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몰라요
디자인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이 많이 생깁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디자인 외적인 일을 접하거나, 디자인 외적인 분야의 전문가를 만나는 일입니다. 디자인은 조사하고, 분석해서 방향을 설정한 뒤 수많은 스케치를 하고 컴퓨터로 이를 정리한 후 최종 데이터로 시안을 확정하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데... 어떤 경우에는 경영적 이슈가 생기고, 공학적 판단을 해야 하는가 하면 마케팅적 사고에서 인문학적 고민까지 이어집니다. 워낙 영역이 융합적인 성격이다 보니 프로세스가 조금만 확장되다 보면 소위 어디로 확산될지 모르는 것이 근래 디자인의 속성이라 하겠습니다.
게다가 근래는 공공행정에까지 서비스디자인 영역이 확장되다 보니 그 범주는 더욱 넓어집니다. 이쯤 되면, 디자이너의 고민은 깊어집니다. 내가 모르는 혹은 안 해본 영역은 전혀 모른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예상되는 별의별 분야도 스스로 공부해야 할 것인지 말입니다. 정답까지는 아니겠지만, 제가 생각할 때에는 현실적으로 디자이너가 세상 모든 일에 전문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를 다시 말한다면, 세상 모든 일에 전문가가 되기 전에는 디자인을 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특정 기술이나 제품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이는 특정분야 디자인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부류는 디자인의 특성과 본질에까지 고민을 하지 못해 본 사람이라고 단언합니다. 디자인 진흥기관에 있는 분이 그런 입장을 피력하시는 분을 봤는데, 역시 디자인 일선에서 책임을 가지고 진행해본 경험이 없어서 그러지 않은가 하고 생각해봤습니다. 디자이너가 특정 기술이나 분야를 제대로 알고 난 뒤 디자인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견 맞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특정 기술이나 분야는 발전도 없고 지식의 양도 얕다는 가정이 아니라면,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는 의미인데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단지 이론만으로 디자인을 얘기하는 분들은 그렇게 볼 수 있지만, 산업현장의 일선에서 온갖 어려움과 현실적인 조건들과 치열하고 싸워나가는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탁상공론 같은 이야기입니다.
다만, 특정 기술, 특정 분야의 디자인을 하게 되면 기본적인 대화나 상식이 통할 수 있는 수준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조업의 전반적인 이해, 특정 기술분야의 전반적인 이해 정도는 Leveling단계에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해당분야 내용전문가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디자이너의 역할이 현실적인 개발과 생산을 위한 엔지니어의 입장에서는 조금은 자유로워집니다. 개연성 떨어지는 소위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개발자와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디자이너의 역할, 그것이 중요합니다. 디자인의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소위 정통파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디자이너가 모르는 기술이나 타 전문분야가 나온다고 해서 세상 순진한 얼굴로 '난 그런 거 몰라요'란 표정 짓지 말고, 여유롭게 기대되는 마음으로 새로운 분야 전문가와 소통할 기회가 생겨서 기쁘다는 마인드를 장착할 수 있는 포스가 있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