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면 가끔씩 그날 일이 떠오르곤 한다.
둘째 아이를 낳고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 함박눈이 내렸다. 난 눈을 좋아했지만 아이를 낳고 집 안에서 내리는 눈을 보는 일은 이상하게 조금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호르몬 탓이겠지 혼자 중얼중얼거리고 있었다.
첫째 아이는 학원 끝나고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시간이었고 산후도우미 이모님은 아기 목욕까지 시켜 주시고는 퇴근하셨다. 아기와 나 오롯이 둘이 있는 고요한 시간이었다.
'띠띠띠' 현관문에서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와 함께 친정엄마가 들어오셨다.
"어? 엄마 웬일이야?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데 뭐 하러 오셨어!"
반가운 마음반 걱정스러운 마음반으로 엄마를 맞이했다.
"염색하고 머리 좀 하고 미용실에서 나오는데 눈이 펑펑 오는 거야.
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나가는데 여기 오는 버스가 막 지나가길래 타고 왔지"
"아이고 우리 이쁜 지연이는 자고 있었어?"
작년 가을 아빠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엄마의 슬픔이 채 아물어 가지도 않았을 때 코로나로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하는 상황이 길어졌고 엄마는 한동안 많이 외로워하셨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뜻밖의 둘째를 임신했고 임신기간 중 크고 작은 이벤트로 정신없이 1년이 지난 덕에 엄마의 우울함과 외로움은 조금 덜어낼 수 있었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창밖의 풍경은 동화 속 한 장면같이 폭신 폭신한 눈으로 덮여 있었다.
미용실에서 나오는 길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참 예뻤다고 엄마가 이야기를 꺼내셨다. 우리 이 여사님은 지극히 현실주의자이신 분이다. 그런 엄마가 보기에도 하늘에서 펑펑 내리는 눈이 예뻤나 보다 엄마가 날씨의 변화에 감흥을 보인다는 건 오늘 내리는 눈이 매우 많이 예쁘다는 뜻이다.
너무 예쁜 눈이라고 첫째 아이도 둘째 아이도 나는 이렇게 추운 겨울에 낳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하고 있었다.
엄마는 짐짓 망설이는 듯하더니 미용실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셨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내려오는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풍경도 예쁘고 먼저 가신 아빠 생각도 나셔서 잠시 마음이 울컥 그리고 코끝이 찡 하셨던 거 같다. 미용실의 원장님은 먼저 끝내고 퇴근하시고 엄마 머리를 마무리해 주던 미용실 남자 직원이 엄마를 마지막 손님으로 끝내고 정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순간 이 겨울에 하얗게 내리는 눈이 너무 예뻐서 엄마의 마음도 한껏 동요한 거 같았다. 늦게까지 일하는 직원에게 엄마는 선뜻 2만 원을 건네셨다고 한다.
"맛있는 커피 사 먹어요. 눈도 오고...... 수고했어요."
돈을 받아 든 직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는데
엄마는 그냥 웃으면서 미용실을 나오셨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 일을 나한테 이야기하시며
"그 직원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왜 나한테 이런 돈을 주나 그런 거 아니겠지?" 라며
살짝 걱정되는 말투로 이야기하셨다.
난 단번에 알아챘다.
좋은 뜻으로 건넨 돈이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했을까 돈을 건네기 전에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받아 든 직원이 난감해 할 수 도 있다는 걱정이 되셨던 듯하다.
난 반색하며 이야기했다.
"이야 우리 이 여사님 멋지네! 눈 올 때는 맛있고 따뜻한 커피 한잔 먹어야지! 엄마 내가 일할 때도 고객들이 수고했다고 일 다 끝나고 가면서 몇 만 원씩 주고 가실 때 있었는데 내가 딱! 그랬어. '어? 어? 이런 거 받으면 안 되는데 어! 어? 괜찮아요.' 이런 마음이었을 거야"
"걱정하지 마셔 그 직원 눈도 오고 마지막 손님한테 보너스도 받고 마음이 따땃해져서 퇴근했겠네."
내 말을 들은 엄마는 한결 편안하고 안도하는 표정으로 창 밖을 바라보셨다.
"네 아빠는 이 좋은 세상 눈도 오고 이렇게 예쁜데 좀 더 살다가지......"
라는 말을 혼잣말처럼 하고 계셨다.
엄마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엄마는 미용실에서 나와
집에 가셔서 아빠와 함께 눈이 많이 오고 있노라고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추운 겨울의 저녁 식사를 함께 하셨을 거다.
그리고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을 평범했던 하루의 모습은
아빠의 부재로 엄마한테는 더없이 큰 슬픔으로 문득 다가왔을 거 같다.
분명 아빠는 그렇게 눈이 오는 겨울이면
'뭐 맛있는 거 먹을까?' 하고 미용실에 간 엄마를 데리러 가셨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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