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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TS Apr 21. 2024

15th &16th 야곱의 노년을 읽고 있습니다

더 원숙해질 수 있다면, 기꺼이 나이를 먹고 싶다.

저는 모태신앙이었지만, 지금은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신앙인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회색인인 거 같습니다. 떠돌이, 탕자, 잃어버린 영혼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교회에서 함께 중고등부 시절을 보냈으며, 가장 소중한 친구의 형님께서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 고통 속에서도 제게 편지를 남겼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자.' 이 편지를 몇년간 외면해왔지만, 이제는 이 편지에 가타부타 제대로 답을 해야할 거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은 성경을 읽으며, 생긴 온갖 종류의 생각들입니다. 글을 쓰는 목적은 잘 모르겠습니다. 내 생각을 정리하며, 형님의 요청에 정직하게 답을 하기 위해서라고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열다섯. 창세기 47장 8절~9절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연세가 얼마뇨 야곱이 바로에 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심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나이를 묻는다. 나이에 대해서 대답한다. 7년 전 세계를 떠돌아 다닐 때, 제일 많이 반복는 양상 중의 하나이다. 나이가 별거 아니라고들 하는데,  나는 나이를 통해 상대가 경험한 세상의 크기를 짐작하는 편이다. 내게 있어서 상대방의 나이 여부는 내가 그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지침점이 된다.


어떠한 이유였는지는 모르지만, 바로는 야곱의 나이를 물었다. 이 때 야곱의 대답이 멋지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그냥 몇살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나그네 길의 세월이라고 표현했다. 나그네라는 것은 떠도는 자이다. 세계를 떠돌아 다녔을 때, 여행지는 내 생활 터전이 아니다. 한국이 내 일상의 터전이다. 그러기에 자연히 나는 나그네일 수 밖에 없다.


야곱은 자신의 인생을 나그네길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이 땅은 자신의 생활터전이 아니며, 자신에게는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다는 고백이 된다. 간사하고, 부족함이 많았던 야곱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깊이가 생긴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말년에는 나의 이해 수준을 넘어서는 깊이 있는 언행을 보여준다.


나그네로서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도 어느새 나그네 길의 세월이 사십년이 되었다.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나 또한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러나 삶에 대한 원숙함에는 전혀 이르지 못하고 있다. 언제서야 나는 야곱과 같은 자기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려나.  



열여섯. 창세기 49장


분량이 길다. 그냥 야곱이 12명의 아들을 모아서 유언이자 축복을 하는 장면이다. 자녀들마다 유언의 분량이 다른 것이 인상적이다.


야곱은 자신의 아들 12명에게 축복과 예언의 이야기로 유언을 한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생기부의 종합의견 작성이 떠올랐다. 함께 생활한 아이들에 대한 마지막 총평가와 함께 미래에 대한 기대를 담아냈다는 면에서 그러하다. 그런데 야곱의 마지막 유언은 나의 종합의견과는 달랐다


나의 종합의견은 인간적인 연민과 학생-학부모와의 관계에서 오는 끈적임, 입시에 대한 염려 등으로 정확하고 냉정한 평가가 되지 못했었다. 어떻게든 좋은 말을 써주고 싶어서 분량 자체가 길어지며, 미사여구가 많아지는 경향이 있다. 그에 반해 야곱은 자신의 아들 12명에 대한 최종 평가에 있어서 매우 단호하고 차등적인 모습을 보인다.


장자 르우벤에게는 장자를 향한 축복과 함께 그의 실수에 대한 엄정한 질타를 했으며, 시므온과 레위에게는 그들이 저질렀던 세겜일족 학살 사건의 피값을 물었다. 유다에게는 실제적 장자의 명분을 상속하는 최고의 축복을 한다. 스블론과 갓, 아셀 , 납달리에게는 간략하게 축복하며, 잇사갈, 단, 베냐민에게는 후손들의 양상을 보여주는 다소 긴 유언을 한다. 그리고 요셉에게는 형제들에게 으뜸이 되는 축복을 한다. 야곱의 아들에 대한 유언은 엄정하고, 차등적이며 분명했다. 이를 읽어보며 내가 그동안 적었던 종합의견은 미사여구의 나열일 뿐 진짜 기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애정과 엄정한 평가는 공존할 수 있을까. 나는 선생이었던 지난 12년 동안 내내 이것이 힘들었다.


문득 담임이 야곱처럼 종합의견을 적으면 어떻게 될지, 학교는 얼마나 들썩거렸을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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