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희경 Feb 04. 2024

2. 여사제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 내면에 숨겨진 양면성이다.

2. The High Priestess

[타로의 그림 열쇠 by 아서 에드워드 웨이트]

그녀는 초승달을 발치에 두고 뿔이 솟은 왕관을 머리에 쓰고 있다. 왕관의 중앙에는 구체가, 가슴에는 커다란 '태양 십자 (Solar Cross, 조화와 균형, 편재성 (Ubiquity)을 상징함)'가 있다.

손에는 ‘토라 (Tora)’라는 단어가 쓰인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데, 토라란 ‘큰 법’ ‘비밀의 법’을 의미하며, 더불어 (신의) ‘말씀’이란 뜻도 있다. 이것이 부분적으로 그녀의 외투에 가려져 있는 것은, 어떤 부분은 암시되어 있고, 어떤 것은 말로 전해짐을 시사한다.

그녀는 신비로운 신전의 희고 검은 기둥, J. 와 B. 사이에 앉아 있으며 (구약성서 열왕기상 7장 21절 "후람은 이렇게 해서 만든 두 기둥을 (솔로몬의) 성전의 현관에다가 세웠다. 오른쪽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 (Jachin, 그가 세우다)'이라고 하였고, 왼쪽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 (Boaz, 그에게 힘이 있다)'라고 하였다."), 야자나무와 석류 문양이 수놓여 있는 신전의 장막이 뒤에 보인다. 얇고  투명한 제의는 흐르듯 드리워져 있고 외투에는 광채가 돈다.

그녀는 이시스의 성역의 입구에 있는 ‘숨겨진 지식’으로 불려 왔으나, 그녀야말로 ‘비밀의 교회’이며 ‘신과 인간의 집’이다.

또한 그녀는 이미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왕자 (역주: 살해된 후 부활한 오시리스, 또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함)의 두 번째 결혼’을 의미한다. 그녀는 영적인 ‘신부’이자 ‘어머니’이며, 별들의 딸이자 ‘보다 높은 차원에 있는 에덴의 정원’이다. 요는, 그녀는 빌려온 빛(반사광)의 여왕이지만 그 빛이야 말로 모든 것의 빛이다. 그녀는 천상의 어머니의 젖으로 자란 ‘달’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녀는 또한 ‘천상의 어머니’그 자체이다-바꿔 말하자면, 그녀는 빛나는 반사체인 것이다.

이런 의미로, 주의 체계에 따라서 말하자면, 그녀의 가장 진실되고 고귀한 이름은 셰키나 (Shekinah, 히브리어 성경에서 하나님의 신적인 임재나 함께 거하심을 의미하는 히브리어)-공존하는 영광이다.

중세 유대교의 신비주의인 카발라에 따르면, 셰키나는 상계(上界)와 하계(下界)에 모두 자리한다. 상계에서는 저 밑의 방출물들을 비추는 ‘천상의 이해’인 비나 (Binah,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의 문양인 생명의 나무의 3번째 세피라, 즉 속성으로 통상 '이해'로 번역됨)라 불리며, 하계에서는 내재된 영광으로부터 축복받음으로써 축복받은 왕국로 여겨지고 있는 세상 ‘말쿠트 (MaIkuth,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의 문양인 생명의 나무의 10번째 세피라로 통상 '왕국'으로 번역됨)’라 불린다.

신비주의적으로 말하자면, ‘셰키나’는 정의로운 자의 ‘영적인 신부’이며, 그가 법을 읽을 때 그녀는 신성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 카드를 메이저 아르카나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신성한 카드로 보는 견해도 있다.


생명의 나무, 즉 세피로트의 나무는, 거짓된 자아가 진정한 자아로 거듭나고, 또 천상의 신성(무한성)이 하계의 물질세계(유한한 세속)로 이르며 창조를 실현하는 22개의 경로를 나타낸 종교적인 도식이라고 합니다. 메이저 아르카나의 서사 구조와 겹치죠. 그 세피로트의 나무의 상단과 하단의 속성을 동시에 갖는, 어쩌면 이 서사의 시작과 끝인 존재가 여사제입니다. 2개의 극이 없다면 그 둘을 잇는 선인 서사 자체가 성립될 수 없기에 '가장 신성하고 고귀한' 카드로 여겨질 만합니다.


빛과 어둠, 여성성과 남성성, 태어남과 죽음, 이성과 감성, 선함과 악함, 좋고 나쁨, 참과 거짓, 공격 성향과 피해 의식, 우월함과 열등함, 안정성과 불안정성 등 서로 반대편에 있으면서 팽팽한 긴장감, 또는 균형을 이루는 한 쌍의 속성들은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치 한 가지 속성만 가지고 있는 양, 예컨대 "나는 밝은 사람이야" "그분은 뛰어나" "이 집단은 정의로워"와 같은 한쪽 방향에만 치우친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명확한 긍정성을 드러내는 이 신념은 과연 지혜로우며, 우리의 영혼의 성장에 도움이 될까요?


지혜의 왕 솔로몬의 성전을 배경으로 한 이 카드의 키워드는 '직관'입니다. 신념은 종종 직관에서 출발합니다. 좋은지, 싫은지, 옳은지, 그른지, 추한지, 아름다운지... 대상이 가진 양면적인 속성 중 평범한 우리의 직관은 대체로 한 가지만 집어내고 규정하고 신념을 굳히죠. "옳아" 또는 "틀려"라고요. 이러한 식으로 직관을 써서는 안 된다고, 이 카드는 말해줍니다. 양면성이 인정됨으로써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우주 만물을 하나의 속성으로만 인식하려 하면 오류가 발생하고, 오류는 갈등을 낳습니다. 비극의 씨앗이 되는 거죠. 세상의 양면성을 고루 꿰뚫어 보는 직관을 손에 넣으려면, 우선 자신 내면에 존재하는 양면성부터 파악하고 수용해야 합니다.


정신분석가인 로버트 존슨은 자신의 저서 <Owning your own shadow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에코의 서재)>에서 내재된 양면성의 균형을 잡는 작업을 '시소게임'에 비유하며, 그 균형이 깨지면 정신 이상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경고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움받거나 소외되고 싶지 않아서 숨기고 마는 한쪽의 속성을 융은 '그림자'라고 불렀습니다. 내면의 빛과 그림자가 통합된 온전한 인간이 되기를 꿈꿨다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이제 영원히 교차하는 선과 악, 빛과 그림자 중 무엇이 오든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인생이라는 경기에 임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내 본성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받아들일 것이다."

(<카를 융 영혼의 치유자> 중)


대문호 괴테의 페르소나인 파우스트 박사, 이성과 지식의 최정점에 도달한 현자인 그는 작품 초반에서 자신이 '신성"에는 미치지 못함을 깨닫자 '나는 벌레나 다름없다'라고 비관하고 자살을 시도합니다. 이런 파우스트에게 주님은 악마 메피스토 펠레스를 보내며 "착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잘 알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스스로의 어두운 충동을 똑바로 인지해야만이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해 봅니다. 그림을 그릴 때 음영을 꼼꼼하게 표현해야지만 이미지가 뚜렷하게 떠오르듯이 말입니다. 메피스토 펠레스와 온갖 악행을 벌이며 자신의 짙은 그림자를 확인한 파우스트는 비로소 구원받습니다. 이를 로버트 존슨은 "파우스트의 내면은 자신의 그림자인 메피스토를 받아들임으로써 채워진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를 만나서 온전해지고, 메피스토는 파우스트를 만나서 전일성을 획득한다. 그림자든 자아든 한쪽을 돌아보지 않는 상태에서 다른 쪽의 변형은 이루어질 수 없다"라고 설명합니다. 작품은 다음과 같은 합창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일체의 무상한 것은

한낱 비유일 뿐,

미칠 수 없는 것,

여기에서 실현되고,

형언할 수 없는 것,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도다."


여기서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제게는 타로의 여사제 카드로 보이는 것입니다. 시작 부분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려 하는 파우스트를 비추고 있던 달빛은 이러한 결말의 복선으로도 읽힙니다.


자신의 그림자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왜 이리도 중요할까요? 내 그림자를 모르면, 의도치 않게 그 그림자가 타인이나 세상의 것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다 저 사람이 나빠" "세상은 썩었어" "왜 내게만 다들 불공평하게 대하지?" "네 탓이야"와 같이 말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의 작용을 심리학에서는 '투사'라고 합니다.


이러한 투사가 지속되는 한 개인은 남 탓만 하며 제자리에 머무를 뿐 영적으로 발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원망만 하다가 최악의 상황에는 되려 스스로 세상과의 연결 고리를 끊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1과 1이 서로 기대야만 완성되는 人 (사람)라는 글자가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자아가 붕괴되는 것입니다. 또한 투사와 투사가 오가다 보면 갈등과 반목은 필연적으로 따라옵니다. 이것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묻지 마 살인 등의 무차별적인 증오 범죄로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소리 없이 삭이기에 그림자의 존재감은 지나치게 확실하고 무겁습니다. 우리의 무의식은 그림자를 외면하지 못합니다.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그림자는 불건전한 방향으로 자라날 것입니다. 그림자가 폭주해 온갖 불행을 끌어들이기 전에 그 존재와 무게를 인정하고 건강한 방법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는 그림자를 이해하고 인정하고 그 역동적인 에너지를 잘만 활용하면, 여러분은 무궁무진한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암흑 그 자체인 소설들을 여럿 발표한 도스토예프스키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여사제의 다음 카드로 <창조>가 키워드인 <여황제> 카드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대극을 이루는 1과 1은 당장은 2를 이루지만, 잘만 통합되면 3으로 이어집니다. 정반대 성별의 남녀가 융합함으로써 새 생명을 탄생시키듯이 말입니다. 즉, 1과 1을 여사제의 뒤에 서 있는 두 개의 큰 기둥처럼 똑바로 인지한다면 1+1은 2가 아니라 3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창조성과 생산성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여사제 뒤의 장막에 수놓인 야자나무와 석류입니다. 여사제의 가슴에 장식된 십자가는 양극의 균형을 통해 신성에의 도달하는 것을 돕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 존재 의미를 표현한 상징물로 보입니다.


이러한 진리가 더 이상 외투 안에 숨겨져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저는 원작 그림 속의 여사제의 품에서 모세의 율법인 토라를 꺼냈고,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습니다.


<여사제> 카드가 펼쳐졌다면, 찬찬히 스스로의 그림자에 대해 분석하는 시간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잔혹하고 어두워 보이기만 하는 건지. 어쩌면 그 뿌리는 내 안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바꿀 수 없지만 세상을 대하는 나 자신의 태도는 바꿀 수 있습니다. 타로 카드로 운명을 바꾸는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로버트 존슨에 따르면, 천재적인 시인이자 일러스트레이터였던 윌리엄 블레이크는 우리가 형상 (form)을 원한다면 천국으로 가야 하고 에너지를 원한다면 지옥으로 가야 하는데 반드시 이 둘을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윌리엄 블레이크야말로 천국과 지옥을 거치고 품음으로써 무시무시한 창의력을 발휘한 장본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에게 내재된 마법사의 천재성을 여사제의 지혜로 잘 다뤄내어 블레이크와 같은 훌륭한 창조자로서 거듭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비록 생전에 '광인' '괴짜' 취급을 받았다지만, 양극을 오가는 고통을 끝없이 겪고, 그 사이에서 조화와 균형을 갈구하며 얻은 깨달음을 통해 창조된 블레이크의 작품과 완결된 자아는 진주알처럼 영원히 빛을 발할 것입니다.


대극을 지님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인간다운 삶으로 드러낼 수 있다. (중략) 우리는 자신 안에 악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삶으로 나아갈 때 삶은 색채를 띤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삶은 책을 읽는 것과 다름없다.
칼 구스타프 융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실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남에게 말하기를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 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7장 1~5절

[타로 카드의 메시지]

사람은 무릇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느끼고 싶은 대로 느끼기 마련이지만 이 한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당신 안의 선과 악, 빛과 그림자, 여성성과 남성성 등의 양면성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온전히 품으십시오. 불편한 진실과 직면하십시오. 그래야만 진짜 지혜를 얻고 비로소 내재된 무한한 가능성을 마법사처럼 발휘해 '창조'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이해하고 나면 이를 통해 얻은 뛰어난 직관으로 상대방의 그림자도 금방 인지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그림자를 눈치챘다면 때로는 침묵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감사하십시오. 타인의 그림자를 통해 자신의 그림자를 한 번 더 돌아보고 이를 포용함으로써 온전한 자아라는 신성한 목표에 한발 더 다가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 03화 1. 마법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