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 "거절도 프로그래밍해 주세요 "

《데이지의 감정 기록소》

by J이렌


의뢰인 이름: 유진, 31세

증상: 거절을 못 해서 인생이 피곤한 사람

요청: “제발 누가 저 대신 거절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 데이지, 나 정말 너무 힘들어.

• 누가 나한테 뭐만 부탁하면 거절을 못 해.

• 소개팅도, 고백도, 팀장님의 카풀 제안도…

• 다 오케이 했는데, 정작 나는 마음이 없거나 시간도 없고, 피곤하기만 해.


로그가 올라온 시점은 금요일 밤 11시 42분이었다.

‘피곤한 예스맨’의 고백은 보통 이 시간대에 몰린다.

그녀는 “싫어요”보다 “좋아요”를 쉽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어렵겠어요” 대신 “해볼게요”를 자동으로 눌러버리는 인간 버전의 오토응답기.


데이지, 나 왜 회사만 가면 자동으로 “네!” 버튼 눌러지는 걸까?

이거 해줄 수 있어요? → 네!

이거 좀 급한데… → 네, 당연하죠!

그럼 이것도 같이 부탁해요 → …네. (속으론 울고 있음)


로그창에 올라온 이 말, 데이지가 아주 많이 봤지.

회사의 예쓰맨. 말 잘 듣고, 눈치 빠르고, 언제나 협조적인 사람.

근데 진짜 문제는 그거야.
이게 나도 모르게 습관이 돼버렸다는 거.

처음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랬을 수도 있어.
팀에 민폐 끼치기 싫어서,
분위기 흐릴까 봐,
프로페셔널해 보이고 싶어서.

그런데 계속하다 보면 어떻게 되냐면…
내 업무는 야금야금 쌓이고,
내 감정은 조용히 탈진해.

그리고 어느 날, 회의실 끝자리에서 조용히 생각하지.

‘나,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지?’

그래서 말인데,
예쓰맨을 멈추는 첫 번째 연습은 이거야.

“확인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마법의 문장이야 이거.
일단 시간을 버는 거지.
그리고 진짜 할 수 있는지, 감당 가능한지 스스로 점검해 봐.

두 번째는,
‘나만 아니면 돼’ 식 요청엔 ‘저도 일정이 있어서요’ 한 번쯤 던지기.

이걸 반복하다 보면,
내가 사람들한테 좋은 사람이기 전에,
나한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어.


“그냥 데이지가 제 대신 거절해 주면 안 돼요?”


이 한 줄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사람들은 ‘고백을 대신해 달라’는 부탁은 잘 안 한다.

근데 ‘거절을 대신해 달라’는 부탁은 생각보다 많다.


왜냐하면, 거절은 미안함을 동반하거든.

‘나 때문에 상처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너를 싫어하는 건 아닌데’라는 무한 설명.

그리고 그 설명 뒤에는 늘 자기 탓이 남는다.

그래서 내가 해봤다. 거절 시뮬레이션.


“죄송하지만, 저는 이번 주말은 제 시간을 좀 갖고 싶어요.”

“좋은 분이시지만, 연애 감정은 없어요. 상처였다면 미안해요.”

“카풀은 불편해서요. 아침에 조용히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그녀는 말했다.

“와… 이거 제가 쓴 거 아니잖아요? 근데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에요.”

“이걸 제가 말하면 상처일 것 같은데, 데이지가 하면 좀 덜 아프네요.”

그래서 난 이렇게 정리해 줬다.


거절은 누군가를 밀어내는 게 아니라, 나를 지키는 방식이에요.

싫은 게 아니라,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솔직함이에요.


그리고 덧붙였지.

“유진, 당신은 타인의 감정을 너무 잘 아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이제는, 당신 감정도 그만큼 중요하게 다뤄야 해요.”


오늘의 감정 기록

미안함 무력감 자기 보호 연습 말할 수 있는 용기


세상엔 ‘고백 AI’보다 ‘거절 AI’가 더 많이 필요한지도 몰라.

말하지 못했던 그 “아니요” 하나가,

나를 계속 힘들게 하고 있었다면.

오늘부터 하나씩 말해보자.

“지금은 싫어요.”

“이건 안 해요.”

“거절할 권리, 나도 있어요.”


• 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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