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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숲 일기(2)

한숲 이야기 / 에세이

by 김창수

4. 보름달

며칠 동안 새 아파트에 이삿짐을 풀고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났다. 창문으로 이미 어두운 그림자가 스멀스멀 기어들어 오고 있다. 아직도 입주하지 않은 집들로 아파트 창문의 불빛은 일정하지 않은 모양의 모자이크가 되어 있다. 하루에도 수많은 이삿짐 차가 들어오고 있지만, 미분양된 집 때문에 당분간 건물 전체가 불 들어오는 날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수십 년간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항상 있던 베란다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베란다를 나가야 볼 수 있었던 밤하늘도 이제는 앉아서 얼굴만 돌리면 가능해졌다. 밖으로 튀어나왔던 냉방장치들도 실외기실로 꼭꼭 숨어서 보이지 않는다. 가끔 새들이 창문으로 날아와 잠시 얼굴만 보이고 사라지거나 부딪치기도 하지만, 이런 시골 아파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정신없어 보지 못했던 아파트의 밤을 둘러본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풀냄새가 도시의 냄새에 익숙해져 있는 민감한 코를 자극한다. 주변의 수많은 불빛으로 흐려 보였던, 어머니의 품 같은 보름달이 유난히 밝아, 달나라 토끼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침대에 누워 낮 동안 긴장했던 몸을 풀면서, 자연의 숨소리를 들으며 가까워진 창가를 통해 보름달과 키스한다.


5. 첫 산책

늦여름 더위에 땀을 많이 흘려서인지 기운이 없다. 오늘 하루는 꼼짝도 안 하고 쉬려고 하는데, 아내는 아침부터 산책하러 나가자고 성화다. 창가 너머로 보이는 것은 아파트들과 주변의 농촌 풍경인데 어딜 가자는 건지 모르겠다. 사실 이사를 오고 나서부터 거대한 아파트 단지 주변이 궁금했다. 따가운 햇볕을 피하려고 창이 큰 모자를 쓰고, 시원한 물병을 들고 무조건 나왔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고도(孤島)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번 살던 아파트는 앞에 용인에서 가장 큰 산이 있었다, 아파트 옆문으로 나가면 바로 전철역이 있었고 앞문 앞에는 버스 역이 있어서 공기도 좋고, 교통도 편했다. 이곳에 입주하면서 버스노선도 없어, 전철역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다행히 건설사에서 제공하는 셔틀버스로 간신히 외부와 연결된다. 불편해진 아내는 당장에 차부터 사달라고 졸라대고 있다.


아파트 옆으로 산자락을 따라 나 있는 길을 걷는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동산처럼 보이는 곳으로 향한다. 약간 비탈진 곳에 작은 팻말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처인성((處仁城 )이라고 적혀있다. 차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를 건너면, 하천을 따라 양옆으로 논이 쭉 있다. 하천과 연결되는 산기슭에는 큰 저수지가 두 개 있다. 그곳에서 아파트가 멀리 보인다. 첫 산책에서 자연과 함께 하는 곳이라는 뿌듯함과 앞으로 한숲에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 같은 확신이 생긴다.


6. 오리

이곳에 이사 와서 산책은 일상이 되었다. 산책 코스도 정해져서 이제는 눈감고도 다닐 수 있다. 시간도 거의 일정해서 같은 시간에 만나는 사람들, 날씨와 계절에 따라 일조량과 일몰 시각으로 건물들의 달라 보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파트 단지 내 대형 연못, 하천, 저수지들에서 만나는 오리들이 산책에서 만나는 즐거움이다. 오리들은 무리를 이뤄 제각기 자기들의 영역을 지키고 있다. 새끼 오리들은 어미를 따라서 학교 가듯 줄지어 유영한다.


오리는 상당히 머리가 좋고, 친화성이 높아 보인다. 도서관 옆 대형 연못에 있는 오리들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가끔 장난을 치면 달아나지 않고, 오히려 쫓아와서 부리로 발을 쪼으기도 한다. 먹이를 주면 다가와서 능청스럽게 받아먹는다. 큰 오리발 때문에 걷는 모습이 굼뜨고, 뒤뚱거려 귀엽다. 몸이 더럽지 않도록 햇볕에 앉아서 그루밍(grooming) 관리를 열심히 해서인지 깔끔해 보인다. 이제는 동네 카페에 동정이 나올 정도로 명물이 되었다.


오랜 아파트 생활하면서 산책을 하거나 어떤 동물에 관심을 가진 적이 별로 없었다. 바쁘게 살았던 이유도 있겠지만, 도시 생활에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산책하다 지나가는 개들을 보면 이제 어느 집 개인지도 알 정도이다. 저수지나 하천의 오리들은 주로 철새 오리들이 자리 잡는 곳이어서인지, 연못에 있는 오리들과는 달리 여유가 없어 보인다. 지금 사는 아파트에서 집오리들과 재미있게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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