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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경 Feb 11. 2024

6. 연인

낭만적 사랑은 자아를 한 단계 성장시킨다.

6. The Lovers

[타로의 그림 열쇠 by 아서 에드워드 웨이트]

태양은 중천에서 빛나고, 그 아래에서는 멋진 날개를 가진 인물이 양손을 펼치고 아래를 향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경에는 두 인물, 남성과 여성이 마치 지상 낙원에 처음 살았을 때의 아담과 이브처럼, 서로에게 벗은 모습을 드러낸 채로 있다. 남성의 뒤에는 12개의 열매가 열린 생명의 나무가 있고, 여성의 뒤에는 뱀이 휘감고 있는 선악과나무가 있다. 이 인물들은 중대한 물질적 욕망으로 오염되기 전의 젊음과 순결, 그리고 결백함과 사랑을 암시한다. 이는 단순히, 여정(旅程)의 일부, 진리와 생명으로 표현된 인간애를 나타낸 카드다.

이는 첫 번째 원칙에 의거하여 내가 예전에 해설한 이전의 ‘결혼’ 카드 (역주: 기존 마르세이유 타로의 6번 연인 카드를 의미), 그리고 이후에는 ‘악덕과 미덕 사이에 있는 남자’로 묘사되었던 풍자적인 카드를 대체한다. 더 높은 층위에서 해석하자면, 이 카드는 계약 (Covenant)과 안식일 (Sabbath)의 신비에 대한 것이다.

여성은, ‘인간의 타락’이라는 관념이 내재된, 감수성이 뛰어난 생명체를 매혹하는 능력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녀는 자발적, 의식적으로 유혹하는 여인이라기보다, 비밀스러운 신의 섭리의 작용을 뜻한다.

궁극적으로 인간이 생겨난 것은 그녀가 저지른 과오를 통해서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 의해서만이 자신을 완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카드는 여성이라는 존재들이 지니는 위대한 신비에 관한 또 하나의 암시이기도 하다.

예전의 그림에 부여된 오래된 의미는 필연성이 붕괴되었다. 그 이후의 해석조차 몇몇은 진부한 수준이며, 다른 것들도 상징성 면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사랑은 약한 마음에 상처만 가득 남기고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진실을 알게 했어요."


1986년에 발표된 구창모의 곡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의 가사입니다. 사랑의 갖가지 형태와 그로 인해 야기되는 온갖 감정 및 경우의 수는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다양한 예술가들에 의해 다채롭게 해석되고 재생산되어 왔습니다. 그 어마어마하게 광범위한 스펙트럼이 수렴되어야 할 바람직한 귀결점은, 구창모가 노래한 '성숙'입니다. 사랑 중에서도 '유혹으로 시작된 낭만적 사랑'의 의의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웨이트의 연인 카드는, 바로 이 지점을 짚어 줍니다.


시인 김소연은 "언제나 사랑은 찰나 속에서만 존재하며, 그 찰나의 짜릿한 합일 이후는 길고 긴 이별을 변주하는 몸짓에 불과하다"라고 <마음사전>에서 말합니다. 태초의 남녀가 에덴에서 뱀의 꼬드김에 속아 금지된 과실에 손을 대고 찰나의 달콤함을 맛본 후 낙원에서 쫓겨나 길고 긴 고행을 감내하는 과정은 낭만적 사랑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인간은 평생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각자의 가치관에 따른 완전함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부단한 노력의 근저에는 태내에서 각인된 낙원의 기억에 대한 향수가 자리하는지도 모릅니다. 이를 정신분석가 제임스 홀리스는 "우리가 탄생하는 동시에 갖는 트라우마, 곧 어머니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신경학적으로 재현하는 홀로그램 같은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라고 설명합니다. 자궁 속에서 '나'는 어머니라는 '타자'와 연결됨으로써 보호받고 있는 완전무결한 존재였습니다. 그 시절에 대한 회기 본능에 따라 '타자'와의 합일을 통해 결핍을 메우고자 하는, 분리된 개체끼리 통합을 꾀하고자 하는 정동(情動)으로 사랑을 설명하는 발상은, 플라톤의 <향연>에도 등장할 만큼 유구한 역사를 가집니다.


그 어떤 사랑으로도 두 개인의 온전한 통합은 이뤄낼 수 없다는 유감스러운 진실 또한 수많은 저술과 예술 작품에 기록되어 왔습니다. 이 진실은 어느 정도의 세월을 거친 어른이라면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또는 간접적으로 보고 들은 사례를 통해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단언컨대 통합이란, 타자를 대상으로 하는 사랑이라면 어떠한 연인도, 심지어 여러분에게 '완전했던 기억 (또는 착각)'을 제공했던 자궁의 주인인 어머니조차도 현실화시킬 수 없는 신기루입니다. 여러분이 결핍을 채워 주기를 바라는 타자는, 해당 결핍이 무엇인지, 어떻게 채워 줘야 하는지를 결코, 영원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상 나도 잘 모르는,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할 수도 있는 결핍의 정체를 타자가 어떻게 '정확히' 알 수 있을까요. 단테가 신곡에서 그린 베아트리체는 실제 인물인 베아트리체와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베르테르가 열렬히 사랑한 로테 또한 실제 로테와는 다를 수밖에 없는, 그의 상상 속에만 살아 숨 쉬는 허상(虛像)입니다. 텅 빈 이미지로는 실존의 빈 곳을 메울 수는 없는 법입니다. 나와 '하나'가 되어주리라 기대했던 성애적 대상과 낭만적 사랑의 배신은 애초부터 정해진 숙명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허상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바로 우리 내면의 결핍입니다. 사랑의 상실, 이별로 괴로워하는 이들 중 운 좋은 몇몇은 "왜 나는 그 사람과 헤어졌을까?""왜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걸까?""왜 나는 그 사람에게서 무엇을 원했던 걸까?""내 안에서 채워져야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라는 자문자답을 거쳐 자신 안에서 결핍되어 있었던 것의 정체를 발견하게 됩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던 내면의 결핍이 투사된 허상에 매료되고, 허상에 기대하고, 허상에 상처받고, 허상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그것이 허상임을 깨닫고 비로소 실체인 자신에게 눈을 돌려 그에 내재된 문제를 찾아냄으로써 성숙에 이르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는 연인 관계뿐 아니라 모든 타자와의 관계에서도 유사하게 벌어지는 패턴이기도 합니다. 타자라는 거울을 통해 '나'의 실체를 파악할 힌트를 발견하고 고민하고 연구하고 비로소 '인간적'인 성장을 이뤄내는 것 말이죠. 다만 당사자들이 상대방을 향해 품는 환상의 크기나 통합을 향한 의지, 그로 인해 발생되는 갈등과 변화의 크기, 깊이가 각별하므로 우리는 특정 관계에 대해 '사랑'이라 이름 짓고 구분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어쩌면 부모 자식 간보다 더 긴밀하게 두 개체가 엮이는 상태가 '사랑'이기에, 연인들은 비로소 각자의 내면 가장 깊숙이 매몰되어 있는 결핍을 캐내어 샅샅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갓난아기 같은 알몸으로 침대 속에서 연인을 꼭 껴안고서, 차마 가족이나 친구에게 밝히지 못했던 상처를 털어놓고 눈물을 흘려 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여기서 침대 속은 사랑이라는 '너와 나는 하나다'라는 거대한 착각이 만들어 낸 하나의 결계(結界)로써 기능합니다. 바꿔 말하면, 단 둘이 있는 그 공간이 마치 태초의 에덴동산처럼 안전하게 느껴지기에 두 연인은 망설임 없이 아담과 이브처럼 알몸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알몸은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져서 숨겨 온, 결국은 결핍과 동의어인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낸 무방비한 모습입니다. 애석하게도, 그 고백을 들은 상대는 높은 확률로 여러분을 배신하거나, 또는 치유해 주기를 바라는 당신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점을 둬야 하는 것은 상대가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평소에는 옷 안에 꽁꽁 감춰온 결핍, 즉 나의 문제가 드러났다는 성과입니다. 모든 문제는 발견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잡는 법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정신분석가 제임스 홀리스가 "우리는 타인과 이어져야 하며 타인을 통해 자신을 비춰봐야 한다. 같은 이유로 타인에게도 우리가 필요하다"라고 말한 것이리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개인적으로 경험을 통해 깨달은 바로는, 내면의 결핍을 채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나, 이를 이해하고 내 일부분으로서 인정하고 품음으로써 치유하는 것은 가능하며, 그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뿐입니다. '구멍'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더라도 '이 정도쯤은 구멍 난 상태로 살아도 괜찮아'라는 경지에 이름으로써 성장하고 안정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나'야말로 허상일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실체이며, 살아 있는 한 '나'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을 구원, 혹은 자아의 완성이라는 목표에 가까워 지도록 한 단계 끌어 올려주는 '사랑'이라는 손의 주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영혼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 맑은 거울로서, 상대방이 자신의 결핍을 발견하도록 도와주고, 그 결핍을 결코 비난하지도, 또 부적절하게 합리화하지도 않고, 그저 곁에 머물러 있어 주면서 영적인 성장을 응원해 주는 것, 그리고 서로를 동등하게 존중해 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나의 연인'이라고 이름 붙인 타자를 대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궁극의 사랑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는 허상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고통의 씨앗이 되고 마는 '낭만적인 사랑'에서 한발 더 나아간 개념이지만, 결과적으로 자아의 성장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는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외적인 기준에 비춰 볼 때 실패한 사랑이든, 성공한 사랑이든 나의 성장을 유도했다면 그것은 옳은 사랑입니다.


TASCHEN에서 출판한 <TAROT>라는 책은 아래와 같은 문장들로 연인 카드에 대한 설명을 끝맺고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성숙해지고 더 높은 관계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유일한 경로다. 내면의 믿음을 응원함으로써, 진정한 욕망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결핍과 결핍은 서로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끌어당기는 힘(引力)이 있습니다. 이렇게 한쌍의 거울은 상대를 선택합니다. 저는 이것을 '운명'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모든 인연은 옳습니다. 그 인연의 결말이 어떻든 그 만남에 감사합시다. 그 만남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를 반추합시다. 그리고 성장합시다. 이것이 우리가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랑, 서로를 단순히 자신의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행복을 추구하는 결합체로 보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중


[타로 카드의 메시지]

성경에 등장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먹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벌거벗은 상태를 깨우치고 수치심을 느낍니다. 이는 그들이 무지에서 벗어나 지혜를 얻었음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그 선악과와 같아서 깨문 순간은 달콤한 자극을 주지만, 삼키고 나면 세상과 나 자신의 모르고 있던 이면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 깨달음은 수치심을 부르고 고통을 야기하나, 그 핵심을 이해하고 잘만 소화해 낸다면 종국에는 성장을 이끌어냅니다. 이것이야말로 당신이 사랑으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

사랑을 할 때에는 상대방을 통해 나 자신을 들여다보세요. 그렇게 해서 찾아낸, 알몸으로 벌벌 떨고 있는 당신의 내면 아이를 잘 품어 주세요. 그것이 자신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 앞에서 알몸을 드러내고 부끄러워한다면 역시 옷으로 감싸고 꼭 안아 주세요. 이것이 타자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삶에 적용한다면 사랑은 더 이상 해로운 집착이나 강요, 원망으로 왜곡되지 않을 것이고, 당신과 당신의 연인 모두 영적인 성장이라는 해피엔딩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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