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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경 Jan 24. 2024

0. 바보

우리의 삶은 '없음'에서 시작되었다.

0. The Fool

[타로의 그림 열쇠 by 아서 에드워드 웨이트]

대지와 그 속박의 힘이 미미하다는 듯, 화려한 옷차림의 젊은이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세상 꼭대기의 벼랑 끝으로 향하고 있다. 그는 벼랑 아래가 아닌, 머리 위에 넓게 펼쳐진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비록 정지된 장면으로 그려져 있기는 하나, 그가 열정적으로 걸어갈 것이고 그의 개 또한 달릴 것임을 알 수 있다. 깊은 낭떠러지로부터는 공포가 느껴지지 않는다. 만약 그가 뛰어내리려 한다면 천사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붙잡아줄 거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그의 얼굴은 총명함과 꿈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하다.

그는 한 손에는 장미꽃을, 다른 손에는 값비싼 지팡이를 잡고 오른쪽 어깨에 걸쳐 놓았는데 거기에는 흥미로운 문양으로 수 놓인 보따리가 걸려 있다. 그는 아침의 영광과 그 이글거리는 공기 속에서 여행을 시작한 다른 세계의 왕자인 것이다. 등 뒤에서 빛나는 태양은 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많은 날이 지난 후 다른 경로를 통해 어떻게 돌아올 것인지 알고 있다. 그는 경험을 찾아서 다니는 영혼이다.

신비주의 단체의 많은 관습적인 상징이 이 카드에 요약되어 있으며, 권위에 의해 인정받은 이 상징들은 기존의 혼란스러운 해석을 뒤집는다.

그랜드 오리엔트 (Grand Orient: 웨이트의 필명)는 그의 저서인 <카드점 매뉴얼 (Manual of Cartomancy)>에서 더 높은 차원의 점술을 행하기 위한 과정의 일부로서 신비로운 “바보”의 임무에 관해서 흥미로운 제안을 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방식으로 점을 치기 위해서는 평범한 재능 이상의 것이 요구될 수도 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는 점술에서 카드가 어떤 식으로 다뤄지는지 안다. 이 카드가 도박의 도구로서 득점용이나 눈속임용으로 사용될 때, 실제로는 메이저 아르카나가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몇몇 사람들은 명백히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점술이 어쩌다가 생겼는지에 관하여 우리가 아는 바는 거의 없다.

기존의 설명에 따르면, ‘바보’는 육체, 감수성을 지닌 생명을 뜻한다고 한다. 가장 부조리한 무대에서 행하는 바보짓을 묘사한 특이한 풍자화이기도 한 이 카드의 보조적인 명칭은 ‘연금술사’였다.


태어난 순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이를 낳은 순간만큼은 또렷이 기억합니다. 탄생을 알리는 첫 울음을 들었을 때 경이롭고 기쁘고 감사한 한편으로 '대책 없이 저질러 버렸구나!'라는 막막함이 밀려왔던 것이 생각납니다.


배냇저고리, 아기 욕조, 손톱깎이 등의 출산 준비물과 육아 노하우가 망라된 백과까지 챙겨 두었지만 저는 정말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엄마가 되겠다고 세상에 내놓아 버린 새 생명의 미래와 그에 대한 책임이 얼마나 막연하고 거대하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남편 또한 본인이 아빠가 되었다는 사실조차 실감을 못 하는 눈치였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는 무방비 그 자체였습니다.


삶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모든 시작은 불투명하고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이며 무모합니다. 확실한 것은 오로지 1초 뒤, 1분 뒤, 1시간 뒤, 그리고 하루 뒤로 이어지는 방향성=시간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방향성만큼은 하늘에서 빛을 쏟아붓는 태양의 움직임처럼 환하고, 확고하고, 항구적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으로 밀려 나온 존재는 0 (없음)에서 1 (있음)으로 그 방향성을 타고 흐르듯이 용감하게 나아갑니다. 비록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는 그 자신은 전혀 모르지만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본능적인 희망을 품고.


'바보의 여행'이라는 모험적 서사의 중요한 22개의 만남, 또는 사건을 정리한 메이저 아르카나 중 0번, 바보 카드는, 완전히 무지한 상태로 삶이라는 여행을 시작해 버린 우리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가 걸친 '화려한 옷'과 들고 있는 '값비싼 지팡이', '자수 문양 보따리'는, 비록 바보이긴 해도 모두가 귀한 존재이고 사실은 가진 것이 많다고 전하는 웨이트의 숨겨진 메시지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 카드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저질러 버리는 행동력' '계획하지 않았던 일' '자유로움' '용기' 등으로 풀이되는 이유는, 무에서 유를 창조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시작' 단계의 속성 때문입니다. 눈도 못 뜨고 목도 제대로 못 가누던 갓난 우리는 그렇게 눈을 뜨고, 목을 가누고, 몸을 뒤집고, 기고, 걷고, 말을 배우고, 친구를 만들며 비로소 사람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기본 능력을 눈치도 대책도 없이 보이고 들리는 대로 마구 따라 하며 될 때까지 반복 연습하는 불굴의 실천력으로 쟁취해 낸 셈입니다. 이렇듯 어떤 두려움도 걱정도 없이, 무작정 발전과 전진을 거듭했던 유년기가 있었음을 우리는 언젠가부터 망각하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염려하느라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소심한 어른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라면서 익힌 어설픈 지식은 때로는 편견이나 불안을 일으켜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 지식의 속박에서 벗어나, 스스로 바보임을 인정할 때 미래로 과감히 뛰어들 용기와 희망이 솟아난다는 진리를 카드는 일깨워 줍니다. 스피노자는 희망을 이렇게 정의했다고 합니다.


"희망은 우리들이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나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불확실한 기쁨이다."


여기서 '불확실성'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예측할 수 없는 데서 옵니다. 철학자 강신주는 "희망에 따른 그 미래의 설렘이 있기에 불확실성도 발생한다. 불확실성이 견디기 힘들도록 무섭다는 이유로 희망의 싹을 자르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절대적인 진리와 미래 앞에서는 필연적으로 무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정신분석가인 제임스 홀리스는 "실제로는 항상 (자신의) 부분을 알 뿐이다. 자신을 온전히 알고 있다는 말처럼 오만하고도 어리석은 주장도 없다"라고 지적합니다. 이렇듯 '모름'은 약점이 아닙니다. 당연하고 보편적인 속성이기에 약점이 될 수도 없습니다. '나는 바보야'라고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그저 만고불변의 사실일 뿐입니다. 바보가 아닌 척하느라고 시작을 안 하는 게 더 부끄러운 일입니다. 오히려 그 불확실성의 선물=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비록 발 앞에 도사린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더라도 천사들이 붙잡아 줄 것'이라고 카드의 고안자 웨이트는 말합니다. 그 천사의 정체는 다름 아닌, 당신 자신의 한 떨기 흰 장미처럼 순수한 용기와 희망, 그리고 자유입니다.


[타로 카드의 메시지]

아무도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내면의 의지가 당신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명한다면, 무식하지만 과감하게 시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이 비웃고 의심하는 가운데, 금을 연성해 내겠다고 미련하게 연구를 거듭했던 연금술사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비록 금을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과학, 의학, 철학의 발전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한 바 있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해 낸 뉴턴도 연금술사였습니다. 지금 당장 시작하세요. 당신은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충성스러운 개와 함께인 카드 속 바보처럼,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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