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새로운 우주를 만나는 것과 같다.
내가 중심이던 나의 우주와 새로운 차원의 우주가 겹치는 것이다. 새로운 우주에는 나에게 익숙한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다. 이 우연적 만남으로 나의 우주는 확장되고 새로워진다. 나에게는 크로스핏이라는 운동이 내 우주의 울타리를 넓혀 버렸다.
크로스핏에는 낯선 용어와 표현이 많았다.
완전히 새로운 단어의 양은 훨씬 많았지만, 약간 익숙한 것들도 있었다. 그렇더라도 익숙함의 정도로만 따지면 내 우주 저 멀리 외곽 가장자리에 조용히 있던 것들이다. 이를테면 '역도'가 그랬다. 지금까지 역도는 내 삶에서 의미는 거의 미미했다. 기껏해야 하계 올림픽 시즌이 되면 우연히 보는 수준이었다. 일부러 찾아볼 일도 크게 없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스타가 된 장미란 선수가 내 기억에 남아있는 가장 최근의 역도 관련 기억이다. 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크로스핏을 시작하면서는 역도가 달리기만큼 싫었다.
다른 WOD 종목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무거운 쇳덩어리를 머리 위로 들어야 한다는 것은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자동차 바퀴 같은 바벨을 번쩍번쩍 들어 올리는 옆 사람을 보며 내일부터 나오지 말까라는 생각을 한 두 번 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크로스핏이라는 우주는 나에게 역도를 새로운 개념으로 만들었다.
인상과 용상의 구분도 매번 헷갈리던 보통의 사람에서, 스내치 영상을 여러 번 돌려보는 보통의 사람으로 변했다. 물론 여전히 보통 사람 수준이지만 역도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은 완전히 바뀌었다. 아, 그중에서도 가장 변한 것은 용어다. 역기봉이 '바벨'로 바뀌고, 원판은 '플레이트'가 되었다. '용상'은 '저크(Jerk)'로, '인상'은 '스내치(Snatch)'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Power, Hang, Deadlift, Sumo Deadlift, Clean, Clean & Jerk, Thruster, Push Press 등 뭐가 많다. 이런 용어를 나름 구분할 줄 아는 아저씨가 되었다. 구분할 수 있는 것과 잘하는 것은 일치하지 않는다.
https://youtu.be/kTdNI6Alh4c?si=X7UIQE5tB5HToxvN
HJ를 처음 본 느낌은 강력했다.
덩치 있는 샛노란 단발머리의 20대 여자가 무거운 역기를 성큼성큼 들어 올렸다. 잘하는구나를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나중에 보니까 무려 개인 바벨도 있었다. 당구장을 가도 개인 큐대가 있는 사람은 고수 중의 고수 아닌가? 얼마 가지 않아 쭌코에게 들었다.
"큰 형님, 쟤 잘하죠? 역도 선수출신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역시 남다른 포스의 이유는 있었다. 운동을 전공했던 선수출신은 가끔 봤지만 역도라니. 나에게는 완전한 첫 경험이었다. 이 HJ의 이미지가 강력했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오전반 마스코트인 마린과 오디의 견주였다!
HJ가 오는 날은 역도가 중심 WOD란 얘기고, 역도하는 날에는 마린과 오디가 올 확률이 높다는 의미였다. 역도 선출 HJ의 듬직함과 작고 귀여운 마린과 오디라니, 언밸런스 같은 밸런스의 새로운 이미지는 또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런 강력한 HJ 같으니라고.
HJ의 초반 이미지는 무뚝뚝이었다.
내가 초반에 사람들과 빨리 친해지지 못하는 성향이라 그런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다. 나중에 친해진 뒤에 알고 보니, HJ는 이미지(?)답지 않게 아주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나는 HJ의 금색 단발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첫 애니메이션 감독작인 미래소년 코난에 나올법한 이미지다. 모르는 분들은 아래 이미지를 참고하시면 된다. 아무튼, HJ의 역도동작은 거의 정석에 가깝다. 그래서 쭌코도 역도 WOD인 날에는 HJ에게 시범동작을 선보이게 한다.
하지만 다른 종목은 역도 하고는 조금 달랐다.
물론 기본적인 체력이나 운동능력은 보통의 사람을 훨씬 뛰어넘는다. 상대적으로 H부장과 파트너가 되는 WOD가 오면 항상 HJ는 H부장을 따라가기에 바빴다. 둘은 상당히 친하다. 하지만, 운동할 때는 둘 다 진심으로 진지해지기 때문에 누구 하나는 나가떨어지는데 역도를 제외하면 그 몫은 주로 HJ였다. 생각해 보니 둘 다 이니셜이 HJ로 같다. 앞 글 제목 중에 '대기업 부장님은 고통도 없으셔'는 HJ의 히트 멘트였다.
"아니, 언니는 고통이란 게 없어요???"
역도를 대하는 H의 태도는 아주 진지하다.
지금은 운동선수가 아닌 다른 일을 하면서 살아가지만 역도는 HJ에게 특별한 의미 같다. 우리는 생활 속 건강한 삶을 위한 여러 종목 중 하나지만 그에게는 아주 특별하다. 누구에게나 HJ에게 역도 같은 존재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HJ처럼 꿈이었을 수도 있다. HJ는 현재 선수는 아니지만 자기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HJ가 오랫동안 일하던 레스토랑에 간 적이 있다. 이상하게 체육관에서 보던 모습과는 다르게 직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면 어딘지 모르게 기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같이 운동하는 자식이나 조카뻘 되는 친구들은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궁금하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 있다.
이제 HJ는 조금씩 그 소중한 마음을 옮기는 듯보였다. 마린과 오디와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을 구상 중이고 그 계획에 아주 작지만 내가 조금의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다, 내가 말을 잘 못했다. HJ의 삶에서 소중한 것이 역도에서 추가로 늘어가는 것이다. HJ의 소중함이 빛을 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힘찬 HJ의 철봉샷으로 마무리하련다.
HJ야, 네가 안 오는 날이라도 마린이랑 오디는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