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이야기 / 에세이
영화는 종합예술이자, 세계 공통의 문화로써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분야이다.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언제든지 즐길 수 있는 영화는 이제 생활의 일부가 된 지 오래다. 지하철에서 핸드폰으로 영화를 보는 모습은 익숙해졌다. 영화관도 넓은 공간에서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변했다. 집에서 음식점의 메뉴처럼 원하는 장르의 영화를 골라서 볼 수 있는 세계적인 OTT 기업들이 이미 자리를 잡았다.
영화산업은 개인 문화가 발전하면서 더욱 번성할 것이다. 영화관에서 웅장하게 보는 분위기를 이제는 집에서도 대형 TV의 영상과 서라운드 시스템의 음향으로 편안하게 볼 수 있다. 가끔 친구나 지인들을 초대해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보는 재미는 익숙해져 있다. 원어로 듣는 젊은 층들이 늘어나는 추세는 고무적이다. 세계가 동시간에 같은 영화를 공유하면서 더욱 가까워지고 있다.
한국 영화는 전 세계에서 사랑받으며,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영화인들도 유럽 및 미국의 유명한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받는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지금 한국의 이야기가 되고 있다. IT 기반으로 한 영화 제작기술은 이제 선도적인 역할을 하며, 세계의 영화 시장을 석권할 날도 멀지 않았다. K-Movie의 시대가 오고 있다. 그야말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낀다.
영화에 관심을 가진 것은 중학교 들어서면서였다. 집이 서울 시내 중심가에 위치해서 주변에 많은 영화관이 있었다. 방학이 되면 20여 개에 이르는 개봉관에서 삼류 영화관까지 익숙해진 동선에 따라 움직이며 영화를 골라봤다. 새로 들어온 영화는 주로 개봉관에서 상영했지만, 비싸서 자주 가지는 못했다. 삼류 영화관은 입장료도 저렴했지만, 동시상영을 해서 오래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미성년자 관람 불가는 사복을 입고 구석에 앉아 몰래 볼 수 있었지만, 재수 없으면 계도(啓導)하러 다니는 교사에게 걸려 정학을 받을 수 있어 가급적 피했다. 그 당시 중국 무협 영화와 미국의 웅장하고, 화려한 영화들이 유행하였다. 간혹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가 있었지만, 관람객을 많이 받기 위해서 영화 검열을 피할 목적으로 내용을 삭제했다. 지금 보면 솔직히 아무것도 아닌 장면이었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장르가 다르겠지만, 주로 유럽 영화를 즐겨봤다.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1960), 암흑가의 두 사람(Deux hommes dans la ville.1973),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1990) 그리고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일부 촬영한 대부(The Godfather.1972) 등이 인상적이었다. 대부분 50년이 넘은 영화들이지만, 장면들이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특히, 알랭들롱의 애수에 찬 눈 연기는 일품이었다.
TV에서 매주 주말에 영화를 방영하는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었다. ‘주말의 명화’는 영화 엑소더스의 주제곡(Theme of Exodus)을 프로그램의 오프닝 곡으로 해서 약 30여 년간 방영되었다. 가족들이 오손도손 모여서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이후 비디오테이프와 재생 겸 녹화 장치인 VCR의 보급으로 집에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보면서 영화의 안방 시대를 열었다.
요즈음은 이 세상을 떠나거나 은퇴 후 은거(隱居) 생활을 하는 왕년의 영화 스타들을 볼 수 있는, 교육 방송(EBS)의 ‘세계의 명화’를 즐겨 본다. 오래전에 봤던 영화는 그 당시 기억을 소환하여, 그 영화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생각날 때가 있다. 누구와 어느 영화관에서 봤는지 생각하면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회상하며 푹 빠져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 되어 가고 있다.
오래된 영화의 비 내리는 스크린을 보는 것 같이 영화의 기억과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영화 제목,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처럼 그렇게. 그리고 또다시 새로운 영화와 주인공들이 그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처럼 혜성 같이 나타난다. 영화들을 보면서 감명(感銘)을 받았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