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하고 텃밭엘 갔다. 어제부터 알게 되었다. 텃밭에 고구마순과 콩나무가 일부분 변화가 있다는 것을. 헤어스타일로 비교하자면 거의 영구 머리 스타일이 되어 있었다. 다 고라니 짓이다. 지난해에도 같은 경험을 했었다. 고구마든 콩이든 간신이 씨앗을 건졌었다.
오늘은 더 많이 먹어치워서 거의 스포츠머리스타일을 하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구마든 콩이든. 그걸 보고 많이 속상했다. 아침저녁으로 가뭄이 길어서 집에서부터 물병에 물을 담아서 생명을 부지하게 해 뒀더니 장마 둘째 날 고라니의 밥이 되고 말았다.
직장에서도 유사한 경험을 했었는데 퇴근 후 텃밭에서도 같은 그림을 보게 되니 마음이 심란하여 산책로를 맨발로 하염없이 거닐다 왔다.
직무가 다른 두 사람이 한 사무실에 근무한다. 우리 직종은 11년 만에 숙원 하던 일이 어제부터 성사되었다. 단톡에 기념하여 인증사진을 올리자는 제안도 있었고 그걸 실천하는 이도 있었다. 같이 근무하는 누군가가 하다못해 생일케이크에 붙은 작은 폭죽이라도 터트려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 직종이 아닌 직장 사람들은 아무도 특별한 세리머니가 없었다.
본인 입으로 "예전에 친했을 땐 무례한 행동도 했었지만 지금은 안 하지 않냐"라고 했기에 지금은 안 친한 그가 내게 주문 같은 부탁을 했다. "통화를 할 땐 밖에 나가서 하세요."라고. "미안하다. 개선하겠다, "라고 답하고 이어서 편협한 응대를 했었다. "같은 경험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냥 참았다. 둘 이상 지내다 보면 다들 조금씩 불편하지 않냐."라는 내용의 답을 해버렸다.
한때는 친했었다. 그런데 그가 내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걸 (사실은 상사의 지시로 안 한 걸 ) 알게 되어 "상사에게 다 말해버리겠다."라고 내게 협박한 후부터는 '아, 걸어 다니는 CCTV 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본인의 이익에 눈이 멀어 배신행위를 손쉽게 하는 걸 보면서 '겉모습만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었다.
'신뢰'를 목숨처럼 생각하는 나는 '신뢰'라는 두 글자를 구경도 못해본 사람과 그 후로도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살았었다. 그런데 오늘 그가 "예전에 친했을 땐"이란 말을 언급하는 걸 듣고부터는 '아, 본인도 우리 사이가 친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구나.'를 확인하게 되었다.
우리 직종이 어제부터 소원하던 일을 이뤘는데 함께 기뻐하며 축하하기는커녕 다른 직종이 많이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체감하면서 조심하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퇴근시간이 가까워지자 걱정거리를 내게 상담했다. 그래서 우리 집 사례를 얘기하면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성의껏 답해주었다.
함께 근무하면서 본인의 고민을 종종 토로하면서 내게 자문을 구했었다. 그런데 불편한 감정이 극에 달해 있는데 오늘도 내게 자문을 구하자 난 스르르 허물어지고 만 것이다. '상당히 위험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다가도 금세 언제 그랬었냐는 듯이 그를 위해 성의를 다한다.
여린 고구마 순이나 콩 잎을 먹어치워 버린 고라니가 있는지 알면서도 또 심고 갖은 정성을 다한다.
주변에 또 그런 사람이 있다. 도움을 청하거나 아니면 청하지 않았을 때도 나는 그를 위해 성의껏 도움을 준다. 그러나 미미한 나의 부탁은 본인의 소신이 더 중요해서 매번 거절한다. 그럼에도 또 도움을 청하면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기꺼이 그에게 도움이 되려고 최선을 다한다.
어떤 이는 자녀교육에 대해 여러 번 자문을 구하던 이가 있었다. 아이 셋 키우면서 알게 된 많은 정보들을 자세하게 알려줬었다. 나의 단점은 너무 내 일인 양 자세히 알려주면서 실제 행동에 옮길 수 있도록까지 도움을 준다. 그 과정 자체에 늘 기꺼이 행한다. 그때마다 그들의 뒷모습이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취할 것 취했으니 더 볼일 없다는 듯한 뒷모습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걸 그들은 모른다.
점심시간이면 식후 짧은 산책을 한다. 동료 중에 한 분이 여우 애찬론을 폈다. 그러자 "나는 곰과다, 그냥 곰과가 아니라 여우를 싫어하는 곰과다."라고 말했더니 "왜 그러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여우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람 안된다."라고 말했더니 몇 번을 되뇌곤 했다.
고구마나 콩뿐만 아니라 월동 시금치 배추 등 텃밭의 야채를 수확해 가는 자는 고라니다. 몹시 속상해하면 남편은 그런다. "야생동물 살리는 좋은 일 한다."라고 말한다. "자네는 운동하고, 식물 성장과정 보면서 기뻐하고 서로 좋구만."이런다. 반복되는 고라니의 갈취행위에도 어김없이 또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김을 뽑아준다. 남편의 말처럼 고라니 식사를 위한 의도는 없다. 그냥 내 할 일을 할 뿐이다. 결과는 어떠하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