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아기
오늘은 딸과 함께 문화센터를 다녀왔다.
목요일 당나귀똥 수업이었는데 주제가
‘아파요, 아파’였다.
의사 선생님이 된 딸이 뽀로로를 치료해줬다.
응급차를 타고온 뽀로로를 청진기를 찬 꼬마 의사가 체온도 재고 주사도 놓아주었다.
(애가 한게 아니라 거의 내가 다 했지만?ㅋ)
아주 깜찍한 의료 현장에서 나는 참으로 흐뭇함에 젖었다.
‘아~ 우리 딸이 의사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돌된 어린 아이의 잠깐의 역할놀이였는데도 어찌나 뿌듯하던지. 아마도 이 문센 커리큘럼을 짠 사람은 이 마음을 노린 것 같다!
‘아.. 의사가 되려면 사교육을 뭘 시켜야할까… 영어 수학… 이과니까 수학을 가르쳐야지.. 아닌가 과학?’
돌쟁이 아이와 병원놀이를 하며 여기까지 앞서갔다. 그렇다 나는 돌아이 엄마…ㅋ
치맛바람 날리는 미래의 내 모습이 보여 얼른 마음을 가다듬어봤지만 의사가 된 나의 2세를 상상하니 웃음이 절로났다. ‘주책바가지’
‘아파요 아파’ 수업에서 의사가 됐으면 남을 치료해줘야 되는 게 맞는데 이상하게 말 속에 어떤 주술적 힘이 있나보다.
오늘 오후, 뽀로로가 아니라 우리 아이가 아팠다.
문화센터에 다녀와서 복작대고 노는데,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일이 벌어졌다. 기저귀통에 있는 기저귀를 하나씩 꺼내며 놀던 우리 아이가 기저귀 전체를 꺼내려고 힘을 쓰다가 기저귀 수납함에 푹 파묻혔다. 푹 파묻히며 수납함 입구에 얼굴을 세게 박았다.
얼굴에 비스듬히 멍자국이 들었고 벌겋게 부어올랐다. 아주 놀라 우는데 ‘으앙’하는 아기의 입 안에 부딪힌건지 언제 생긴지 모를 작은 구내염 증상도 보여 너무나도 놀랐다.
그 구내염증때문에 어제 저녁을 먹을 때 갑자기 울었던 건지. 울어서 왜 그런지 입을 보려고 하는데 손을 너무 세게 물고 울어대서
‘얘는 성격이 왜 그런가’하고 넘겼는데 자세히 보니 그 때 그 상처때문에 울었던 듯.
너무 미안해.
우는 아이를 달래고 상황을 수습하려고 하는데 마음이 달래지지를 않았다. 아이의 마음이 아니라 내 마음이 문제였다.
아이는 아프니 우는 게 맞는데 내 마음이 수습이 안되게 아팠다.
타인의 아픔에 대해 이렇게까지 아파해본적이 있었나? 평소 남의 고통과 슬픔과 소소한 감정들에 과도하게 감정이입을 하고 공감을 하는 편이라 괴로울 때도 많지만 그래도 이 정도까지의 아픔은 아니었다.
아주 오래된 명대사이자 유행어
“아프냐? 나도 아프다..”
거기서 말하는 사랑하는 이의 아픔. 그 차원의 아픔이 아니었다.
아니 왜 네가 아픈데 내가 아프지.
이 아픔의 근원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와 다른 개체의 아픔에 대해 이렇게도 마음이 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가장 큰 이유는 죄책감이다.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아이가 다치게 되었다는 죄책감. 그게 제일 문제였다.
나는 엄마라는 직책이 처음이라 매사에 열심히, 빠지는 구멍없이 매워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매번 새롭게 나타나는 구멍들에 좌절하기 일쑤다.
해봤던 일은 노력으로 어찌저찌 참 잘할 자신이 있는데 이 육아는 모든 게 처음이고, 처음이면 서툴고, 서툴어서 힘들고, 힘들어서 구멍이 난다.
그 구멍이 오늘은 기저귀를 가지고 노는 아이를 못하게 막지 않는 것이었고 그래서 애가 다쳤다.
아, 왜 나는 완벽히 애를 보지 못했을까.
붉게 달아오르며 멍이 들락말락한 볼을 보며 마음이 미어진다.
아이는 이미 상처는 잊고 해맑게 웃는다. 볼에 멍이 대각선으로 나서 거의 쌍칼이다.
야인시대의 쌍칼같은 상처가 내게 질타하는 것 같다.
“너 그때 뭐했어? 애 제대로 안보고.”
쌍칼 내 딸이 말을 한다면
“엄마 왜 울어? 쿨하지 못하게” 할 듯하다.
이미 상처따위는 다 잊고 기저귀통의 공포도 다 잊고 웃으면서 다른 장난감을 쥐고 있다.
있다 없다 놀이에 열중하며 손에 있는 장난감을 숨기고 고개를 내 쪽으로 쭉 빼며 애교를 떤다.
하지만 나는 아직 마음이 아프다.
(다음글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