠난 박영석은 피신하던 중 동학교 대접주인 손화중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피 끓는 혈기와 당당한 체격을 보고 그를 김개남에게 소개하였다. 그의 용맹에 반한 김개남은 그를 참모로 삼았고 1차 봉기인 황토현을 비롯한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한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고 이빨 빠진 관군을 대신하여 일본군이 전투에 개입하였다. 2차 봉기인 우금치 전투와 청주 전투에서 막강한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대패하여 김개남을 비롯한 참모들은 산으로 숨어들었다. 은신처에는 김개남과 박영석의 얼굴이 보였고 녹두장군과 손화중도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 다음 날 관군들이 어찌 알았는지 김개남의 은신처로 들이닥쳤고 눈에 띄는 김개남은 체포되고 박영석은 도망쳤다. 전주관아로 압송된 김개남은 감사인 이도재의 칼에 의해 목이 날아갔다. 그 소식을 들은 박영석은 분개하였고 밀고자를 찾아내어 처단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해서 눈보라가 치는 먼 길을 급히 걸어왔던 것이었다.


이윽고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서는 데 인기척에 놀란 윤달중이 눈을 부시시 뜨는 게 아니던가. 소리를 치면 일이 더 커질 테니 막바로 몸을 날려 그를 덮쳤고 그 억센 손으로 입을 털어막았다. 달중은 잠결이라 맥을 못 추고 순순히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고 재빠른 동작으로 입에 자갈을 물렸다. 그는 예리한 비수를 꺼내어 목줄에 대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윤달중이 이놈아, 어찌 김개남 장군을 밀고하였단 말인고. 몇 번을 쳐 죽여야 할 놈아. 장군이 전주관아에서 목이 날아간 것을 너는 알고나 있느냐. 이런 개 호로새끼야.”

“우욱 우욱, 살려주시오. 내가 현상금에 눈이 멀어 죽을 죄를 지었소.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시오.”하고 컥컥거리면서 말을 하는데 알아듣기가 어렵다.

“분명히 너를 꼬드긴 놈이 있을 테니 그놈의 이름을 대어라. 그놈들은 한두 명이 아닐 테고 너나 그놈들이나 똑 같이 배신자들이야.”

“나는 그들의 얼굴도 처음 보았기에 이름은 알 수가 없다오. 준다고 하던 현상금도 그들이 다 챙기고 나는 몇 푼을 받지 못했다오. 나도 그들에게 배신을 당했다오.”

“허허, 배신자가 또 배신자를 탓하고 자빠졌네. 이름을 대어라. 아니면 이 칼로 목줄을 따버릴테다.”하고 영석은 달중의 목에 칼을 대고 살짝 그었다.


달중은 혼비백산하여 기절을 해버렸기에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놈을 추달하여 윗선을 알아내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그는 치명상을 입히되 한두 달 간만 살 정도로 옆구리를 적당한 깊이로 찔렀다. 너무 깊이 찌르면 즉사하여 고통을 못 느끼기에, 서서히 죽어가도록 만들어 버렸다. 달중은 통증을 참지를 못했는지 정신이 들어 욱욱 거리면서 몸을 비틀었다. 영석은 다시 문을 박차고 나와 밖에서 기다리던 대치와 합류하였다. 그들은 어둠 속을 뚫고 산속으로 숨어들었고 지리는 그 지역에 사는 대치가 잘 알았기에 위험을 쉽게 벗어날 수가 있었다.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장소에서 둘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영석 선생, 놈을 처단한다고 수고하였소. 다행히 개도 짖지를 않았고 사람들도 나타나지 않아 다행이었소. 개도 사람도 못 먹어서 소리 지를 힘이 없었던 모양이오.”

“내가 그놈을 반쯤만 죽여 놓았으니 시름시름하다가 죽을 것이오. 간에 칼을 대었으니 오래 살기는 힘들 것이고 고통을 느끼면서 얼마 있다가 죽을 것이오.”

“그러면 놈을 추달하여 윗선을 못 밝혔단 말인가요. 소문 듣기로는 몇 놈의 윗선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놈들을 못 잡으면 맥이 빠지는데 걱정이오.”

“내가 달중이를 단박에 목을 따서 안 죽인 것은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던 것이오. 만약 막바로 죽여버렸다면 단독 밀고라고 여겼을 터이니, 윗선들이 자기들에게 보복이 안 올 거라고 믿고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그놈들이 움직여야 잡을 수가 있겠지요.”

“아이구, 박선생의 계산이 치밀하오이다. 소문을 듣고 도망갔는지를 알면 그놈들이 윗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뜻일 테지요.”

“맞습니다. 타초경사(打草驚蛇)라는 고사가 있지가 않던가요. 풀숲을 지팡이로 두들기면 뱀이 놀라서 나타나서 도망간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아마 소문을 듣고 도망친자들이 누군지를 알아보아주시지요.”

“정말 대단한 지략입니다. 이 고을에 내가 의심이 가는 사람 몇 명을 주시하고 있는데 증거가 없으니까 단죄를 못하였지요. 며칠 있다가 그 사람들이 도망쳤다면 윗선이 맞기에 다음번에 처단을 하면 되겠네요.”

예상대로 간이 크게 다친 윤달중은 곧장 죽지를 않고 시름시름하였다. 자객에게 칼을 맞았다는 소문은 삼포와 덕실까지 소문이 다 퍼졌다. 대부분은 무슨 원한관계인지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였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밀고자에 대한 처단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삼포에 사는 김첨지와 박참봉이라는 작자가 어느 날 잠적해 버렸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박영석의 예상이 그대로 들어맞았고, 김대치도 자신이 의심하던 두 사람이 사라졌기에 이제 윗선을 찾아낸 셈이었다. 어디로 숨어들었는지를 접장들을 통하여 알아보면 되고 이제 독 안에 든 신세가 되는 셈이었다.


윤달중이 김개남을 밀고한 것은 그렇다고 쳐도 녹두장군의 은신처는 누가 밀고를 하였는지도 알아보아야 했다. 길을 가다 보면 다시 새로운 길이 보일 것 같았다. 어느 날 김대치에게 전갈이 왔고, 김첨지와 박참봉이 은신하고 있는 장소를 세밀하게 통문에 적혀있었다. 그 둘은 산으로 들어가지 않고 삼례에 있는 어느 권문세가의 집에 숨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정보가 맞다면 한꺼번에 처단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셈이었다.

“허허, 그 두 놈들이 제 딴에 똑똑하다고 민가에 들어앉은 모양이오. 하기야 그 나이에 산으로 들어간들 밥이나 챙겨 먹기나 하겠는가요. 그래서 뒷배인듯한 힘 있는 집안으로 은신한 게일 테지요.”

“맞소이다. 놈들이 아마 뒷배인 양반댁으로 찾아간걸 보니 무슨 암약이 있는 모양이오. 생각건대 자신들을 보호하고 또 우리를 유인하려는 술책인 듯하기도 하고 말이요.”


탐문을 해보니 영석과 대치의 예상대로 그 두 놈은 조병갑의 사돈이 되는 전부자의 집에 은신하고 있었다. 그 전부자는 돈으로 벼슬을 사서 군수까지 지냈고 집에는 사병을 거느리며 신변을 보호하고 있었다. 어떻게 담장을 넘어가서 놈들을 처단할 것인가를 의논하였지만 확실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히 개를 키울 것이며 사병들도 엄중하게 지키고 있을 것이기에 신중히 접근하기로 했다. 그들은 마음은 급하지만 몇 달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칼에 옆구리를 찔린 윤달중이 두 달 만에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러기에 좀 더 기다려서 방심을 하는 틈을 타서 결행하기로 하였다. 박영석은 김대치의 집에 머물면서 기회를 잡기로 하였으나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려니 술만 축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서두르다가 오히려 화를 당할 수 있기에 수양버들이 늘어져서 흐느적거릴 때까지 인내하였다.

“박선생, 이제는 움직여야 할 것 같소이다. 그 두 놈이 바깥으로 나들이도 한다는 소문이 있다오. 그 길목을 잡아 백주이지만 처단을 해야 할 것 같소이다.”

“백주 대낮에 사람들의 눈이 있는데 어떻게 처단을 한단 말인가요. 그냥 죽이고 달아난다면 모를까, 녹두장군을 해친 윗선을 밝혀야 하지 않겠소이까.”

“내가 장담컨대, 녹두장군 윗선은 전부자가 확실하다고 보오. 그 선비라는 작자들이 동학군을 폭도라고 하지를 않았던가요. 김첨지와 박참봉도 선비행세를 하였고요.”

“또 하나, 근자에 들어온 탐문에 의하면 전부자가 동학봉기가 있던 때에 일시 피신했다가 진정되고 난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는 데에서도 알 수가 있지요.”

“그들은 공자님 말씀을 거꾸로 들고 선비행세를 하는 파렴치한 작자들이 아닌가요. 자기들이 호의호식하기 위해서는 체제를 지켜야 한다는 이기주의자들이니 유유상종을 하는 게지요.”

“대치 선생의 말을 듣고 보니 그놈들이 김개남 장군과 녹두장군 모두를 밀고한 윗선이 분명하다고 보이오”이제사 윗선을 일망타진할 기회를 잡았다고 안도를 하면서 영석이 비장하게 말했다.


이런 정보를 입수한 영석과 대치는 삼례로 나가서 은밀히 현장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항상 사병(私兵)들을 데리고 다닌다고 하니 섣불리 나섰다가 거꾸로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또 지금은 난이 평정이 되어 관아가 통제되고 즉각 관졸들이 출동할 수 있기에 여러 정황상 불리한 점도 한몫하였다. 왜 선비들이 동학군들을 역도라고 하였던가. 체제를 전복하는 것은 임금에 대한 역모이자 반란이라고 보는 유학의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선비들의 사주를 받아 밀고자가 수없이 나서기 시작하였고 그로 인해 녹두장군은 물론 김개남과 손화중, 최경선 등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 아니었던가. 윤달중과 같은 밀고자도 용서하기 힘들지만 사주한 윗선이야말로 진짜로 악랄한 존재로 최우선 처단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영석과 대치는 봄철에 삼례로 들어갔다. 통문에 적힌 대로 전부잣집을 돌아보고 들락거리는 하인들과 사병들의 규모도 파악하였다. 그야말로 높은 담장에 겹겹이 둘러싼 담장으로 그야말로 요새와도 같았다. 그 안으로 잠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무모한 짓이라는 것을 즉각 알아챘다. 그들은 기회를 엿보며 기다리기로 하였다. 어찌하여 전부자가 김첨지와 박참봉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다는 게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 무슨 숨겨진 이유가 있다던가. 관아에서 그렇게 하도록 지시하였단 말이던가. 어찌 보면 그 밀고자들을 보호하지 못하면 새로운 밀고자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니 그러면 자신들의 안위도 장담할 수가 없으니 자기들이 살려고 그런 짓을 하는 게 맞는 것이던가. 그들이 자비심이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닐 테고 오직 이기적인 셈법으로 그랬을 것이라고 믿었다.


어느 봄날 능수버들이 흐느적거리면서 계곡물이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정자에 세 명이 갓을 쓰고 술잔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자에서 떨어진 넓은 터에는 몇 대의 수레가 서있고 머슴들 몇 명이 그늘에서 졸고 있었다. 정자 바로 옆에는 우람한 체격의 사병들이 칼을 차고 호위하고 있었다. 영석과 대치는 그 정자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갔다. 앞면이 있는 김첨지가 깜짝 놀라면서도 반색하며 말했다.

“아이구, 대치 선생이 어찌 이곳을 찾아오셨는지요. 오랜만에 보오이다. 삼포에서 한 번씩 술잔도 나누었는데 이리로 올라와서 전대인께 인사를 나누시지요.”

“오우, 두 분께서 신수가 훤하시군요. 삼포보다는 삼례가 살기가 좋은 모양이군요. 두 분이 오랫동안 집을 비웠길래 수소문하여 찾아왔다오. 그래 집이 그립지는 않은가요.”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요새 폭도들의 잔당들이 설쳐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요. 한 번씩 나타나서 목을 딴다는 소문도 들리기도 해서 여기 계신 전대인께서 함께 있자고 해서 그런 게지요.”

“자칭 인품이 있고 세평이 좋다는 김첨지 어른께서 무슨 잘못이 있어 폭도들을 두려워 하신단 말인가요. 여기 또 박참봉 나으리도 함께 계시네요. 수양버들 아래에서 유유상종하는 모습이 참 보기가 좋습니다 그려.”

“가만있자. 그대가 뉘신 줄 모르시지만 하는 말에 가시가 들어있는 것 같군요. 유유상종이라고 비꼬는 말 같은데 무례하오.”하고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전부자가 약간 역정을 내며 말했다.

“내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배신자의 윗선과 수괴를 처단하려고 왔소이다. 전번에 덕실에서 죽은 윤달중이를 아시오. 누가 죽였겠는지 아직 모르시는가요. 여기 서 계신 선비분이 하신 게지요.”

“뭐 뭐 뭐시라고요. 그럼 여기를 온 이유가......”

“그대들은 약한 양민들의 고혈을 빨아먹은 거머리 같은 존재들이니 그 빨아먹은 피가 어떤 색깔인지를 보여드리리다.”하고 조용히 듣고만 있던 박영석이 엄중하게 한마디 하였다.


정자에 술잔을 나누고 있던 세명의 윗선과 수괴는 화들짝 놀라는 바람에 술상이 엎어져서 난장판이 되었다. 그 소동을 보고 정자 아래에 있던 사병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게 아니던가. 영석은 비수를 꺼내어 그 노회한 배신자들의 옆구리를 돌아가며 깊숙이 찔렀다. 그다음에 정자를 당당히 내려가서는 사병들을 향해 큰소리를 질렀다. “위에는 그대들이 모시던 어른들 세분이 술에 취해 조용히 잠들어가고 있는데 깨우지를 마시오.”

정말로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사병들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데다가 박영석의 한마디를 듣고 우왕좌왕하였다. 영석과 대치는 유유히 정자를 빠져나오니 조금 후 그 뒤에서 사병 몇 명이 칼을 휘두르면서 추격해 왔다. 영석은 조용히 품 안에서 수리검을 몇 개 꺼내더니 선두에서 쫓아오는 사병의 우두머리를 향해 날렸다, 그 표창은 정확하게 그자의 종아리에 맞았고 그냥 쓰러졌다. 다시 달려오는 두 번째 사병에게도 날리니 또 정확하게 장딴지에 맞았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나머지 사병들은 겁에 질려 도망가고 말았다. 정자 안에 쓰러진 세 사람은 옆구리에 치명상을 입고 많은 피를 흘렸고 그 피의 색깔은 붉지를 못했고 누랬으니 정녕 사람의 피가 아니었다.


세 사람이 정자에서 칼을 맞아 서서히 죽어간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전주관아에는 범인을 잡기 위해 비상이 걸렸지만 정체를 아는 사람은 배신자들인 그세사람 밖에 없었다. 그러니 도망갈 시간을 얻은 영석과 대치는 사발통문을 돌리던 빠른 발걸음으로 위험지역을 벗어났다. 배신자들은 간에 큰 상처를 입고 하루가 다르게 황천길로 달려가고 있었고 처단하지 못한 수많은 배신자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갑자기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기도 전주성안의 뒷배의 곁으로 숨기도 하여 배신과 밀고의 흔적을 남겨놓았으니 그 처단의 파급력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영석과 대치는 김개남 장군과 녹두장군의 원한을 풀어주었으니 당분간 그지역을 벗어나기로 하였다.

“박선생, 이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고심을 해보야겠소. 다른 수많은 배신자들은 다른 의인들이 나타나서 처단하도록 하고 좀 멀리 피신하도록 합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손화중 대접주와 최경선 장군의 밀고자들도 처단하고 싶지만 그것은 다음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둡시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산으로 들어가기는 좀 그렇고, 나의 선대가 살았던 저 머나먼 섬으로 가고 싶소이다. 그곳은 홍길동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 율도라고 하는 곳이지요.”

“오, 김선생 선대의 고향이 율도라는 말인가요. 전설 속의 섬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도 그 섬이 존재하고 있는가요.”

“예, 고조부 때에 만경강가의 삼포로 옮겨왔고 그 율도에는 지금도 일구어 놓은 터전이 있을 것이외다. 그 집터를 재건하여 여생을 보내는 게 나의 꿈이기도 하였었지요. 어지러운 세상이 나를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가게 하였으니 조상의 뜻인지도 모르겠네요.”

“허허, 꿈보다 해석이 좋소이다. 나도 이제 뭍을 버리고 그곳에서 나의 뼈를 묻어야 할지 모르겠네요. 거기에 가면 무엇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요.”

“그 섬에는 물고기와 조개가 지천으로 있고 산에는 밤나무가 널려있어 먹고 살기에는 염려가 없소이다. 거기에다가 서해로 저무는 낙조를 바라보며 홍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은 낭만 중의 낭만이겠지요.”

“허허, 세상이 편해야 술맛이 날 텐데 말이오. 거기에 가서 녹두장군과 김개남 장군의 명복도 빌고 한적한 곳에 사당이나 지어 기립시다. 그 두분 장군들의 영령이 우리를 포함한 온 백성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소이다.” “나는 지금도 전주관아에서 감사 이도재에 의해 목이 날아간 김개남 장군의 마지막 모습을 잊을 수가 없소이다. 백성을 위해 싸웠건만 나라는 역도로 몰아 죽였으니 누구를 위해 충성을 하여야 한단 말이오이까.”

“영석 선생도 그렇지만 나는 녹두장군이 닭장처럼 생긴 수레에 실려 압송되는 장면을 돌이켜보니 아직도 마음이 먹먹합니다. 그 작은 체구에도 녹두알처럼 글썽거리던 눈매는 비장하기도 자애스럽기도 하더이다. 누구를 위해 나라가 있는지 누구를 위해 북은 울리는지 무정한 세월이오이다.”하고 박영석과 김대치는 과거를 회상하며 회한에 젖어들었다.


그 두 사람의 동학군이자 의인들은 삼포에서 준비해 둔 조그만 돛단배를 타고 망망한 서해로 나아갔다. 추격하는 무리들도 없었고 있다고 한들 그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를 못했다. 나라가 풍전등화인데 수많은 의인들을 어찌 다 막을 것이던가. 지금껏 나라를 구한 것은 민초들이었고 나라를 허약하게 만들어 내우외환을 만든 것은 갓쓴 유생들이었으니 공자님 말씀을 거꾸로 들은 셈이던가. 난세에는 소인배들이 날뛰어 배신을 하여 영달을 꿈꾸기도, 의인들이 나타나서 응징하기도 하여 역사는 바른 길로 접어들기도 하는 것인가.

진정한 선비라면 공자의 인을 실천하고 맹자의 의를 받들어 민중을 잘 보살피고 바른 길이 아니면 나아가서는 안된다. 그것은 대인의 길이기에 대도라고 한다. 갓을 쓰고 있지만 이익을 탐하고 불의에 눈을 감는 자는 소인배라고 하며,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인륜마저 저버린다. 대인은 견리사의(見利思義)를 하지만 소인은 견리즉취(見利卽取)를 하니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면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미몽에 빠진다. 의분을 참지 못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이름 없는 민초들과 의인들이 있었기에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의인! 그들은 불의에 불같이 일어나 요원의 불길 속에서 스스로를 태우면서 후대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박영석과 김대치라는 의인들의 정신이 남도의 횃불이 되어 지금까지 꺼지지 않고 불붙고 있는 것이다.


망망한 서해에는 낙조가 젖어들고 그 돛단배는 수평선 저 멀리로 잠겨가고 있었다. 가물거리며 멀어져 가는 그 배를 배웅하는 사람은 없었고 오직 육지에서 불어오는 순풍에 실려온 갈매기와 함께하며 그들은 멀리로 실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 지긋지긋한 권력의 폭압과 차별이 없는 자기들만의 자유로운 세상을 찾아 나아갔다. 세월이 흐른 후에 들리는 전설에는 서해 먼바다에 있는 섬에서는 김개남 장군과 녹두장군의 기일이 되면 밝은 불빛이 해안가에서 오랫동안 횃불처럼 비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또 나라의 위기 시에는 등대의 불빛처럼 깜빡거린다는 목격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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