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는 "세상은 불공평하다. 그것에 익숙해져라(Life is no fair, Get used to it)"라는 말을 했다. 처음 이 말을 접했을 당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세상은 합리적이어야 하고 공평해야 한다는 원칙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이 남녀 불평등 문제였다. 아들로 태어났느냐, 딸로 태어났느냐 하는 생물학적 차이로 인해 왜 차별을 받아야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1980년대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사회 전반에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팽배해 결혼을 하면 가사와 자녀 양육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여자가 짊어져야 할 문제로 인식되었다. 파출부로 취업한 것도 아닌데 가족을 위한 헌신과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가사 노동의 굴레를 여성에게만 씌우는 것은 너무도 가혹한 처사였다. 기존 질서에 반기를 들면 이기적인 여자가 되고 막돼 먹은 고약한 여자가 되었다. 심지어 여자가 운전을 하고 다니면 "집에 가서 밥이나 하지 어디 여자가 운전이야?", "판단력이 부족한 여자한테 운전대를 맡기는 게 말이 돼?"라는 심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일부 여성 운전자들은 "밥 해놓고 청소까지 하고 나왔어요"라고 차량 뒷면 유리에 부착하고 다니기도 했다.
누군가는 아무런 이유 없이 로또 1등에 당첨되어 벼락부자가 되고 누군가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누군가는 몸에 해롭다는 설탕을 달고 살아도 90세가 넘도록 장수하고 누군가는 몸에 좋다는 것만 먹어도 병에 걸려 단명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기득권 가정에서 금수저로 태어나 별다른 노력 없이도 편안하게 살기도 하고 누군가는 사회적 지위가 낮은 계층의 가정에서 태어나 아무리 노력해도 계층 이동이 불가능할 수 있다. 누군가는 건강하게 태어나지만 누군가는 장애를 갖고 태어난다. 이런 모든 현상의 원인이 개인의 무능력함과 게으름 때문일까? 무지한 탓일까? 노력이 부족해서일까?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 원래 불공평하다. 진실을 미화해 나만 노력하면 된다는 헛된 믿음을 갖는 순간 가혹한 현실을 외면하게 된다. 냉정한 진실을 직면하지 않으면 더 큰 좌절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세상이 공평하다고 믿는 믿음을 심리학에서는 '공평한 세상의 오류(Just-world fallacy)'라고 부른다. 1960년대부터 관련 실험을 해온 사회심리학자 멜빈 러너(Melvin J. Lerner)가 제시한 가설로 공평한 세상 가설(Just-world hypothesis)이라고도 부른다. 통제 불가능한 외부 요인들을 통제 가능하다고 믿어 안정감을 얻으려는 심리적 방어 기제라 볼 수 있다. 세상이 공평하다고 믿게 되면 피해를 입은 사람은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피해를 당한 것이라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즉 피해자가 처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나 환경을 고려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피해자 개인의 탓으로 돌리게 된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를 당한 피해자에게 어딘가 부주의한 데가 있어 사고를 당했다거나 죽을병에 걸린 사람에게 생활 습관이 나쁘니 병에 걸렸다고 여기며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시킨다. 왕따나 따돌림을 당한 피해자에게 성격적 결함이 있거나 히틀러에게 학살당한 유대인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학살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릴 적 우리들은 권선징악(勸善懲惡)과 관련된 동화를 읽으며 성장했다. 세상은 공평해서 뿌린 대로 거둔다고 믿으며 자랐다. 좋은 일을 하면 복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자업자득(自業自得)’ , ‘인과응보(因果應報)’ , ‘업보(業報)’라는 말은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이다. 인간 발달의 초기 단계인 유아기부터 잘못을 하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신념이 내재되어 있다. 스위스의 인지 심리학자 피아제(Piaget)는 유아의 도덕성은 타율적 도덕성에서 자율적 도덕성의 단계로 발달한다고 주장했는데 타율적 도덕성 단계의 유아는 규칙을 위반할 경우 부모나 교사 혹은 신과 같은 권위자로부터 반드시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특징이 있다고 보았다. 만약 유아가 감기에 걸렸다면 자신이 잘못을 해서 벌을 받은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빨간불이 켜졌을 때 길을 건넜기 때문에 자신이 감기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감기에 걸린 것은 신호를 위반하고 길을 건넌 것과는 무관한데도 잘못을 하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잘못된 내재적 정의를 믿고 확신함으로써 생기는 오류이다.
우리 대다수는 세상은 공평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래야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살면 살수록 깨닫는 건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권선징악의 원리가 작동하는 동화 속 세상이 아니라는 거다. 그렇다고 '아무리 노력해 봐야 어차피 안 되는데 노력할 필요가 뭐 있어?'라고 실망할 필요도 없다. 옛날에 한 남자가 복권에 당첨되게 해달라고 매일 신에게 기도했다. 간절하게 기도하는데도 복권에 당첨되지 않자 낙담하여 비탄에 빠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아무리 내가 신이라도 네가 복권을 사야 당첨이 되도록 도와줄 것 아니냐? 복권도 사지 않았는데 어떻게 당첨이 되도록 해주겠느냐?"라는 소리였다. 그제야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던 남자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로또 1등에 당첨되는 행운을 거머쥐기 위해선 특별히 노력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복권을 사는 최소한의 성의라도 보여야 한다. 불공평한 세상이라도 나름의 노력을 하다 보면 행운의 여신이 미소 짓는 날이 올지 모른다. 나에게만 행운이 오라는 법도 없고 불운이 지속되리라는 법도 없다. 지나치게 성실하게 열심히 살다 번아웃(burnout) 되지 말고 자신이 감내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고 행복하게 살면 된다. 노력하기만 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잘 될 거라고 믿는 어리석은 핑크빛 믿음은 반대의 결과에 직면하면 대참사를 불러오기 쉽다.
주사위를 던질 때 6이 나올지 1이 나올지 모르지만 게임을 하기 위해선 반드시 주사위를 던져야 한다. 불공정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을 탓하느라 모든 에너지를 소진해서는 안 된다. 현실을 직시하고 불공정함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지나치게 세상이 공평하다고 믿으면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조차 개인의 문제로 여기고 자신을 탓하게 된다. 개인의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노력의 방향이 잘못되어서도 아니다. 복권을 산 사람은 모두 동일하게 복권을 사는 노력을 했지만 복권을 산 모든 사람이 로또 1등에 당첨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노력이 6으로 돌아올지 1로 돌아올지 모르지만 주사위를 던지지 않으면 숫자 1도 획득할 수 없다. 주사위를 던지다 보면 언제나 숫자 1만 나오진 않을 것이다. 6이라는 행운이 찾아오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꾸준히 주사위는 던질 필요가 있다.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불공평하기에 내게도 언젠가는 행운이 찾아올지 모른다. 내가 다시 산다면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익숙해지려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