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교육공무원을 관뒀는지에 대한 이야기
'탈출은 지능순'이라고 했나
교권 추락으로 인해 일어나는 교사들의 수난기가 각종 미디어에 도배되는 작금의 현실을 보면,
12년 전, 5년 차 교사로서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안고 교단을 떠나던 그때가 생각난다.
2011년 7월 31일, 나는 미국에 도착했다.
어렵게 준비했던 임용 고시, 소위 철밥통 공무원직을 뒤로하고 일가친척 하나 없는 미국으로 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과 친구들은 '반대에 반대'를 했다.
무턱대고 미국으로 가서 일이 잘 안 풀리면 얼마나 후회를 하겠니...
엄마는 비행기 타는 전날 밤까지 나를 붙잡으시며 다시 생각하라 하셨다.
강원도 정선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부모님은 고등학교 비평준화던 시절 큰맘 먹고 소위 '공부 잘한다는 애들'이 모여 있었던
도내 소도시로 나를 보내셨다.
고등학교 기숙사와 하숙을 번갈아가면서 생활했고,
늘어난 생활비와 교육비로 많은 고생을 하셨지만,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셨던 부모님의 소망은 단 하나내가 안정적인 직업을 갖는 것이었다.
조그마한 개인 사업을 시골에서 운영하시며 IMF를 혹독하게 겪어내시던 부모님은,
내가 교대에 합격했을 때, 세상을 다 가지신 것처럼 좋아하셨다.
"여자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최고야."
초등학교 여선생이 선시장에서 인기 있었던 그때 그 시절, 교사가 된 딸이 가지고 왔으면 가장 좋겠다 하던 소식은,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남편감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28살이 되던 해, 딸은 유학 준비를 끝냈다며 미국으로 간다고 했다. 이제 결혼만 시키면 할 일을 다하신 거라고 생각하시며, 적극적으로 선자리도 마련하시던 부모님의 계획이 와르르 무너지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이과를 나왔다. 나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단 한 번도 내가 교사가 될 것이라는 꿈을 꾼 적은 없었다. 안타깝게도, 뭔가를 이룩하고 존경받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나오는 "훌륭한 선생님 덕분이에요"... 하는 그런 선생님과의 추억은 나에게는 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 까지,
참고 참고 또 참으며 견디며 앉아 있던 그 지루한 시간들.
학교는 벗어나야 하는 공간이지 평생을 출근해야 할 공간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교대에 가기로 결심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해 수능을 망쳤기 때문이었다.
수능 결과는 정직했다. 나는 문과 체질이었다.
그 해 특히 어려웠던 언어 영역에서 나는 거의 만점을 받았다. 의대 입시에 필요했던, 수학과 과탐은 좋은 성적을 받지 못했다. 수능 결과를 두고, 고3 담임 선생님은 난해한 표정을 지으셨다.
한참 고민하신 끝에 결국, 교대를 추천하셨다.
이과 쪽으로는 쓸 대학이 마땅치 않으니, 내신과 언어점수가 좋은 너는 교대가 좋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교대에 입학했고, 처음 2년 정도 방황하며 성적은 바닥이었고 시간은 갔다.
다행히 3학년 때 교육 방법론을 배우면서 교육이 아무나 할 수 없는 전문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어떻게 하면 좋은 교육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생겼다.
교생 실습을 통해 교사로서의 사명감이 생겼고
4학년이 되어 임용고시를 준비하면서 교사가 되고 싶은 간절함이 생겼다.
나는 역시 문과 쪽 시험에 재능이 있었다.
한 번에 합격했고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소재의 한 학교로 3월 발령 났다. 3학년 담임으로 시작했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 며칠 동안은 매일 학교에 나가서 교실을 꾸몄고,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프린트해서 책상에 붙일 때면, 조금 있으면 이 아이들을 만날 생각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잠을 설칠 정도로 많이 설렜다.
- 효주는 어떤 성격일까?
- 수영이는 뭘 좋아할까?
나처럼 교사가 오랜 꿈이 아니었던 사람도,
대학 4년 동안 전문성을 키워나가면서,
몸과 마음이 교사로서 준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신기했다.
3학년 아이들은 정말 예뻤다.
내 한마디 한마디에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따라오는 모습들이, 내가 매일매일 더 좋은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내가 첫 담임을 3학년으로 시작해서 교직에 대해 긍정적으로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었던 점은 천운인 것 같다. 모든 학교들이 신규 교사를 비교적 다루기 쉬운 학년에 배치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물론, 어떤 학생들을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3학년은 1, 2학년처럼 하나에서 열까지 챙겨야 하고 학부모들의 간섭이 심하지 않으면서,
5, 6학년처럼 신체적, 정신적으로 큰 변화를 경험하는 시기는 아니니까 나에게는 비교적 가르치기 좋은 학년으로 여겨졌다. 4학년은 경험상 1학기까지는 가르치기 좋았지만, 방학 이후에 돌아온 아이들은 사춘기에 막 진입하려는 것처럼 사뭇 다른 분위기여서 많이 당황했었다.
가르친다는 행위는 놀랍게도 내 적성에 맞았다. 난 아이들을 더 잘 가르치고 싶었다. 더 잘 가르치는 방법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고 싶었고, 서울시 교육청 수업 개선 교사 프로젝트를 신청해 1년 동안 운영하면서 많이 배웠다. 결과, 서울시교육청 3등에 입상해 교육감상을 받았다. 나는 요즘 한창 이슈가 되는 막장 학부모님들을 만난 적이 없다. 다행히도 내가 만난 학부모님들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을 할 줄 아는 분들이셨다. 학부모들의 교사에 대한 막말과 갑질 논란으로,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교사들의 이야기를 미디어를 통해 볼 때면, 나는 참 운 좋은 교사였구나 하면서 씁쓸해진다.
하지만, 관료조직으로써의 학교 문화는 견디기 힘들었다.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여러 가지 업무들이 쏟아졌다. 젊은 교사가 없고 연차 높으신 교사분들이 주를 이루는 조그만 학교에 신규 발령을 받아서,
나는 학교에 출근하자마자 내가 인생에서 한 번도 해볼 것 같지 않았던 일들을 업무로 담당하게 되었다. 그중에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업무 분장은 방송부였다. 오래된 학교의 오래된 기계들.
후지고 후진 방송 기계들은 고장 나기 일쑤였고,
기계에 대한 아무 관심 및 이해가 없던 나에게는
학교 조회 및 행사가 있는 날들에는 불면증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오늘은 또 무슨 방송 사고가 날까.
나는 아이들을 관찰하고 아이 하나하나에 수준과 특성에 맞는 수업을 설계하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쓰고 싶었다. 모든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교육을 어떻게 제공할까 하는 질문에 대한 지식과 기술이, 그것이 내 교사로서의 전문성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그 일을 하러 학교에 가는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나는 매일 후진 기계들과 싸우고, 좌절하고, 언제 터질지 모를 방송 사고에 벌벌 떨었다.
수업이 끝나고 오후 시간이 되면 오늘 수업 결과 아이들의 반응이 어땠는지를 생각해 보고, 어떻게 하면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발달을 독려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싶었다.
하지만 쏟아지는 업무들 처리하다 보면 벌써 퇴근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요한 학교 행사가 있었는데 방송 기계가 행사 중간에 또 고장이 나서, 교장 선생님은 무척 화를 내셨다. 왜 방송 기계가 오래돼서 잦은 고장이 나는 것을, 교체해주실 생각은 안 하고
새내기 초임 교사에게 화를 내시는지 이해를 못 할 노릇이었다.
그렇게 찍혀서 생활하던 어느 날,
다른 업무를 처리하다가 담당 장학사에게 공문으로 온 교육 사업에 대해 궁금한 부분이 있어 직접 교육청에 전화를 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몇 시간 후, 교장실에서 나를 호출하셨다.
어디 교장의 허락도 없이 교육청 장학사에게 직접 전화를 거냐는 것이 분노의 메인 포인트였는데,
고개를 숙이라느니, 죄송하라고 하라느니, 그것도 모자라 일개 교사 지도도 제대로 못하냐고, 50대 후반의 교무부장님과 교감 선생님도 호출을 당하시고 내가 보는 앞에서 혼이 나셨다. 교사가 장학사에게 직접 전화해서 물어보는 건 있을 수 없다던 그 교장선생님의 권위주의, 이런 리더 밑에서 계속 일을 해야 하나 좌절했다.
장학사가 된 내 동기는 요즘은 교장선생님들이 그렇게 권위적이지 않다고 한다. 참 다행인 일이다.
분위기 파악하지 못했던 MZ세대 교사는 고개를 숙이고 죄송하다는 말 대신, 업무 관련 담당 장학사에게 궁금한 점을 직접 문의한 점이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해버렸다. 그 후, 어떤 선배 교사들은 어른한테 말대꾸하고 대드는, 싹수없는 후배라고 한 마디씩 하기도 하셨다.
모든 학교가 똑같은 리더스타일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겠지만, 그리고 물론, 나는 5년 후에 좀 더 나은 조직 문화를 가진 학교로 발령 날 수 있었겠지만,
위계가 심하고 연차와 서열이 중시되는 딱딱한 조직에서 계속 일하는 것이 내가 열정을 가지고 즐겁게 가치를 찾으며 일할 수 있는 곳일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좀 더 수평적이고 창의적인 근무 환경에서 존중받으며 일하고 싶었다.
계속 맡겨지는 잡무들과 예측할 수 없는 나에 대한 교장선생님의 분노 표출은 내가 여기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있다는 사실마저도 잊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점점 학교가 답답해졌고, 나는 교육전문가가 아니라, 권위적이고 관료적인 조직의 최 말단에 서있는 일개 직원이다라는 사실에 무기력해졌다.
거기다, 내가 수업 개선 교사로 한창 교육 연구에 열정을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일부 동료 선생님들이 "적당히 해, 자기가 너무 열심히 하니 우리도 피곤하다"라고 하셨다.
눈치가 보여서 열정을 줄여야 했다.
그래서 교단을 떠났다.
좀 더 자유롭고 존중받는 분위기에서 교육전문가로 일하고 싶었다.
미국으로 가서 내가 열정을 느꼈던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대해 더 공부하기로 했다.
교육공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더 배우고 싶은 갈증으로,
박사 학위도 도전하게 됐다.
그렇게 Ph.D. 를 받았고,
다시 교단으로 돌아왔다.
미국 주립대학교 교육학 교수로.
2018년부터 근무하기 시작했고,
내년에 정년 심사를 받게 된다.
공부를 하는 동안 결혼을 했고,
코로나가 세상을 조용하게 만들었을 때, 출산을 했다.
남편은 행정학 교수다.
남편은 캠퍼스가 뉴욕에 있고, 나는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대학에서 일한다.
우리는 노스캐롤라이나 샬롯에 작년에 집을 구매하고 정착했다.
남편은 매주 비행기를 타고 직장에 가고, 나는 출퇴근 왕복 4.5시간 드라이빙을 한다.
오랜 시간, 손에 쥔 핸드폰도 없이 드라이빙을 하다 보니, 미국에서 그동안 앞만 보고 바쁘게 달려오던 내 지난 12년, 공부를 하고, 직장을 얻고 했던 과정들에 대해서도 반추하게 되고,
워킹맘으로서 직장 생활, 육아나 교육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미래의 교사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로써,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에
우리 미래 세대들에게 필요한 교육은 무엇일까,
어떤 교육방법을 교사가 될 내 제자들에게 가르쳐야 하나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된다.
그러다 문득,
내가 그동안 가진 경험들과 생각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보는 건 어떨까 하고 소망하게 되었다.
나의 이민자로서, 워킹맘으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써의 경험과 관점들이
궁금한 독자로 하여금 참고가 되고 또 다른 영감이 되기를 바라며 (inspiration)
브런치스토리에 하나씩 펼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