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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9화. 가정방문

가정방문을 온 담임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적은 글

by 벽운

가정방문


그는 고향을 떠나 부산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했다. 서대신동 골짜기인 꽃마을 밑에 있는 달동네에 자리를 잡았다. 형편이 넉넉지 못한 집안 사정 때문에 단칸방에 새로운 둥지를 텄다. 시골에서는 그럭저럭 먹고사는 형편이었지만 도시에 오면 빈민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수하여야 했다. 초등학교 동창들은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농사를 짓거나, 시골 중학교에 겨우 진학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빈민가 셋방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것만 해도 행운이라 생각하고 불평하지 않았다.


그가 사는 달동네는 아름다운 동네였다. 아마 밤이 되면 달 보기가 좋고 달과 가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둠이 깔린 높은 동네에 달빛에 젖은 토담집을 상상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비록 판자촌에다 흙집들이었지만 고향의 정취를 느끼게 하고 사람들은 뻐기지 않고 겸손하며 인정이 있었다. 승학산과 구덕산을 가르는 움푹 파인 곳에 포근히 앉은 꽃마을은 그야말로 꽃천지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머리에 꽃바구니를 이고 시내로 팔러 나가는 여인들의 행렬은 꽃길 같이 아름다웠다. 아담한 계곡에는 진달래와 산꽃들이 계절 따라 피고 시원한 물소리와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와 같았다. 단지, 저 아래 도회로 내려가면 소음과 공해로 기분이 혼탁해지고 경쟁의 씨름판은 마음의 평화를 앗아갔다. 하루에 한 번씩 등하교로 오르내려야 하니 사회의 각박함과 치열함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공부라는 게 잘살기 위한 수단이라고 하지만 그는 시골에서의 욕심 없는 순박한 생활이 좋았는데 사회는 그를 도시로 자꾸 끌고 들어갔다. 대부분 아랫동네 번화가에 사는 학우들은 끼리끼리 어울리며 부를 자랑하기도 향유하기도 하였다.


그에게 오로지 즐거움이라고는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올 때, 다소 서민층에 속해 정서가 맞고 방향이 같은 친구와 서로의 전차비를 모아 별사탕이 든 ‘킹구빵’이라는 건빵을 한 봉지 사서 나누어 먹고 이야기하면서 걸어가는 것이었다. 일요일이면 꽃마을에서 내려오는 으슥한 곳 계곡물에 찌든 때를 씻으며 떠나온 고향 동네의 분위기를 느끼곤 하였다. 그때 정이 많아 그를 자기 집으로 종종 불러 밥을 함께 먹자고 하던 친구가 있어 도회에서의 우정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그의 순진함과 촌스러움에 호감을 갖고 아주 친하게 지내고 그 집은 그의 의지처가 되기도 하였다.


이제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3학년이 되었다. 2학년 때 급우들과 헤어지기도 같이 가기도 하여, 3학년 4반에 편성되었다. 2학년 때까지는 학업이 주이었지만 제법 놀기도 하였는데, 3학년부터는 고난의 시험준비 공부에 전념하여야 했다. 제법 이름이 있는 고등학교에 가려면 반에서 상위권에 들어야 하기에 모두들 눈에 불을 켜고 밤늦게 까지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개인 과외수업이나, 학원에서 지금 말하는 일타강사로부터 영어, 수학의 강좌를 듣는 게 일반적이었다. 중학교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은 국. 영. 수 선생님들이 대신동의 학원에 방과 후에 출강하였다. 다음날 담임선생님께서 중간고사 성적표를 나누어 주면서 좀 성적이 부진한 학생들에게 개별적으로 훈시를 한다.


“너는 성적이 오르락내리락하는데 실력인지 운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네.

요새 속된 말로 ‘겐또’를 쳐서 시험지를 작성한 건 아닐 테고 말이제.“

“너는 고등학교 진학을 안 하려고 하나. 아니면 공고나 상고에 가서 일찍 졸업해서 사회에 빨리 진출하려고 하나. 거기 가더래도 장학생도 되고 하려면 열심히 해야할낀데 그쟈.”

“너는 꾸준한데 그 정도로는 일류 고등학교에 가기에는 좀 부족하다. 운이 좋으면 들어갈 끼고, 그렇지 않으면 떨어질끼고, G선상의 아리아 같다.”하고 그에게 빙긋이 웃으면서 분발하라고 촉구한다.


이처럼 담임선생님은 성적이 다소 쳐진 학생들에게 관심을 쏟고 진학지도를 하였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합격 안정권이라서 그런지 아예 부르지도 않았다. 그런 점에서 다른 반 담임선생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 우리 반 학생들이 존경하였다. 그 선생님은 영어 담당으로 실력이 탁월하였으며, 외모도 영화배우급이라 여자학교에 갔으면 소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될 분이었다. 유머 감각도 뛰어나 영어시험지를 풀 때면 “답 다 알제”하면서 분위기를 띄우곤 하셨다. 초등학교 때 그에게 포근하게 대해주고 얼굴도 아름다우신 여자 담임선생님에게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감정을 느꼈었다.


“다음 주부터는 방학도 지났고 새 학기를 맞아 방과 후에 가정방문을 하려고 하는데 잘 알것제. 시간관계상 다 가보지도 못하고, 지금까지 부모님과 대면이나 전화연락을 못한 아이들 집을 찾아가 볼까 하는데 불만이 없제.”하고 앞자리부터 뒷자리까지 쭈욱 앉아 있는 학생들을 훑어보면서 말씀하신다.

“우선 대신동 쪽에 사는 아이들 집에 가보려고 하는데, 가는 김에 부모님들 만나볼 수 있도록 미리 통지한다. 그렇다고 나쁜 말은 안 할 테니 불안해하지 말고 꼭 만날 수 있도록 해보자.”

“대신동 쪽에는 현규와 인세, 만수가 있는데 토요일 학교 마치고 같이 함께 가보자.”하고 세 명을 따로 불러 조용히 말을 한다.

“지가 사는 데는 높은 산골짜기이고 아버지는 부산에 지금 안 계시고, 어머니는 시골에 동생들 키우고 있어 만날 사람이 없으니 안 오시면 안 될까 예.”하고 인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그래도 네가 어찌 사는가도 보고해야 안되건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같이 가자. 뭐 그렇게 같이 안 갈라고 하노.”

“선생님 1학년 때와 2학년 때도 담임선생님께 부모님 못 만난다고 하니까, 그럼 알았다 하고 안 오시던데 예.”

“하, 글마 참 말 많네. 나를 설득하려고 나서네. 나는 지금껏 네가 시골 출신에다가 싸움도 많이 하고 도시락도 안 싸가지고 오고 해서, 일단 사는 데가 어떤 덴고 한번 가봐야 되겠으니 자꾸 긴말 하지마라이.”하고 선생님이 단호하게 말하니 어쩔 수 없이 “예”하고 모기만 한 소리로 대답하였다.


하기사 시골에서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온다고 하면 불안감에 밤잠을 못 자고 오지 않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그때도 마을 단위로 돌아보고 갔는데 대부분 학생들이 가정방문을 안 오기를 바랐다. 오면 성적이 어떻느니, 행실이 어떻느니, 결석을 했는데 그게 맞는지, 소위 ‘땡땡이’ 친 것이 탄로 나기도 해서 말이다. 그때의 일화가 있어 생각하면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효표야! 너 어제 결석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 숙제 검사도 있고 해서 어디 산에 가서 논다고 그런 것은 아니제.”

“선생님, 저희 집 암소가 송아지를 낳아 우리 아버지가 학교 하루 가지 말고 집안일 도우라고 해서 못 갔심니더.”

“야 봐라, 무슨 소리하노. 송아지 낳은 것하고 너하고 무슨 상관이냐.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럴듯하게 해라.”

“선생님 정말 맞습니더. 송아지 낳으면 하는 일이 많습니더. 어미소와 송아지도 뜨신 물로 잘 씻기고 여물도 부드러운 걸로 먹여야 하고 말입니더.”

“알겠다. 너의 말을 믿기로 하는데 다음 가정방문 가면 부모님께 물어볼게, 맞는지 아닌지 알것제.”하고 담임선생님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의심하던 적이 있곤 하였다.


그도 가정방문하면, 그런 점 때문에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는 학교에서 여학생들을 놀리고 남학생들은 서열을 정해준다고 싸움을 붙였으니, 가정방문을 오고 간 날은 어머니의 휘초리에 종아리가 터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선상님, 우리 아가 그렇게 못된 짓을 했다 말입니꺼. 많이 때려주지 그랬습니꺼.”

“안 그래도 책상을 들고 있어라 하고 벌을 좀 주었는데, 안보는 사이에 책상을 내려놓고 있어 좀 매로 때리고 귀를 잡아 땡겼지요.”

“잘 했습니더. 그 언젠가 귀가 아파서 자다가 끙끙거리는 소리도 듣고 했는데 무슨 잘못을 크게 저질렀던 모양이지예. 걔는 동네에서도 말썽을 너무 부려 나한테도 맞고 저그 형한테도 맞고 합니더.”

“그때 보니 저그 짝지가 여학생인데, 부산서 전학 와서 공부도 잘하고 해서 성적이 좋은 순서대로 앉히는데 서로 짝지가 되었지예.”

“그런데 그 여학생이 가져온 미술시간에 도화지 끼우고 그리는 화판을 신기해서 건드리다가 집게를 망가뜨려 그 여학생이 울고불고 했지예.”

“거참, 걔가 본래 호기심이 많기도 하지만, 남의 것을 손대다가 망가뜨렸으니 벌을 받고 맞을 짓을 하였네예.”


“그까지는 좋았는데, 벌을 받고 난 뒤 반성은 안 하고 그 여학생에게 보복을 하고 또 울려버리고 해서 내가 양쪽 귀를 좀 더 세게 땡겼지요.”

“잘 했습니더. 그넘의 자석 어디 갔는지 숨어버려 지금 안보이니 들어오면 혼을 좀 내겠습니더. 선생님한테 미안한데 술이나 한잔 하고 가시이소.”하고 어머니는 작은방에 아버지가 반주로 마시는 됫병짜리 소주병을 들고 와 신문지 마개를 빼고 김치안주에 소주를 한잔 따른다.

"아이구, 선생님 미리 알았으면 안주도 준비하고 찌짐이도 좀 꿉고 했을 텐데 참 민망합니더. 다음번에 오시면 잘 해드릴께 예. 그놈의 자석이 가정방문 온다고 얘기도 않고 어디엔가 숨어버렸네 예. 내일 학교 가면 벌을 좀 세우이소. 그아는 힘이 좋아 걸상은 안 되고 책상이라야 되는데 그렇게 하이소.“이렇게 초등학교 시절의 가정방문을 되돌아본다.


이윽고 중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의 가정방문 날이다. 그는 학교를 마치고 서대신동의 현규의 집을 거쳐서 선생님을 모시고 가게 되어있다. 선생님과 현규와 셋이서 함께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선생님도 그와 현규가 친하게 같이 등하교를 하는 것을 보셨는지 함께 조를 짜주신 것이다. 혹시 학교를 마치고 가는 길에 킹구빵을 사들고 한 개씩 아껴먹고 걷는 광경을 보셨는지도 모른다.


“현규는 나이답지 않게 너무 점잖고 조용한데 성격이 좀 그렇나. 어째 영감 냄새가 나기도 하고, 기가 죽어 그런 것은 아닌 것 같고,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아님니더, 요새 반(班)아들이 너무 공부에만 열중해서 말을 걸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조용히 지내고 싶어서 그렇습니더.”

“그러면 공부라도 열심히 해야 하는데 좀 그렇지 못한데, 다른데에 관심을 갖고 있나. 얼마 전인가 동대신동 서부극장이 있는 골목길에서 본 적이 있는데 혹시 영화 보러 다니는 거 아니가.”

“영화는 좋아하지만 입장권 살 돈이 어디 있습니꺼. 영화 다 끝나갈 때 문 열어주면 나머지 보고 오기는 합니더.”

“영화도 좋지만 우선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하니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해라. 영화는 대학이나 가서 실컷 보고 알것제.”


“참 인세, 너도 영화를 좋아하나. 촌에서 살았으니 보고 싶어도 보기가 힘들었겠제.”

“맞습니더. 시골에는 우짜다가 가설극장이 들어와서 영화를 돌립니더. 영화 보러 오라고 확성기로 동네방네 방송을 하고 다니는데 어디 영화 볼 돈이 있습니꺼. 시골에 전기가 안 들어오니 발전기를 돌려서 영사기를 돌립니더.”

“서부극장 처럼 영화 다 끝나가면 들라 주겠네. 그래도 끝투머리라도 볼 수 있으니 영화제목과 줄거리는 대충 알것네.”하고 선생님께서 평소와 달리 아주 부드럽게 긴장을 풀어주면서 이야기하신다.


이제 현규집 앞에 까지 함께 걸어왔다. 선생님은 마치고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신다. 한 이십 분이나 지난 것 같은데 집안에서 현규가 선생님을 모시고 나온다. 이제는 선생님을 모시고 가파른 차도를 걸어서 올라가기 시작한다. 너무 높은데 있어 선생님한테 미안하여 눈치를 살핀다.

“선생님, 아직도 한참 가야 하는데 힘들게 해서 미안해서 죽겠습니더. 참 안 오시는 게 맞는데 말입니더.”

“괜찮다. 어서 앞장서서 걸어라. 오랜만에 운동도 되고 공기도 좋고, 저 구덕산을 가까이서 보니 기분도 상쾌하다.”

“너는 밥은 누가 해주고 빨래는 누가 해주노. 시골 출신들은 다 비슷하지, 자취를 많이 하더구만.”

“누나가 와서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갑니더. 잠은 동대신동에 있는 종고모님 집에서 자고 왔다 갔다 합니더.”하고 그는 말한다.

한참을 올라가다가 그가 앞으로 못 나가고 주춤거린다. 선생님이 눈치를 채고 빨리 가자고 재촉한다.


“다 왔는 것 같은데, 어디고? 빨리 가자 망설이지 말고, 바로 여기 같은데 어디고 어서 말해라.”

“선생님, 참 말씀드리기가 그렇네 예. 다 왔다 생각하시고 이야기할 사람도 없고 하니 이제 내려 가시지 예.”

“앞장서라. 어느 집이고. 대충 알겠는데, 부끄러울 것도 없다. 사람 사는 게 다 천차만별 아니가.”

“선생님, 여기입니더. 참 보기가 그렇지 예. 저도 친구들도 부르기도 그렇고 지나가는 아는 급우들이 있으면 얼른 숨고 합니더.”하고 그는 난감한 듯이 말한다. 그가 사는 집은 오래된 슬레이트 집에 큰 방 두 개는 주인이 살고 귀퉁이 한 칸은 그가 사는 방이다. 흙으로 지은 집으로 전형적인 시골집과 같은데 단 하나 지붕은 슬레이트인 게 다르다. 군데군데 비에 침식되어 흙벽에 엉킨 볏짚과 대나무살이 드러나 영 보기가 안 좋다. 아궁이는 연탄을 때고 화장실은 좀 떨어진 공동변소를 이용해야 한다. 수돗물이 안 들어오니 저 아래 우물에서 날라와야 한다. 소재지는 도시지만 시골이나 다름없고, 단지 못 사는 사람이 함께 사니 서로에게는 부끄러움이 덜하다.


“아, 집이 옛날식이구나.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옛날에는 이런 집도 귀했고 아직도 움막집에 사는 사람도 안 있나. 방안에 한번 들어가 보자.”

“선생님 누추한데 어찌 들어가실라고 하십니꺼. 여기까지만 보시고 그만 내려가입시더. 저가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더.”

“니 마음은 알겠는데, 일단 방문을 열어보자. 방안에는 안 들어 가끄마, 알것제.”하고 선생님이 말하자. 그는 “예”하고 열쇠를 돌려 방문을 연다. 방안에는 옷장도 없고, 벽에 박은 못에 걸린 옷걸이에 옷가지가 몇 벌 걸려있고, 시렁에는 무슨 나무상자가 올려져 있는 상태이었다. 방 귀퉁이에는 낡은 목재 책상이 나무의자와 함께 하고, 책상 위에는 몇 가지 책이 꽂혀있고, 오래된 진공관 라디오 한대가 놓여있는 게 전부이었다.

“자, 고생했다. 참 어렵게 살아가고 있구나. 그래도 기죽지 않고 살아가니 다행이고, 이런 고생이 나중에 큰 힘이 될 것이니 부끄러워 말고 당당히 살아가야 한다.”

“예, 선생님. 여기까지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더. 중학교 3년 동안 가정방문 오신 분은 선생님이 처음 이십니더. 저가 안 오셔도 된다고 했지만서도요.”


이렇게 가정방문은 끝나고 불안과 부끄러움에 떨던 그의 마음도 겨우 진정되었다. 며칠 지나서 종례가 끝나고 집으로 갈려고 하는데, 선생님이 그를 보고 잠깐 남아 있으라고 한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궁금하였는데 선생님께서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하신다.

“내가 너의 학교 성적을 유심히 살펴보니 아주 위태위태한 상황이다. 운 좋으면 가겠지만 운에 맞길 수는 없지 않나. 네가 가능성이 없으면 그냥 놔두겠지만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아서 불렀다.”

“선생님, 저가 머리가 그렇게 좋지 못해 성적이 안오르네예. 시골 초등학교 때는 공부를 잘했는데, 날고 기는 우리 학교에서는 영 힘드네예.”

“당연하지. 대부분 애들은 좋은 참고서에다가 개인과외도 받고 학원에도 다니면서 실력을 기르는데, 너는 그렇지도 못하니 탓하지 마라.”

“그래서 네가 성적을 현재 상태에서 조금만 더 올리면 될 것 같고, 영어와 수학은 학교 수업 외 방과 후 보충학습이 필요한 과목이니 내 말을 잘 들어라.”


“내가 서대신동 학원에 강의를 나가는 거 알제. 그 학원에 말해 둘 테니 수강료 없이 계속 공부해 봐라. 수학도 잘 아는 선생님한테 부탁할 테니 그냥 듣고 말이제.”

“선생님, 고맙기도 한데 어찌 염치없이 그러겠습니꺼. 말씀은 고마운데 스스로 함 해보겠습니더.”

“또 고집 피우고 있네. 지금 학교 성적이 좋은 애들은 머리가 그렇게 좋아서 그런 게 아니고 과외수업을 받아서 그런 걸 왜 모르나. 내일부터 당장 영어. 수학 강의를 들어라, 알것제.”

“예, 선생님 그리 하겠습니더. 성적이 안 오르면 면목이 없어서 우짭니까. 최선을 다하여 수업도 듣고 학원강의도 듣고 해보겠습니더.”

“그래 진인사 대천명이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영어시간에 안 나오더나. 'Do your best'.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라고 안 들어 봤나.”하고 선생님은 영어로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셔서 그를 감동케 하였다.


그는 담임선생님이 나가는 학원에서 영어와 수학강의를 무료로 들었다. 그래서 선생님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더 열심히 하였다. 타고난 영재가 아니기에 성적은 일취월장은 하지 않고, 깻잎이 한 장 한 장 쌓이듯 조금씩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선생님의 관심과 배려에 의한 성과이며 스스로 잘하겠다는 노력도 함께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그는 그가 원하는 고등학교에 그야말로 깻잎 한 장의 차이로 간신히 합격했다. 그 은혜를 어찌 모르겠느냐마는 졸업식 때 선생님한테 찾아가서 먼저 인사하지는 못했지만, 굳게 손을 잡아주실 때 마음에 전류가 흐르듯 울컥하고 눈시울이 시큼해지는 것을 느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는 대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래도 부산에서는 이름이 있는 학교이기에 긍지를 갖고 다녔다. 사람은 지나 간 일을 잘 잊고 은혜를 망각하고 마는 것일까. 아니면 그 인연에 의한 해후가 예정조화설처럼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렇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 위대한 은혜를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대학교에 진학하여 어느 날 학교에 오전 수업이 끝난 후 점심을 먹고 올라가는 길에서 정말 반가운 조우를 한 분이 있었다. 그토록 자신에게 잘 해주고 학업지도를 하여, 원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도와주신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이었다. 가정방문을 오셔서 그가 어렵게 사는 환경을 보고 특별히 지도를 해주셨던 그야말로 은사인 셈이다. 거리가 좁혀져서 마주치는 지점까지 오자 그가 먼저 인사를 한다.


“선생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저 아시겠지예, 중학교 3학년 4반에 있던 인세입니다. 찾아뵙지 못해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 이게 누고. 여기서 만날 줄이야. 이 학교에 다니는 모양이제. 벌써 대학생이 되었구만. 세월이 참으로 빠르네.”

“예, 선생님. 선생님 덕분에 원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하여 이 대학교에 입학하고 이제 막 2학년입니다. 우리 학교에 볼일이 있으시던 모양이시지예.”

“그래, 만나서 반갑다. 교원연수가 있어서 사범대학에 들렀다 마치고 내려가는 길이다.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해야 안 되것나.”

“선생님, 시간이 나시면 식사라도 대접을 해드리고 싶은데 점심은 드셨습니까.”

“그래, 말이라도 고맙다. 벌써 먹고 이제 학교로 가봐야 하니 시간이 안 나네. 우짜던지 열심히 해서 고생하신 부모님께 보답해야것제. 나 이제 가볼란다.”


“선생님, 정말 아쉽네예. 다음에 기회 되면 꼭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요.”

“그래, 지금 보니 덩치도 크고 당당하게 잘 컸네. 열심히 해라, 간다이.”하고 선생님은 바삐 걸음을 재촉하며 내려가셨다. 교원연수를 받고 가시는 길이라 오늘 일정도 있고 해서 길가에서 오래 지체할 수 없었던 같았다. 이렇게 해서 그리운 선생님과의 조우는 이루 졌으나, 사정사정하여 커피 한잔이라도 대접해드려야 하는데 정말 잘못했다고 뉘우쳤다. 이렇게 해서 선생님과의 만남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버렸었다. 하늘도 무심한 것인가, 만날래도 만날수 없는 운명을 어찌할 수 있겠는가. 그 아름다운 심성만큼 더 살다가 가셨어야 하는데 오히려 짧게 생을 마감하였으니 말이다.


세월이 흘러 흘러 그는 다니던 직장을 퇴직하고 새로운 일을 하기 시작했다. 우연히 길가에서 그리운 친구를 만났는데, 그가 바로 중학교 때 가정방문의 대상이 된 현규였다.

“야, 현규야 니가 이렇게 노숙하게 변했구나. 그간 어찌 지냈는지 이야기 좀 해봐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영감 티가 나네.”

“야, 이 친구야 니도 많이 변했구만. 피부는 탱글탱글한데 머리 숲이 거의 벌초를 한 듯이 훤하네. 옛날 너보고 촌놈이라고 많이 놀렸제.”

“그랬지, 지금은 촌놈 소리가 추억 속의 노래처럼 아주 기분 좋게 들린다. 니는 손영감이라고 우리가 놀렸지. 그때도 점잖고 말이 별로 없었으니까 말이제.”

“하하, 촌놈이나 영감이나 지나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네. 촌놈이니까 촌놈이고 나는 어차피 늙어 영감이 되었으니 영감이고 말이다.”하고 서로 마음을 터놓고 그 시절의 추억을 되돌아보았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영화관을 들락거리고 했기에, 사회성은 있지만 돈 모으는 데는 소홀했을 것이라고 짐작이 되었다. 그렇지만 자신만만함과 상대방을 압도하는 굵직한 음성, 백발에 청바지를 입은 폼이 외국 영화배우 같기도 하였다.


“어이 친구야, 요새도 영화 많이 보나. 그 시절에 서부극장이나 영남극장을 너그 집처럼 들락거렸다 아니가. 저 멀리 영도까지도 가고 말이제.”

“니는 참 말 잘 지어내네. 영화를 보러 많이 다녔지만 영도까지는 잘 안 가고 남포극장이나 미화관, 국제극장, 동명극장, 동양극장 그리고 괴정에 있는 삼성극장에 많이 갔었지.”

“그 말은 니가 공부보다는 영화를 많이 좋아하니까, 그렇게 멀리까지 갔을 것이라고 추측해 본 기다.”

“참, 옛날 중학교 때 가정방문 오신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어찌 지내시는지 궁금하다. 내보고 서부극장 골목에서 보았다고 하면서 영화이야기도 하시던 분인데.”

“얼굴이 하도 잘 생겨 그 당시 최무룡인가 아란드롱인가를 닮았다고 이야기도 하곤 했제. 그 선생님도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집안에서 반대하여 교사의 길로 갔는지 모르제.”하고 현규가 말을 한다.

“근데 그 선생님이 간병변으로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고 하더라. 술을 좋아하셨나 보제.”

“아마 그럴 것 같아. 소문을 들으니 술을 좋아하셨고, 또 말 못 할 애환이 있었는지 모르제.”

“지금 나는 술도 좋아하고 애환도 많지마는 아직도 생생한데 좀 불공평하네. 무슨 말 못 할 사연이 있었을까?”하고 현규와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그 담임선생님이 영어시간에 한 번씩 영문소설을 읽어 주시고 하였셨제. 기억이 나는 게 알퐁스 도테의 ‘별이야기’와 ‘마지막 수업’이었제.”

“아이구, 친구야. 어찌 그리 기억력이 좋노. 나도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에 대해 기억난다. 우리들에게 꿈을 심어 주셨제.”

“또, 영어를 가르칠 때면 단어나 문법도 중요하지만 내용에 담은 깊은 뜻을 보라고 하셨지. 시험에 점수를 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성교육을 시켰다고 보아지데.”

“내가 나이가 들다 보니 그 선생님이 가르친 영문소설에서 많은 것을 느낀다. 특히 ‘마지막 수업’에 대해 알퐁스 도테의 소설을 읽어보니까 모국어에 대한 애정이 들어있데.”

“야, 친구야. 지금까지도 그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니 놀랍다. 그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인성과 애국심을 가르쳤다고 보여지더라.”하고 현규와의 대화는 계속된다.

“하하, 나는 그때 ‘Mother Tounge’에 대해 웃던 기억이 생생하네. 누가 어머니의 혓바닥이네요 했다가 야단맞았제. 그건 모국어라는 숭고한 명사인데 말이야.”


“아마 그 선생님도 어릴 적에는 일제의 한글말살 정책으로 모국어를 잘못 배운 것 같기도 하더라. 발음이 좀 이상 하더라구. 영어를 하셔서 그런지.”

“나중에 어느 선배한테 들었는데 이산가족이라는 말이 있더라. 삼팔선이 긋길때는 남쪽이었는데 휴전선이 그어지니까 북쪽이 되어버렸다등가. 아마 황해도 해주인가 장산곶인가 하던데.”

“아, 그랬구나. 그래서 좀 쓸쓸해 보이고 술도 많이 자셨던 모양이네. 실향민의 마음이 어떻겠노. 내가 국제시장 근방에서 놀다 보니 그분들의 마음을 잘 안다.”하고 현규가 무릎을 탁 치며 말한다.


그 선생님은 황해도 해주출신으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중 6.25가 발발하였고 부산으로 피난을 왔는데 북쪽의 가족과는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그 선생님에게도 은사가 되시는 분이 있었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 일제가 이미 국어를 못 가르치게 하였기에 그 은사는 잘못하다가는 민족정신이 사라질 것 같아 안타까워하였다. 그래서 중학교 때 일본어를 가르치면서도 조용히 학생들에게 모국어를 은연중에 가르쳤다가 잡혀가서 벌을 받았다. 그 선생님은 그에게 모국어는 부모로부터 까먹지 말고 듣고 배우고 대학교에 가서는 영어를 전공하라고 하였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그 영문소설 속에서 외국의 독립정신을 배우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라는 깊은 뜻이 있었다.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테의 ‘마지막 수업’은 프로이센에 점령된 알사스 로렌지방이 프랑스어를 버리고 독일어를 교육한다는 방침에 따라, 어느 선생님이 ‘오늘은 모국어로 하는 마지막 수업’이니 잘 들어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평소 소홀했던 학생들이 진지하게 마지막 모국어 수업을 잘 듣는 부분에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었다. 다시 현규와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인세야, 니가 그 담임선생님한테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왜 그럴까. 아마 비슷한 처지를 경험하였기 때문일 것 같기도 한데. 그러고 보니 이름도 좀 비슷하네.”

“내가 생각할 적에는 아마 이산가족으로 부산에서 갈 곳이 없어 나처럼 산복도로 판잣집에서 생활하였다고 느껴지데.”

“하, 너의 상상력이 대단하네. 전쟁통에는 피난민으로 와서 옳게 살만한 곳이 있겠더나. 우리 서대신동 뒷산에도 판자나 가마니로 움막을 만들어 살았다는 것을 이야기로 들었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겠네.”

“아마 내보고 이왕 영화를 볼려면 외국 영화를 봐라고 한게 나에게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보네. 그래서 내가 외국영화 매니어 아니가.”

“하하, 맞다. 그때 가정방문 하면서 니보고 서부극장 앞에서 많이 보이데 하던 말이 떠오르네. 서부극장이 2본 동시 상영 삼류극장이지만 오래된 서부영화를 많이 틀어주데.”

“그래서 니가 서부영화배우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다 아는 모양이다. 존웨인, 버트랑카스타는 말할 것도 없고 릿반 클리프도 알고 말이야.”

“니는 어네스트 보그나인을 좋아하데. 앞 이빨 사이가 벌어져서 음흉하게 웃는 모습이 너를 좀 닮은 것도 같고 말이제.”


“현규 니가 영화배우나 감독이 되었으면 성공했을 것 같은데. 인상도 그렇고 목소리도 묵직하고 말이제.”

“하하, 니가 나를 바로 알아보아 주네. 그래서 친구라고 하지 않나. 내가 영화 ‘친구’나 ‘국제시장’을 만드는데 영향을 끼쳤다는 것 알고있나.”

“내 후배가 영화 시나리오 작가인데 나한테 친구나 국제시장에 대해 술을 사면서 많이 배우고 갔제.”

“오우, 대단하다. 우리가 조금만 젊었으면 우리들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하여 몇 편의 영화도 만들수 있을 텐데 말이야.”

“니가 글을 좀 쓰는 것 같으니까 앞으로 내하고 하는 이야기를 소재로 한번 시나리오나 만들어 봐라.”하고 오랜 시간 동안 현규와 서부극장과 국제시장 쪽의 술집을 옮겨가며 그 시절의 추억을 나누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다시 세월이 흘러서 그는 칠순을 바라보는 노년기에 접어들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천진난만하고 옛날 추억을 더듬는 걸 좋아했다. 어느 날 고등학교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수학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나는 형편이 어려워 가지를 못했다. 그때 안 간 친구들이 한 스무 명 정도 되었던 것 같던데.”하고 명호가 말한다.

“그 경비가 만만찮은 데 간다는 게 어불성설이었제. 나는 고등학교 때는 못 가고 중학교 때는 운 좋게 돈 안 내고 다녀왔다 아니가.”

“무슨 공짜로 수학여행을 다 갔다오노. 어디로 갔는데 그리 멀리는 안갔겠제.”

“맞아, 중학교 3학년 때이니까 통영으로 해서 한산도를 당일치기로 다녀왔제.수학여행이라기 보다는 장거리 소풍이라는 게 맞을 수도 있겠제.”

“그때 돈도 안내고 갔다면서 누가 보태 주더나. 아니면 학교에서 해주더나.”

“모르긴 해도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 한 학생이라도 빠지면 상처받는다고 선생님이 돈을 내었던 게 아닌가 추측해 보는데 사실인지는 잘 모르것네.”

“그 선생님 참말로 훌륭하시네. 진짜 스승의 길을 가시고 인정도 많으신 것 같은데, 선생님도 어렵게 공부하신 모양인 것 같다.”

“니말 들어보니 우리 고등학교 2학년 담임하시던 국어선생님이 떠오르네. 그 선생님도 못사는 학생들 집을 골라 가정방문도 하여 걱정도 해주신 훌륭한 분인데.”


“사랑을 베푸신 점에서는 너의 중학교 담임선생님과 많이 닮으신 것 같네. 그게 스승의 길이고 우리가 은사(恩師)라고 불러야할 분들이 아니겠나.”하고 명호는 진지하게 말을 한다.

“그래 말이야. 내가 오죽하면 선생님이라는 말만 나오면 그 담임선생님이 생각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겠나. 그래서 나는 교사가 될까도 생각했는데 그 길로 못 갔었지.”

“요새는 교사들이 참 힘든 모양이더라. 학생들이 말을 잘 안 듣고, 체벌을 가하면 학부모들이 달려와 난리를 치고 해서 스트레스를 이만저만 받는 게 아닌 것 같더라.”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별나서 선생님한테 많이 맞았는데 조금도 원망 안 한다. 그렇게 길을 들이지 않았다면 버릇도 없고 거칠어져서 바른 사람이 못되었겠지. 지금 내가 올바르다는 뜻은 아니고.”


그가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한테 귀를 쥐어당기고 무거운 책상을 들게 하였던 육체적인 체벌은 거친 말을 길들이는 과정과 같았다. 중학교 때 담임선생이 그에게 포근한 정을 주고 진로에 대해 관심을 가져준 것은 감사의 마음을 갖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담임선생님에 대한 평가와 추억이 담긴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고, 그들도 담임선생님들이 오래전에 그랬던 것처럼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지난날을 추상하며 그 선생님들을 그리워하고 자신들도 그분들이 갔던 아름다운 인생행로를 찾아가기로 마음속에 다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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