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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터널

by 론 위즐리 Apr 0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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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20년 뒤, 강남의 한 타워


대기업 사무실이 즐비한 테헤란로의 한복판에 300층이 넘는 초고층 메가타워가 들어섰다. 이 회사는 영등포에서 무인비행체를 개발하는 스타트업으로 시작해 매년 혁신적인 신제품을 출시하며 무섭게 성장하더니, 창립 20주년이 되는 올해 한국 최초로 전세계 시총 1위 기업으로 등극했다. 회사가 보유한 막대한 현금으로 테헤란로의 노른자땅을 모두 사들인 뒤, 까다롭기로 유명한 서울시의 건축 인허가를 초고속으로 통과하고 전례 없는 초고층 메가타워를 세웠다.


오늘은 이 회사의 창립기념일이자, 메가타워의 개장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세계의 언론사들이 새벽부터 타워 주변에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던지, 서울시가 한때 이 주변 일대의 교통을 통제할 정도였다.


개장식 30분 전, 타워의 동측면에서 초대형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예고에도 없던 깜짝 이벤트에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폭발적으로 터졌다.

이 회사의 창립자이자 공동대표인 Mr.X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보잉스타일의 레이벤 선글라스를 끼고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 회사의 뜻깊은 행사를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20년도 세계를 이끄는 초일류 기업의 자리를 굳건히 유지할 것을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오늘은 마음껏 즐기십쇼. 1층부터 50층 라운지까지 세계 각국의 미슐랭 3스타 셰프 100여 명이 모여 최고급 산해진미를 선보일 예정이니 허리띠는 잠시 풀어두시구요. 카라얀을 배출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선율을 감상하시면서 이 순간을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타워 주변을 맴돌고 있던 초대형 쏘서 안에서 100여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나타나 차이콥스키의 “꽃들의 왈츠”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타워의 서측면에서는 이 회사의 공동대표이자 투자의 귀재, 타임지 선정 10대 부자에 한국인 최초로 이름을 올린 ‘하민규’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Mr.X보다 민규의 출현에 더 큰 환호성을 질렀다.


“하민규! 하민규!”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구호처럼 연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1순위 워너비였다. 대학을 수석 졸업한 뒤 회사에 취직하여 1세대 쏘서부터 5세대 쏘서까지 단 한차례의 시행착오 없이 성공 신화를 이끌어내며 회사를 지금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뿐만 아니라, 초창기 회사의 비상장 주식을 엄청나게 사들여 Mr.X에 버금가는 지분을 갖게 되었고, 이사와 주주들의 청원으로 공동대표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는 제2의 워런버핏이라고 불릴 정도로 투자의 귀재였다. 투자를 하는 족족마다 10년 뒤 가치가 100배, 1000배 이상 뛰어올라 세계 10대 부자의 타이틀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연애사업만큼은 순탄치 않았다. 이전 생에서 사랑했던 여인과 다시 연인 사이가  되었으나, 결국 비슷한 이유로 헤어졌고, 그 이후론 만나는 사람마다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그의 나이는 벌써 45세가 되었다.


민규는 겸손한 듯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을 위해 특별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쏘서 모델-6를 공개합니다!”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환호성과 함께 모델-6가 저 멀리 상공을 가로지르며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최대 시속 130만 킬로미터, 웬만한 강풍, 돌풍에도 끄떡없는 항공 역학적 설계와 제어시스템,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차세대 AI 기술이 탑재되어 비행의 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으실 겁니다! 내일부터 예약 판매가 시작되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그의 말 한마디에 기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속보를 띄우기 시작했다. 동측면에 있던 Mr.X는 선글라스 뒤로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 이제 타워의 개장식이 있겠습니다. 먼저 대표님들의 테이프 커팅식이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말과 함께 홀로그램 속에 있던 Mr.X와 민규가 함께 손을 잡고 타워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곳곳에선 민규의 이름을 외치는 극성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커팅식이 끝나고 사회자가 다음 순서를 진행하려던 그때..


“아, 잠깐...” Mr.X가 사회자를 향해 잠시 멈추라는 듯 손짓했다.


“여러분, 이벤트가 하나로 끝나면 되겠습니까? 이 회사의 창립자이자 대표로서, 회사의 다음 20년을 이끌어갈 비장의 무기를 소개하겠습니다. 그건 바로 군용 쏘서 A-1입니다.  우린 개인용 비행체를 넘어서 우리나라, 더 나아가 세계의 안보를 위한 군용 쏘서 개발의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올 테니 주주 여러분들께선 기대해 주셔도 좋을 겁니다.”


민규가 모델-6을 공개했을 때보다 더 뜨거운 반응이었다. 수많은 기자들이 이미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눈에 띄게 스모키 한 화장에 짙푸른 아이섀도, 빨간 립스틱을 한 외신기자가 Mr.X와 눈이 마주쳤다.


“TF1 틍퐈웡 마리 로랑임미다. 최긍 노조 썰리블 추징하덩 지궝드레게 명에 퇴지글 강요해따능 얘기가 이떤데, 이게 싸씰잉가요?”


“음... 뭐랄까요... 노조는 아직 우리에게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회사가 지난 20년 간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건 직원들이 다른 데 신경 쓰지 않고 성과 중심적으로 일했기 때문이죠. 우린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노조를 만들 시간에 회사의 발전에 더 신경 쓴다면, 직원 복지는 알아서 좋아질 겁니다.”


“피으 쑥청이라능 얘기가 이씀니다. 그 과정과 결과릉 좀 더 쌍쎄히..” Mr.X가 그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여긴 기자회견장이 아닙니다. 질문은 홍보실을 통해 해 주세요. 오늘은 우리 회사의 뜻깊은 날입니다. 하 대표가 소개한 모델-6의 체험부스가 곳곳에 마련되었으니 체험하실 분들은 하시고, 라운지 음식과 아름다운 음악을 즐기시면서 오늘 하루도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Mr.X는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를 뒤로 한 채 유유히 타워 안으로 사라졌다. 기자들의 눈은 일제히 민규를 향했다.


-----


“대표님, 군용 쏘서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개발이 언제 완료될지도 모르고, 국가 안보와도 직결된 사항인데, 그걸 전 세계인이 보는 앞에서 말해버리면 어쩌자는 겁니까?”


민규가 타워 꼭대기층에 있는 Mr.X의 드넓은 사무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소리쳤다. Mr.X는 길쭉한 책상 위에 다리를 꼬아 올려놓고는 시가 연기를 ‘푹푹’ 풍기며 말했다.


“어차피 언젠간 해야 될 일이었어.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지. 차세대 쏘서를 출시할 때마다 주가가 찔끔씩 오르는 건 영 성에 안 찬단 말이지. 가만히 앉아있어도 현금이 제 발로 들어오는데, 왜 이 좋은 걸 나중으로 늦추냐는 말이야. 답답한 사람하고는...”


“노조와 관련된 직원들을 해고한 건 어떻게 설명하실 건데요?”


“해고가 아니라 명예퇴직이야. 그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니 오해 말게.”


“기자들 사이에서 피의 숙청이 있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구요. 정말 일을 이렇게 처리하시다간...”


“왜, 또 이사회를 열어서 날 어떻게 해보시려고?”     


민규는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에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자네만 내 약점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나?”


민규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 사람, 대체 무슨 얘길 하려고...’


민규는 캐묻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른 채 그대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


밤 10시, 메가타워 299층, 민규의 사무실


예상치 못한 사건들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기념식이 모두 끝나고, 민규는 녹초가 되어 밤 10시가 되어서야 겨우 사무실로 돌아왔다. 299층 그의 사무실에선 한강이 훤히 내다보였다. 밤이 되어도 잠들지 않는 서울의 야경은 언제 봐도 아름다웠다. 그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푹신한 회전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 이 맛이지. 열심히 일하고 만끽하는 이 황홀한 고독...’


그가 눈을 감고 빙빙 도는 의자에 몸을 맡긴 사이... 어둠 속에서 누군가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앗, 깜짝이야!”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민규가 소리쳤다.


“나, 알아보겠는가?”


그의 검은 망토 속 금빛 목걸이가 반짝였다.


“교수님? 아니, 마법사님?”  


“그래, 20년이 지나도 날 잊을 린 없겠지.”


“벌써 20년이나 됐나요? 시간 참 빠르네요.” 민규는 20년 전 마법사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지난 20년 간 자넨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더구만. 원하는 대로 된 건가?”


“네, 뭐, 그렇다고 봐야죠.” 맞는 말이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럼 지금 인생에 만족하고 있다고 봐도 되겠군...”


“그런데요, 마법사님이 그때 분명 과거에 한 시간 있다가 돌아올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전 20년을 꼬박 다 살았거든요. 혹시 마법이 실패한 건가요?”


“허허, 그게 정상이라네. 자네가 느끼기엔 20년의 시간일지 몰라도, 우주의 관점에서 볼 땐 자넨 과거에 한 시간 있었고, 그 뒤론 시간의 터널로 들어와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거라네. 지금부터 자네의 진짜 시간이 시작된 거지.”


“그렇군요...”


“그럼 전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마법사님이 말씀하신 ‘그 돌’은 커녕 노들섬 근처조차 가보지 않았으니까요. 20년이란 세월이 너무 짧았습니다...”


“모든 게 자네의 선택에 달렸네. 자네가 내 페르소나이긴 하지만 자네에게 아무것도 강요하고 싶지 않아. 상황을 이렇게 만든 건 내 잘못이 더 크니까...” 마법사는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를 만지작 거렸다.


“제게 몇 시간 남았죠?”


“10시간”


“10시간 뒤엔 지구의 운명을 되돌릴 수 없나요?” 마법사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민규는 지난 20년을 다시 되뇌어 보았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애써 포장해 왔지만... 그는 성공이란 족쇄에 갇혀 일 말고는 아무것도 제대로 해낸 것이 없었다. 40대에 ‘여유로운 방랑자’가 되기는커녕 더 일 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미친 듯 사랑했던 연인과도 이별해야 했고, 마음 터놓을 친구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주변엔 오직 그의 돈만 보고 접근하는 기회주의자들만이 득실 할 뿐이었다. 돈이 많아진 것 빼고는 어느 하나 달라진 게 없었다. 그는 여전히 똑같은 하민규였다.


“마법사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데, 제가 지금이라도 새로운 인생을 살 자격이 있을까요?”


“그럼. 과거에도 지금도 난 자넬 믿고 있네. 10시간은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야. 다 자네의 선택에 달렸지.


민규는 뭔가를 결심한 듯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법사님, 20년 전 마법사님과 약속을 지키러 떠날게요. 저 쏘서와 함께...” 민규는 테라스에 있는, 먼지 하나 없이 매끈한 모델-6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정말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되었군. 지금까진 한번 살아봤던 인생이라면, 지금부터가 진짜 인생이란 걸 명심하게. 자네의 선택 하나하나가 자네와 지구의 운명을 결정할 거라는 걸 잊지 말게.”


민규는 쏘서에 노들섬의 좌표를 찍고 나서 마법사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그가 이번 임무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번이 진짜 마법사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 같았다. 그는 마법사를 향해 정중히 인사한 뒤, 눈깜짝할새 어디론가 사라졌다.


마법사는 20년 전처럼 민규가 떠난 허공에 조용히 속삭였다.


“여유로운 방랑자여, 행운을 비네.”


* 새롭게 나타난 Mr.X와 민규와의 갈등 관계,

그리고 마침내 시작된 민규의 모험까지...

다음 화도 많이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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