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가계의 유전인자가 계승되는가?
유전인자
그 둘은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선대로부터 오랜 세월 살아왔지만 그의 대에서 가문의 명암이 엇갈렸다. 그 원인은 살아가는 길이 다르고 선대의 유지가 좌우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예부터 두 집 안은 농사를 짓고 살며 이웃들과도 잘 어울려 지냈다. 농경사회의 특성상 상부상조하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우고 즐거운 일이 있으면 함께 나누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공동체는 금이 가고 가문들은 서로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았을 때는 굳이 욕심을 부릴일도, 앞서 나갈 일도 없었는데 안타까운 시절이 당도하고 말았다. 어느 날 두 친구 간에 나눈 이야기이다.
“상진아, 너는 요새 무슨 일이 있는지 자주 바깥으로 나대데. 그렇다고 공부하는 것도 돈벌이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제. 너그 아버지는 농사짓는다고 바쁘신데 좀 거들지 않고 말이제.”
“만수야, 너는 지금 나라를 빼앗겼는데 울화통이 안 치밀어 오르나. 보아하니 너그 집은 지주집안인데 전답도 안 뺏기고 무사하데. 지금 우리 고을에 논밭을 일본 놈들에게 빼앗겨서 소작을 하는 집안이 부지기수가 아니더냐. 이런 날강도 같은 놈들 같으니라구.”하고 친구인 상진이와 만수는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 두 친구의 집안은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부농으로 시골에서 유지 반열에 있었다. 논도 몇십 마지기를 짓고 밭과 임야도 있어 머슴을 들이며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었고 할아버지들은 향교를 출입하며 한 번씩 한시도 지어 읊고 하는 사이었다. 그들의 할아버지가 돌아가고 본격적인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자 같은 지주로서 만수의 아버지는 일본인 지주들에게 붙어 소작료를 올리는데 동참하고 상진이의 아버지는 반대로 일본인 지주들의 횡포에 농민들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러니 한편은 친일파가 되었고 한쪽은 민중의 편이 되어 가문의 길은 반대로 가게 되었다. 만수의 아버지는 자신을 친일파로 부르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상진이 아버지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핀잔했다.
상진이 아버지는 가훈이 ‘충성보국’이라 선대에서 굳이 말을 안 했지만 그 뜻에 따라 세상을 살아갔다. 그는 나라를 빼앗기고 다시 자신들의 농토를 빼앗겨서 소작인으로 전락한 농민들의 편에 서서 일제에 투쟁하였다. 부당한 소작료에다가 비료세, 수리세 등의 부담으로 죽도록 일해도 식구들 입에 풀칠도 못하는 농민들을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읍내지서에 잡혀가서 구금을 당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불이익을 당하였지만 가훈에 따라 올바른 길로 가기로 흔들리는 마음을 채찍질하였다. 만수의 아버지는 자신은 친일파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일본인 지주들과 한편이 되어 농민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나갔다.
이윽고 광복이 되었으며 두 가문은 한쪽은 많이 기울었고 한쪽은 더욱 번창하였으니 기울고 번창한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상진이네 가문은 비록 기울었지만 동네에서 손가락질은 받지 않았고, 만수네 가문은 겉으로는 동네사람들이 웃어주지만 뒤돌아서서는 손가락질을 하였다. 어쩌던지 만수네 집의 전답을 부쳐 먹으려면 척을 두어서는 안 되기에 비굴함이라기보다는 먹고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래도 두집안의 큰 아들인 상진이와 만수는 친하게 지냈고 앞길을 의논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둘이서 만나 나눈 이야기이다.
“나는 우리 아버지가 이제 광복도 되었으니 경찰이 되어라고 하네. 왜 그런지 몰라도 일제 때 순사들이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이 부러웠던 모양이라서 그런가 보이데.”
“나도 아버지가 이왕 공무원이 되려면 경찰이 되어라고 하데. 일제 때 순사들에게 많이 시달렸으면 경찰이 지긋지긋하게 보였을 텐데 의외로 그러데. 아마 일본의 순사가 아닌 대한의 경찰이 되어 약한 사람을 보호해 주라는 뜻이 있는 것 같기도 하데.”
“상진아, 우리 둘이 경찰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공부를 열심히 해서 꼭 합격을 하자. 나는 일본경찰과 헌병들이 몰고 다니던 사이드카가 정말 타고 싶더라.”
“만수야, 나는 독립군을 잡으려 다니던 순사와 밀정은 정말 싫어하지만 뇌물을 주고받고 하는 자들을 잡는 형사가 되고 싶더라. 독립군 대신 범죄자를 잡는 대한의 경찰로 말이야.”하고 둘이는 경찰로 간다는 목표를 정하여 열심히 공부하였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그 둘은 결혼도 하고 경찰 중간간부가 되었다. 상진이는 본래의 희망대로 형사반장이 되어 밀수 단속을 하게 되고, 만수는 시경 교통계장으로 재직하게 된다. 둘 다 같은 계급이지만 업무의 강도는 상진이가 더하고 만수는 순경시절부터 교통경찰업무가 주특기가 되어 기동대도 거쳐 갔다.
상진이는 형사의 특성상 사복차림으로 활동하고 신분을 노출하지 않으며 주야간 가리지 않고 범죄가 있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어쩌면 자기 아버지가 바라던 대로 일제의 밀정을 처단하는 것은 아니지만 또 다른 범죄의 연결고리를 찾으니 기득권층으로부터 미움을 받기도 한다. 그가 형사반장으로 재직하면서 느꼈던 것은 절도나 상해치상과 같은 생계형 범죄보다는 밀수 등으로 큰돈을 버는 배후에서 조종하는 기득권층이 더 미웠다. 한 번씩 상사로부터 한번 눈감아 주라는 청탁이 들어왔지만 그는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여 한직으로 발령받기도 하였었다. 어느 날 친구인 만수가 그에게 한 말이다.
“상진아, 너는 우찌 그리 고지식하노. 윗사람이 부탁을 하면 ‘예’하고 들어주면 승진도 하고 보직도 좋은데 받을 텐데 답답하다야. 내가 교통과장에게 부탁하여 교통계로 발령 낼라고 생각 중인데 어떻노. 너도 애들 공부도 시키고 집도 마련하고 돈도 좀 만져야 하지 않겠나.”
“어허, 이 친구가 나를 타락시킬 일이 있나. 나는 적성상 형사가 맞지 뒷돈이나 받는 교통계는 싫다. 없으면 굶고 애들도 지 머리대로 공부하여 지 갈길을 안 가겠나. 그 넘의 학원비를 생각하면 경찰들도 도둑질을 안 할 수도 없겠더라만.”
“야이, 친구야. 말 좀 좀 다듬어서 해라. 교통경찰이 뒷돈을 받는다고 도둑놈이라는 말은 좀 심한 게 아닌가. 국가에서도 경찰이 박봉이니까 알아서 챙기라고 눈감아 주는 깊은 뜻을 왜 모른단 말이고. 하여튼 샌님 같은 경찰관이야.”하고 둘이는 서로를 위한다는 게 한 번씩 자존심을 긁어 기분이 상하기도 하였다.
만수는 상진이가 경제적으로 어려우니 좀 요령껏 살아가라고 충고하고 교통계로 자리도 알아본다는 게 우정은 맞기는 하다. 상진이가 경찰에 투신한 것은 자기 아버지가 친일파들에게 당해 눈물짓는 모습이 떠올라 지금도 살아있는 친일파 같은 기득권층을 응징해야겠다는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남들이 갖기를 원하는 돈과 권력보다는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는 게 자식의 도리라고 여겼다. 비록 아내가 생활비가 어려워 말은 못 하고 한숨을 내쉬는 것도 다 알고 있고, 남들처럼 애들을 고가 과외도 시키고 싶지만 부패한 경찰관이 되고 싶지가 않았었다. 친구인 만수는 자기 아버지를 닮았는지 상관의 비위도 잘 맞추고 상납도 잘하는 모양이었다. 그 추운 겨울에 기동대 사이드카를 타고 교통위반 차량을 잡아 오뎅값이라는 명목으로 받는 뒷돈은 상사와 공유하여야 하는 불문율이 있는 모양이다. 만수가 교통계장이 된 이후에는 눈에 띄게 사는 형편이 좋아 보였다. 물론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도 있었지만 그것은 시골의 전답이고, 지금 그는 부산서도 부촌인 대신동의 단독주택에 살고 있지 아니한가. 상진이는 아직도 보수동 산복도로 위에 방 두 개 달린 집은 있었지만 좀 부끄러운 실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도 울적하여 대학교에서 알게 된 고등학교 역사선생으로 있는 현수를 만나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야, 현수 친구야. 내가 요새 직업에 대해 회의감이 많이 든다. 나는 형사반장이 나의 천직으로 보는데 남들은 좀 비웃는 것 같아 좀 서글프다. 자네가 교사이고 학생들에게 올바른 길로 가라고 가르치는데, 보람을 느끼고 있제. 교사나 형사나 박봉이라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일 테지만......”
“허허, 박반장. 교사나 형사나 똑같은 처지가 아니겠나. 나는 샌님처럼 분필을 잡고 진정성도 없이 공자님 같은 말만 하니 학생들이 듣기는 좋겠지. 그런데 학교사회도 영어, 수학 선생 외에 나 같은 역사선생은 돈벌이하고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분필가루 씻어낸다는 핑계로 돼지고기에다 소주까지 자주 마셔야 하니 집에 옳게 갖다 줄 수가 있겠는가.”
“현수 자네 말을 들어보니 조금은 위안이 되네. 그렇게 사는 게 맞고 공무원이라는 신분이 또 다른 마패와 같은 것이 아니겠나. 지금 여기 산복도로 위에는 부두에서 막노동하면서 셋방살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노. 그래도 우리들은 선생님이며 반장님이며 존대를 받고 있지가 않나.”하고 오랜만에 상진이와 현수는 소주를 한잔 걸치면서 가슴속에 쌓인 응어리를 서로 풀어주었다.
상진이와 현수는 의기가 투합한 건지 만나면 이야기가 잘 통한다. 둘이서 술잔을 기울이면서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이야기하며 응어리진 속을 풀기도 한다. 상진이는 그날도 현수와 중앙동 40계단 밑 단골술집에서 한잔을 하였다.
“친구야, 나는 우찌 된 긴지 아직도 일제시대에 사는 것처럼 보인다. 경찰이 아닌 순사 같은 동료들이며 욕심 많은 상관들이며, 권력에 빌붙으려고 간과 쓸개를 빼놓고 달겨드는 부자들의 짓거리들이 그때 그 모습 그대로란 말이네.”하고 상진이는 물고 입던 담배가 필터까지 타들어가자 손끝이 뜨거운지 바닥에다 던져 아작아작 밟아버리고, 담뱃갑에 한 개비도 남아있지 않자 손안에 집어넣어 으적으적 구겨버린다. 아마 울분을 참지 못해 술을 자주 마시고 담배도 피우면서 해소하려는데 잘 안 되는 모양이다. 그게 스스로 만든 불만인지라 누구에게도 드러내놓고 하소연할 데도 없는데 오직 현수에게만 예외이다. 어느 날 고향 친구인 만수가 만나서 조용히 타이른다.
“상진아, 내가 전번에 말한 대로 교통계로 올 생각이 없나. 고생하면서도 승진도 잘 안되고 그렇다고 보상도 없는 그 자리를 왜 그리 붙들고 있노. 나는 지금 교통사고처리반장인데 버스회사 사장들이 자리 한번 하자고 난리다. 노선버스가 신호도 자주 위반하고 접촉사고는 다반사고 인명사고도 많이 나기에 나한테 보험을 들려고 하나 보네.”하고 만수는 다리를 꼬아 앉아 손바닥을 탁자에 탁탁 치며 은근이 으시대며 말한다. 그 장면이 상진이 눈에는 일제시대 순사로 보이는 게 맞는 듯하여 광복은 했지만 여전히 일제시대 그대로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같은 경찰인 그는 무엇인가 정체성에 혼란이 오고 만다. 그렇게 기다렸던 광복을 맞았지만 별반 다르지 않은 사회현상에 환멸을 느끼고 있지만 해결책은 없었다. 오직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고 그것이 현명한 적응이라고 말하지만 그에게는 변절일 뿐이었다. 그는 왜 그렇게 남들이 가고 싶어 안달을 하는 교통계로 가지 않는 것인가. 아직도 배고픈 것이 어떤지를 모르고 가족들이 바라는 부유를 모르고 있다는 것인가. 그는 아마 성격상의 장애이던지 선대로부터 이어진 반골기질의 유전인지 알 수가 없다.
상진이는 지금 형사반장으로, 제보되는 정보를 토대로 수사를 하여 그 부패의 진원지를 쫓아가고 있다. 각종 밀수는 기본이고 공무원과 업자와의 결탁은 좀 껄끄럽지만 자기의 임무에는 명시되어 있다. 그는 크고 작은 밀수범을 검거하였지만 하수인들만 그물에 걸려들었고 꼭대기는 얼굴을 숨기고 교묘히 법망을 빠져나갔다. 그가 아무리 윗선을 파헤쳐보려 하지만 좀처럼 드러나지 않고 설령 드러났다 하더라도 어찌 된 영문인지 흐지부지되기가 일쑤였다.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연하지만 위험한 작업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그는 큰 사건은 경찰 내부적으로 심판대에 올릴 수 없다는 한계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머리를 써서 짜낸 것이 언론에 제보를 공유하는 방법이었으니 신의 한수이기도 자신의 목을 찌르는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는 그 길을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의 친구인 현수는 자기와 친한 신문기자가 있다고 귀띔을 해주어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만수가 자기한테 말한 교통계와 운수업자와의 만남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도 주변에서 이미 알고 있었지만 교통계에 보험을 든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지는 몰랐다. 그렇다고 친구의 뒤를 파헤쳐 비리를 캐어내고 싶지는 않았고 그냥 그런 정도로 알고만 있기로 하였다. 그는 오랜만에 현수를 중앙동 단골집에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야, 상진아. 오랜만에 만나네. 그 굳건한 사명감을 저버리지 않고 잘하고 있겠제. 내가 요새 일제시대의 변절한 지식인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는데, 멀쩡한 사람이 갑자기 유턴을 해버리데. 무슨 치명적인 잘못이 있었던지 회유와 협박을 못 견뎠던지 그중 하나일 것이라고 여겨지데.”하고 현수가 슬며시 상진이의 마음을 떠보면서 변절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게 아닌가. 서로는 하늘이 무너져도 일편단심 민들레가 되기로 맹세하였고 그들의 품성도 그렇게 강직하였던 게 맞다. 현수가 혹시 상진이가 같은 경찰 친구인 만수의 회유인지 배려인지 하는 제안에 넘어가지 않았나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수가 없고 일제 때의 변절지식인을 빗대어 의문을 풀려고 한 것도 사실이다. 누구보다도 상진이를 존중하고 신뢰하기에 자신의 분신을 보는 듯하여 대학시절에 가까워진 게 아니던가. 현수는 혹시나 그의 올곧은 성격으로 상진이가 좌천이나 당한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없잖아 있었다.
“허허, 현수 친구가 갑자기 별시런 말을 하네 그려. 나는 지금도 친일파라고 하면 이를 갈고 있다네. 우리 아버지가 그럼의 일본지주와 친일지주들하고 싸우다가 읍내 지서에 갇히고, 재산을 일부 몰수 당하고 한 사실을 자네는 알고는 있는가. 지금 나는 안 그래도 아직도 살아있는 친일파와 그런 비슷한 길을 가는 권력층들의 비리를 파헤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가. 전번에 자네가 소개해 준 권모 기자를 한번 만나서 이야기할 기회가 곧 올 것이네.”하고 상진이는 오히려 자기를 비꼬는데 대한 불쾌감보다는 판소리에 장구로 얼시구 하며 장단 맞추듯이 오히려 반색을 하니 현수는 안도하였다. 현수가 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면서 일제시대의 지식인에 대한 변절에 대해 많은 궁금증이 있었던 모양이다. 학문의 열정을 예열시켜 주는 것은 호기심과 분노가 한몫을 한다. 현수는 학생들에게 국사를 가르치면서 교과서에 없는 야사도 끄집어내어 강의를 하니 재미가 있어 한 명도 조는 학생이 없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비록 대학진학에는 중요한 과목은 아니지만 학생들은 고구려의 기상과 고려의 대몽항쟁은 물론이요 임진왜란시의 신립장군의 탄금대전투를 강의하니 졸음이 올 틈이 없었다. 그러니 현수는 교단에서 민족주의를 가르치고 상진이는 현장에서 토착왜구 같은 친일파들의 비리를 파헤쳐 나가는 것이다.
상진이는 요새 마음의 갈등이 심하여 말을 잘하지 않는 일시적인 실어증에 걸려있다. 분명히 첩보에 들어온 비리가 포착되었는데 다른 형사반장은 슬슬 피하는 게 많이 수상하여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강렬한 집착이 들었다. 흘러가는 소문에 의하면 교통계와 운수업자 간의 커넥션이라는 것이었으니 자신이 피해야 할지 정의롭게 개입해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비리를 파헤치면 분명 친구인 만수가 다칠게 뻔하고 그 윗선에 대한 조사까지 이어지면 경찰에 대한 불신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현수가 정신적으로 도움을 주었지만 그것도 모자라 한 번씩 성당에 나가 하느님께 물어보곤 하였다. 그런데 답을 주는지 마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어 답답한 심정이다.
그는 주말에 고향 선산에 올라가 부모님 산소에 성묘를 하였고, 그 자리에 오래 머무르면서 빈 하늘에 간간히 흘러가는 흰구름을 보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 가는 서쪽 하늘에 양떼구름이 백의를 걸친 수많은 백성들이 손에 태극기를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물으려 왔지만 말소리는 들을 수가 없는 대신 하늘에 흘러가는 흰구름이 그의 물음에 대답을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결심을 하였다. 사사로운 정보다는 대의에 따라야 한다고, 또 그 연약한 서민들에게 억울한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는 산소를 내려오면서 서늘한 가을바람이 그의 얼굴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 어머니의 손길 같았고, 따닥따닥 대나무가 부딪히는 소리는 강직한 아버지의 경책처럼 들려왔던 것이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정보다는 뜻에 따르기로 맹세하였다.
그가 지금 추적하고 있는 비리인 교통계와 운수업자 간의 밀착은 선량한 시민들의 피해로 귀결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 욕심이 덕지덕지한 업자가 무엇이 아쉬워 교통계에 보험을 들려고 하겠는가를 생각해 보니 그냥 방관만 할 수 없었다. 일단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인명사고가 났을 경우에 유리하게 운수업자의 편에 서서 현장보고서를 작성해 준다는 것이고, 그 대가로는 건별로 상응한 사례를 하다는 것이 첫 번째이었다. 두 번째로는 일종의 주고받고 하는 식의 컨넥션이었다. 그 두 번째는 정확한 첩보가 아니라면 무고로 책임을 져야 할 수 있기에 신중히 접근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당분간은 일체의 외부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수사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잘못하여 술김에 누설할 수도 있고 그런 낌새를 알아차린 교통계에서 압력이 들어올 수 있으니까 말이다. 상진이는 독립투사가 오히려 자기를 쫒는 밀정을 추적하여 처단하듯이 은밀히 진행하였다.
먼저 들어온 첩보인 운수업자와의 보험관계는 사실로 밝혀졌고, 이미 다른 지역에서도 관행화되어 있기에 크게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가 친구인 만수에게 작은 잽을 날린 셈이었고, 그 이후로 친구관계는 어쩔 수 없이 소원해졌다. 오히려 상진이가 만수 대신에 불이익을 받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은 공식적으로는 포상을 받았지만 경찰사회에서는 고자질을 한 것으로 여겨져 동료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그는 자기로 인하여 사회가 좀 맑아졌고 억울한 시민들의 입장을 대변하게 되어 그 핍박을 견딜 수가 있었다. 지금 상진이와 만수는 일제시대에 서로 반목하고 다른 길로 간 양가 아버지들과 비슷한 입장이 되었다. 이제는 만수하고는 이야기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이가 틀어졌다. 그러니 상진이는 외롭기도 안타깝기도 한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을 수 있는 현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수 친구야. 내가 요즈음 직장에서 역적이 되어버렸다네. 심하게 말하면 동료들의 밥줄을 끊는 이기주의자라고도 하고 말이야. 나는 그래도 내가 고집하는 바람에 교통사고에서 서민들의 억울함이 많이 개선되었다는데 위안을 삼네. 나도 우리 아버지처럼 반골기질이 있는 모양이네. 흐흐.”하고 상진이는 무슨 죄를 지은 듯이 말은 하지만 겉으로는 빙긋이 웃으면서 말한다. 아마 자기 아버지처럼 잘못된 것을 보고 못 넘어간다는 부전자전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어찌 생각하면 박봉에 시달리는 교통경찰들에게는 점수가 깎이는 짓이 맞고, 보이지 않는 다수의 시민들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박수소리는 귀로 들을 수가 없기도 하다. 그는 틀림없이 자기 아버지의 기질을 유전받은 게 확실한 것 같다.
“허허, 상진이가 세상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네 그려. 내가 보아도 교통경찰들이 고생은 많이 하더라. 그런 뒷돈을 못 받으니 형편이 좀 어려워지겠지. 항상 들어오던 돈이 끊기면 낭패감도 느낄 테니 자네를 좀 원망도 안 하겠나. 그러니 정부예산도 어렵겠지만 공무원 봉급도 좀 올려주고 해야 하는데 알아서 해 먹어라 식이니 우리 같은 선생들은 무슨 수로 살아가노.”하고 현수가 한편으로는 상진이가 안되었지만 사회가 바른길로 들어서는데 대해서는 자랑스러웠다.
그간 공무원 사회에서 청렴운동을 얼마나 많이도 하였던가. 정부가 예산이 부족하다 보니 그런 부패가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지만 욕심 많은 친일파 같은 부유층들이 문제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법을 지키는 대부분의 시민들은 근근이 살아가지만 호화저택에다가 고급차에다가 골프채를 싣고 다니는 기득권층은 그 달콤한 밀거래를 포기할 수가 있겠는가.
이제 상진이는 두 번째의 비리에 대한 첩보로 은밀히 수사를 진행하였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머리에다 담아두고 일반적인 것은 신뢰하는 후배에게 맡겼다. 그 제보는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연기처럼 정체가 없이 잘 빠져나갔다. 그럴수록 중요한 것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놓지 않는다는 금언을 되새기며 침착하게 대응해 나갔다. 먼저 그가 의문이 드는 사항이 있었는데 그것은 신규 노선버스의 신설과 기존 노선의 증설이었다. 그것은 시청의 교통행정과와 시경의 교통과가 함께 협의하여 선정하는 것이다. 시경 교통과에서 교통량의 분석과 향후를 예측하여 건의하면 타당성검토를 거쳐 승인하는 구조이다. 아무래도 결정권은 시청이 있다고 하더라도 영향력은 시경에서 행사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그는 그 많은 버스가 운행할 때에 필요한 연료는 시점과 종점이기도 한 장소에서 주유를 한다는 것을 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교통법상으로는 운수업자가 주유소를 함께 운영할 수 없도록 되어있기에 편법이 발생할 수가 있는 것이다. 노선버스의 신증설은 운수업자에게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부산은 제2의 도시로서 인구가 팽창하고 시외곽의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니까 거의 모두가 황금노선인 셈이다.
그렇지만 노선 결정권에 대해서는 비리여부를 파악하기 힘들고 관청의 고유권한이기에 손을 함부로 댈 수가 없는 것이다. 분명히 인허가에 대한 이권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지만 무모하게 달겨들수도 그냥 넘겨버릴 수도 없는 사안이었다. 떠도는 풍문에 의하면 고위 경찰관들이 신규 버스노선 인허가가 확실시되는 시점과 종점에 미리 주유소를 차린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뇌물 중에서도 부도덕함은 물론이요 시장질서를 어지럽히는 범죄행위가 맞는 것이다. 아마 수많은 버스노선이 뒤에서 짬짜미 하면서 그냥 앉아서 돈을 벌게 만들어주니 버스회사와 주유소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관계가 맞다. 그런 것을 그냥 눈뜨고 보지 못하는 상진이는 마음은 급하지만 눈치를 못 채게 완벽하게 물증을 확보해 나갔다. 그것을 직접보고를 하면 지난번 교통사고 뒷거래 경우처럼 보나 마나 덮어버리고 자신은 바보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는 친구인 현수를 찾아갔다.
“현수 친구야. 내가 오늘 긴히 의논할 것이 있는데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야 한다. 전번에 말한 국제신문 권기자에게 내가 요약한 쪽지를 전해주면 좋겠다. 내가 직접 만나면 시경찰국 자체가 우습게 되니 그렇게는 못하겠고, 밀정 아닌 밀정으로 자네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후일 퇴직하고 나서 권기자를 꼭 만나볼 테니 그리 알거라.”하고 상진이는 아주 진지하면서도 떨리는 말로 손에 쥔 메모지를 현수에게 건넨다. 그는 밤새 잠을 못 잤는지 얼굴이 푸석푸석하고 졸리는 듯 한 눈빛이 안타깝게도 보이고 한편으로는 그 용기에 존경심도 들었다. 현수는 집으로 오는 버스 편에서 그 메모지를 살며시 열어보았다. 아주 간단하면서도 구체적인 정황을 적었고, 관련된 업자는 실명으로 되었지만 경찰관의 직급과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그 부동산 등기부등본을 떼어보고 소유자의 친인척을 조회하면 자동적으로 그 경찰관은 밝혀지게 마련이었다.
며칠 후 부산의 유력일간지인 국제신문에 사회면 톱기사가 “낯 뜨거운 운수회사와의 검은 거래”, 부제로는 “어느 경찰관이 차명으로 숨겨온 주유소”이었다. 그 소식은 전국으로 타전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지역방송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또 경찰국에서는 그것은 근거 없는 음해라고 하는 반박기사도 나왔다. 부산시경이 그 파급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또 은폐를 시도하는 모양이었다. 어느 관제언론을 이용하여 국제신문에 근거 없는 기사이니 정정보도를 요청하고 그렇지 않으면 언론중재위원회에 고소를 하겠다는 엄포도 있었다. 아마 경찰국에서는 근거가 없이 소문으로 그런 기사를 썼다고 추측하는 모양이었다. 다음날 권기자는 편집국장에게 불려 가서 대화를 나눈다.
“권부장! 내가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좀 물러서면 안 될까. 지금 경찰국은 물론이고 정치인들로부터 우리 신문사에 압력이 많이 들어오고 있네. 무슨 뚜렷한 근거도 없이 풍문으로 떠도는 이야기를 소설처럼 적었다고 난리가 났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하고 나이가 지긋이 든 편집국장이 연신 담배를 피워 물고 의자를 빙빙 돌리면서 안절부절이다.
권기자는 사회부에서 잔뼈가 굵어진 베테랑 기자이었고 한 번도 오보를 낸 적도 없는 오직 팩트에 근거하여 기사를 써온 합리적인 언론인이다. 권기자는 이런 압력이 있을 것이라고 당연히 예상하였고 그에 대한 대응책도 치밀히 마련해 두었다. 취재원인 친구인 현수를 보호해주어야 하므로 자신이 그 메모를 근거로 보완취재를 하여 또 다른 증인의 증언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당당하였다.
“국장님, 죄송하지만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이미 부산기자들은 다 알고 있고 이것을 막으면 일이 더 커집니다. 어차피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 커넥션이니까 모른 척 넘어가시지요. 정 어려우시다면 저가 추가적인 보도를 하지 않을 테니 우리 신문사의 사훈인 정론직필의 정신을 지켜주시면 합니다.”하고 권기자는 안절부절못하는 상사의 처지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비스듬히 서서 말을 한다. 한참 선배인 편집국장도 권기자의 기자정신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추가적인 보도를 하지 않는 선에서 끝냈다.
다음날 국제신문이 추가적인 보도가 없는 것을 보고 관제언론을 통하여 오히려 여론을 호도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지역이던지 관에 기생하여 사는 관제언론이 있기 마련인지라 그 언론까지 나무랄 수는 없었다. 문제는 이 사건이 흐지부지 얼렁뚱땅 넘어가버리면 안 되기에 권기자는 다른 신문사에 있는 강직한 후배기자에게 구체적인 2탄을 폭로하였다. 그 관제언론을 믿고 있던 경찰국은 난감하였으며 반박기사를 내면 낼수록 3탄, 4탄이 연속으로 터져 나오니 손을 들고 말았다. 그 사건으로 경찰국 교통과장과 계장 그리고 실무자가 스스로 옷을 벗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그 사건의 핵심내용은 부산에서 제일로 치는 황금노선인 대신동 구덕운동장에서 온천장을 거쳐 부산대학이 종점인 신규 버스노선 인허가와 시발점과 종점에 주유소를 설치하여 이익을 공유하는 커넥션이었다. 그것이 공정한 경쟁에 의한 것이었다면 문제가 없는데 운수업자와 경찰이 결탁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장이 컸던 것이다. 그것 이외에 2탄 3탄에도 다른 지역의 신설노선에 대한 취재까지 해놓았기 때문에 경찰국도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았다. 그것을 처음 제보를 한 사람은 형사반장인 박상진이이었고, 직접 전달한 제보자는 조현수이었으니 경찰국내에서도 박상진을 의심하지만 증거가 없어 괘씸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옷을 벗은 교통계장인 천만수는 그 제보자가 상진이 인 것을 알지만 옷을 벗은 마당에 보복을 할 생각이 없었다. 어찌 보면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었으니 울고 싶은데 빰을 때려 준 것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경찰에서 비위로 옷을 벗은 만수는 몇 년 후 슬며시 주유소의 바지 사장을 내보내고 당당히 제일주유소라는 간판을 갈아달고 본격적인 영업을 하였다. 말이 영업이지 그냥 주유소의 호스를 버스의 기름통 구멍에 꼽기만 되는 누워서 떡먹기인 사업을 하게 되었다. 사업은 번창하였고 매년 증차하는 버스들로 그 옆의 땅을 사서 주유소를 넓히기도 하였다. 들리는 소문에는 달성운수라는 회사의 실질적인 소유자가 만수라는 것도 드러났다. 만수는 시골에 있는 농지와 산지를 제외하고도 부산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부자가 되었다. 그는 공직을 통하여 부를 창출한 탁월한 재주를 가졌고, 그것은 자기 아버지의 수완을 어김없이 닮았기에 기질은 대를 이어 유전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세월이 많이 흐른 어느 날 정년 퇴직한 상진이와 현수가 중앙동 40계단 아래에 있는 단골술집에서 만났다. 그 둘은 무난하게 정년퇴직하였고 그간의 공적으로 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상진이는 경찰서장으로 민수는 교감으로 마지막 공직을 장식하며 퇴직하였기에 만족은 아니지만 무난한 마무리가 맞는 셈이다. 먼저 민수가 말을 끄집어낸다.
“이보게, 박경찰서장. 세월이 이다지도 빠르단 말인고. 그간 정의롭게 근무한다고 노고가 많으셨네. 자네는 틀림없는 선비기질을 가진 사람일세. 선대의 뜻을 따라 효도도 했고, 자식들에게는 올바른 길로 가도록 가르쳤으니 돈만 없다 뿐이지 아쉬울 게 더 있겠는가.”하고 현수가 친구인 상진이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띄워주는 말을 거침없이 한다.
“허허, 조교감은 어떻던가. 그 박봉에도 아들 딸 공부 다 시키고,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쳤으니 그 업적은 내 것과 어찌 비교할 수가 있겠는가. 거기에다가 내가 정의가 무엇인지 고민할 때 힘을 실어주었고, 그 무서운 폭로기사로 고민하던 나를 도와준, 뜻을 같이하는 동지가 아니겠는가.”하고 상진이도 예전의 버릇처럼 담배필터를 꾹꾹 씹으면서 친구의 면전으로 연기를 후후 불어 날린다. 연기는 무슨 축하공연을 하듯이 자태를 꼬면서 허공으로 흘러간다.
"상진이 친구야. 내가 요새 우리들의 이야기 속에서 발견한 새로운 사실이 있네 그려. 사람의 기질은 선대로부터 유전한다고 말일세. 자네는 선친의 기질을 빼어 닮았고, 나 역시 한학자이신 선친의 뜻을 따르고 있으니 말일세. 자네 집의 가훈이 충성보국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가훈의 뜻을 대를 이어 전승하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던가."하고 현수가 역시 역사선생답게 가훈의 뜻에서 친구의 성향을 찾았으며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하. 현수 친구가 정말로 역사교사답게 가훈을 잘 이해하여 나에게 대한 올바른 평가를 해주었네. 자네 집의 가훈은 백세청풍이라고 하던데 청렴하고 올바른 뜻을 따르고 있으니 잘 실천하고 있는 셈이지. 그런데 나나 자네나 마찬가지로 재물복은 좀 없는 것 같네. 술도 좋아하니 어디 돈을 모을 수가 있겠는가. 흐흐.”하고 상진이가 자신의 가훈을 잘 이해하고 있는 현수에게 그냥 있을 수가 없어 술을 한잔 더 따르면서 슬쩍 띄워준다.
“그런데 자네 친구인 만수인지 천수인지 하는 자의 가훈은 무엇인지가 궁금하네 그려. 돈과 권력을 밝히니 만전형통인지 금권제일인지 가훈이 있다면 그럴 것 같은데 말일세.”
“내가 보기에는 견리사의라는 좋은 글이 있는데 그것은 절대 그 집에 걸어서는 안 되고 견리즉취라고 붙이면 어떨까 하네. 이익을 보는 즉시 취하라고 말일세. 하하.”하고 민수가 얄미운 천만수를 비꼬듯이 천박한 가훈을 자작해 보인다.
“허허, 내가 알기로는 만수집의 가훈은 만복만당이라고 하는 걸로 아네. 복이 집에 만땅으로 넘치게 해 달고 말일세. 그 가훈대로 이루어졌으니 좀 신기하기도 하네.”
“그리고 자네 친구인 국제신문 권기자도 정론직필을 하던데 집의 가훈이 궁금하기도 하네. 아마 바른길로 가라는 뜻이 있는 가훈이 맞을 것 같은데 말일세.”
“권기자 그 친구는 조선시대에 사간원 정언으로 있던 선조가 직언을 하다가 유배를 가서 돌아가셨다고 들었네. 그 친구 집안은 불교를 믿기에 아마 팔정도 중에 어느 것을 따와서 가훈으로 정했지 않았을까 짐작해 보네.”
“그러면 팔정도에는 정론직필이 없으니 정도정행이라고 지었는지도 모르는데 다음번에 같이 만나서 한잔 하면서 물어보세나.”이렇게 하여 정년퇴직한 상진이와 현수가 만나서 지난날을 뒤돌아보고서 감회에 젖는다. 상진이에게 현수가 없었다면 정말 탐욕을 묵인하려는 어려운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또 현수는 상진이가 없었다면 박봉에 시달려 일탈하려던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서로를 격려하며 부조리한 세태와 타협하지 않고 무난히 자유의 품에 안착한 것이다.
그들은 집안의 내력에 따라 살아왔고 가훈의 뜻에 따라 올바른 길로 갔다고 여긴다. 또 상진이는 자기 아버지가 그토록 미워하던 친일파와 권력에 기생하는 소인배들을 응징하였으니 한을 풀어드린 셈이다. 진정한 행복은 돈과 권력이 아니라 바른 길로 가는 것이라는 것을 후일에 알아차렸으니 그들의 인생은 성공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분열된 공동체는 봉합하기 힘들게 되었지만 그래도 정의로운 사람들이 있어 사회는 건강을 되찾을 날이 올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사람마다 다른 유전인자가 있어 그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또 가훈의 뜻이 그들의 유전인자의 전승을 이끌었으며 그들의 운명이기도 한 길을 걸어가게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