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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섬섬옥수'인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집착, 질투는 어떻게 달래줘야 하는가

by 섬섬옥수


브런치 작가 등록을 한 이후 지인들이 물어왔다.
하고 많은 닉네임 중 왜 '섬섬옥수'인가요?



자주 만나는 친구들은 이 닉네임을 듣고 웃음부터 터뜨렸다. 섬섬옥수, 가녀리고도 가녀린 옥같은 손. 기실 내 손은 그러한 손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내 손의 유구한 별명은 '소시지 손'인데, 마디마디마다 살이 오동통하게 올라 여리여리함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그쳤어야 했는데 뼈는 누구를 닮아 이렇게 통뼈인지, 손가락 뼈마디가 툭 튀어나오는 바람에 영 볼품없는 손이다.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귓가에 소곤대던 지난 연인들마저 내 손은 소시지 손이라 했으니 말을 다 한 셈이다. 물론 그들은 소시지 손이 귀엽다며 좋아했지만.


반지를 맞추러 갈 때마다, 여성 호수 중에서는 꽤 도톰하고 굵은 호수를 주문하고는 했는데, 그게 못내 부끄러워 반지를 자주 사러가는 편이 아니었다. 다들 온라인으로 들어올 때는 두꺼우나 얇으나 가면 한 겹쯤은 쓰고 들어온다는데, '소시지 손'이 '섬섬옥수'가 되어 들어오는 정도가 무엇이 나쁘랴 싶었다. 대뜸 닉네임을 지어놓고, 셀셀 웃었다.


사람은 누구나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을 은연중에 구분 짓는다. 어찌 보면 가진 것에 대한 애착과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집착, 이 두 가지가 쌍두마차가 되어 우리 생을 끌고 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챙겨보던 웹툰이 있었다. 이제는 드라마와 영화로 더 잘 알려진, 『치즈 인 더 트랩』(이하, 치인트). 뭇 청소년에게 대학 생활에 대한 로망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현실의 어두운 부분을 고스란히 드러내 비추기도 한 작품. 치인트에는 속된 말로 '골 때리는' 역할들이 많이 나왔다.

전혀 선하다고 볼 수 없으나, 그렇다고 절대 악이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는 쉬이 답할 수 없는 역할들. 내 주변 어딘가에서 살아 숨 쉬고 있을 법한 인물들. 그중 한 명이 '손민수'다. 시종일관 주인공 홍설을 따라 하고 심지어는 홍설의 물건까지 손을 대던…. 작품이 유명해진 지금은 아예, 타인을 과하게 따라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일종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긴 시간 내 일상에 걸쳐있던 치인트의 연재 기간 내내 나는 손민수를 비난했다. 어쩌면 미워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깎아내리는 데엔 정당한 이유가 있었으니, 그녀가 등장하던 회차마다 빗발치던 캐릭터 비방성 댓글들도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갔다.

한편으론 두려워했던 것 같다. 연재 당시의 나는 대학생이었고 만화의 배경 역시 대학 캠퍼스였으므로. 누군가는 손민수처럼 나를 따라 하지 않을까. 홍설처럼 나도 곤란해지는 일이 발생하면 어떡하지?


돌이켜보면 웃음만 나는 기우다. 지금처럼 나를 세상 앞에 꺼내 놓고, 내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늘어놓을 수 있게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친했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이후로, 대학에 들어가서 한동안은 친구를 사귀는 데에 소극적이었으니.

총대를 매고 단체 활동을 이끌어나가는 성격도 아니요 그렇다고 과내 활동을 많이 했던 것도 아닌, 매일 어울리는 친구들과만 결을 같이하던 여대생 A를 모방할 이는 흔치 않은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내게는 손민수가 붙지 않았다는 안도감보단, 마음 한 구석을 갉아먹는 까끌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왜 나는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지? 내게 있는 건 모두가 갖고 있을 흔한 것들 뿐이라 그런가?

그래, 내게 손민수가 붙지 않자 나는 나 자신이 손민수가 되는 건 아닐까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검열하며 걸어왔다.






모방,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집착에 유독 예민한 십 대 시절부터 20대의 중반까지. 내 손으로 쥘 수 없던 것들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꾹꾹 누르며 살아왔다. 그러다 의외의 구석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시인의 「질투는 나의 힘」이 내겐 그런 경험을 선사했다. 천재적인 어휘 구사와 구절로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존경하는 시인도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로 손아귀 힘을 풀지 못하고 있던 나도,

꼬옥 쥔 빈 주먹을 남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등 뒤로 숨기고 있던 나도,

질투가 풍기는 악취가 내게서 나고 있지는 않나 관리 감찰하며 돌던 나도.

일제히 고개를 들고 시의 음절 하나하나를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글자를 먹는 벌레라도 된 것 마냥.


참 늦게도 깨달았다.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첫 발자국은, 나의 질투를 있는 마주 보고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다른 이들보다 이걸 조금 덜 가져서, 남들이 참 부러웠구나. 그래서 서러웠구나. 차가와진 내 손을 다른 손으로 맞잡아주고 입술을 다시금 연다.


"그래도 너는 다른 걸 한 줌 더 쥐고 있잖니? 그것도 꽤 괜찮은 거란다."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기 시작했다고 해서, 지금의 내가 질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개체가 된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욕심도 부러움도, 질투도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질투와 모방의 원인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고 그것이 당연한 일이며 정당하다고 외칠 생각도 없다. 여전히 손민수는 가서는 안 될 길을 갔고, 그릇된 행동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다만 눈곱만큼은 아쉬운 것이다. 누군가 손민수에게, 부러움과 질투가 잘못된 모방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벗어나는 방법을 한 번만 알려주었다면….

─ 그녀는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까?






얼마 전, 길거리를 걷다 유명 가발 브랜드의 오프라인 매점에 들어갔다.

지성 두피의 소유자고, 얇고 힘없는 모발이 내 머리칼의 특성이다 보니 내 머리는 거진 만년 단발이다. 꼭 긴 머리가 하고 싶을 땐, 포니테일 가발을 사 머리를 묶고 그 위로 집어 주곤 했다. 포니테일 가발은 묶은 머리만을 연출할 수 있기에, 묶지 않고 웨이브 진 긴 머리가 하고 싶어 몇 개의 통가발을 착용해 보았다.


꽤 오래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매점 직원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가볍게 발걸음을 돌렸다.

내 트레이드 마크는 역시 단발이야. 긴 머리도 예쁜 걸 알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아.


나는 오늘도, 한 번 더 나와 타협한다. 부러움을 달래주고 한 발자국을 내딛는다. 꽤 괜찮은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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