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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TS Apr 16. 2024

13th 여정: 요셉을 읽고 있습니다

범사에 형통하리라. 그것은 나의 예상과는 분명 다르다.

저는 모태신앙이었지만, 지금은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신앙인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회색인인 거 같습니다. 떠돌이, 탕자, 잃어버린 영혼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교회에서 함께 중고등부 시절을 보냈으며, 가장 소중한 친구의 형님께서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 고통 속에서도 제게 편지를 남겼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자.' 이 편지를 몇년간 외면해왔지만, 이제는 이 편지에 가타부타 제대로 답을 해야할 거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은 성경을 읽으며, 생긴 온갖 종류의 생각들입니다. 글을 쓰는 목적은 잘 모르겠습니다. 내 생각을 정리하며, 형님의 요청에 정직하게 답을 하기 위해서라고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열셋. 창세기 39장 23절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다른이가 보지 않는 곳에서도 마음가짐을 바로 하며, 여호와께서 보고 계심을 고백하며 온전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던 요셉은 강간미수범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그 대상은 애굽 내에서 매우 신망이 높던 보디발이라는 장군의 아내였기 때문에, 그가 일으킨 스캔들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믿었던 노예의 튀통수", "여인의 기지로 벗어난 강간미수 사건" 등의 이름으로 SNS 상에서 지겹게도 회자되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이 하지 않은 일로 인한 공격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 성경에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의 심적 고통이 어떠했을지는 아주 조금은 알 거 같다. 나 또한 일방적으로 조롱받았던 기억이 상처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강간미수범이라는 죄명으로 감옥에 갇힌다. 그런데 그의 감옥 생활은 나름 평탄했다. 간수가 그를 좋게 보고, 각종 감옥의 일을 그에게 맡긴 것이다. 그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이 서술은 당혹스럽다. 요셉이 현재 감옥에서 잘 지내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누명은 밝혀진 것이 없고, 그가 강간미수범으로 감옥에 있는 사실도 달라진 것이 없다. 그는 여전히 치욕스런 누명을 뒤짚어 쓴 채, 감옥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를 범사가 형통한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하나님, 너무 가혹합니다. 억울한 누명을 쓴 이들에게 형통한 삶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감정이 이입되어, 하나님께 따지고 있었다 .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형통과 사람이 생각하는 형통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라 할수 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형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만사가 잘되고, 억울함이 없고, 크게 성공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는 듯하다. 그건 억울한 누명 가운데, 떠돌이의 외로운 여정 가운데, 거친 풍랑 가운데에서도 가능해 보인다. 이를 종합해 보건대, 하나님이 생각하는 형통이란, 그와 동행하는 삶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참 어려운 경지이다. 나는 오해와 조롱, 억울함 가운데에서 형통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아니, 과연 나라는 인간은 그런 형통을 바라고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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