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다 보면 원하지 않아도 누군가와 얽힐 수밖에 없고 인간관계가 시작되면 상처 주고 상처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누군가에게 상처 주고 싶지도 않고 상처받고 싶지도 않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 이런 일들을 여러 차례 경험하다 보면 인간이라면 넌더리가 난다. 자기만 잘난 줄 아는 잘난 척 대마왕, 나만 옳다는 독불장군,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얌체족, 자기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며 이중적 잣대를 들이대는 내로남불형 인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에서 이기려고 남을 짓밟는 야망으로 들끓는 속물들과 얽히게 되면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못해 속이 새까맣게 탄다. 그런 유형을 만났을 때 적절하게 방어하고 대응했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고 속만 끓이다 상처받게 되면 두 번 다시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진다. 인간 혐오가 생긴다. 인간관계에 환멸을 느끼고 가능한 한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고 싶어 멀리 도망치게 된다. 스스로 세상과 격리시키고 분리시켜서라도 심리적으로 상처받지 않는 안전한 나만의 요새를 짓고 싶어 진다. 가끔은 도망치는 것이 도움이 되겠지만 도망쳐간 곳에도 낙원은 없다. 스스로 지은 요새도 낙원은 아니다. 내가 다시 산다면 나만의 요새를 짓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요새를 짓기보다 길을 잘 닦아 사람들과 교류하며 지낼 것이다.
사람과 교류하며 만남을 이어가는 일은 생각보다 번거롭고 성가시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그만큼 상대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상대를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에게 에너지를 뺏기고 상대의 눈치를 보고 상대에게 맞추어야 하니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된다. 가족도 해체되고 개인화된 마당에 그렇게까지 에너지를 소진하면서 타인과 교류해야 한다는 말은 타당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까지 성가시고 불편한 교류를 이어갈 필요가 무에 있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태어났고 혼자 고립된 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혼자 고독에서 태어나 고독으로 사라지는 존재이지만 사는 동안은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남들과 함께 교류하며 살 수밖에 없다. 애초에 반사능력만 지닌 채 미성숙한 개체로 태어난 인간은 자신을 돌봐주는 주양육자에게 의존해 생명을 유지해 왔다. 다른 존재로부터 외면받거나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인간 아기는 죽을 수밖에 없다. 혼자 할 수 있는 건 우는 것밖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구 생태계에서 지금과 같은 최상위 포식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사회적 동물이었기에 가능했다. 혼자는 약하지만 여러 명이 뭉치면 늑대도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회적 고립이나 단절은 인간에겐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
옛날 어느 추운 겨울날 등산하는 두 명의 젊은이가 있었다. 그날은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는 아주 추운 날이었다. 두 사람은 등산을 하다가 동사하기 직전의 사람을 만난다. 한 사람은 세찬 한파 속에 자신도 살아남기 힘들다고 판단해 자기라도 살아야겠다는 요량으로 동사 직전의 사람을 외면하고 뚜벅뚜벅 산에 올랐다. 또 다른 사람은 자기도 힘들지만 동사 직전의 사람을 외면하면 그가 곧 죽을 것 같아 할 수 없이 그 사람을 등에 업고 산에 올랐다. 그런데 혼자라도 살려고 자기 혼자 등산한 사람은 얼어 죽었고 힘들지만 동사 직전의 사람을 업고 올라간 사람은 살았다고 한다. 등에 업은 사람의 체온이 전달되어 강추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온기를 나누며 함께 교류하는 것은 상대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귀찮고 성가실지 모르지만 그게 곧 나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내가 다시 산다면 골치 아프고 번거로운 인간관계에서 도망가 나만의 요새를 짓기보다 문을 개방하고 길을 잘 닦아 사람들과 교류하며 살 것이다. 사회적 존재로 태어난 숙명을 거슬러 은둔하고 고립된 채 살지 않을 것이다. 타인과 함부로 인연 맺지도 않겠지만 요새를 높이 쌓아 올려 세상과 단절된 채 나만의 요새에 갇혀 살고 싶지도 않다.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사람들과 교류할 것이다. 사람들과 만난다는 것은 무채색이던 삶이 컬러풀해지고 단조롭던 삶이 다채로운 삶이 된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사람만큼 우리의 지평을 넓혀주는 존재도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상대에 대한 배려와 진정한 만남이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것이 되기도 한다. 상처받은 마음에 빗장을 걸고 움츠리기보다 외려 문을 개방하고 사람을 만나려 할 것이다. 다시 산다면 담장을 허물어 길을 닦고, 다소 번잡하고 성가실지라도 사람들과 따스한 체온을 나누며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