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시절, 수강 신청에 대한 고민을 거의 하지 않았었다. 그 이유는 전공 필수과목만 선택해도 이미 선택지가 꽉 채워졌기 때문이다. 어쩌다보니 학부시절에 국어교육 전공, 심리학 이중전공, 역사교육 부전공 이렇게 3영역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세 개의 학과 모두 전공 이수 기준을 충족해야 하다 보니, 시간표는 나의 선호나 의지로 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들을 수 있는 수업을 들어야 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보니 국어교육 전공에서는 뜻하지 않게 전혀 관심이 없었던 문법 수업을 잔뜩 듣게 되었다. 그러던 중, 촘스키를 만나게 되었다.
그를 통해서 접하게 된 변형생성문법은 그야 말로 놀라움의 연속이었었다. 촘스키를 통해 문법에 관심을 지니게 되었지만, 촘스키는 문법학자라고 규정하기 어려울만큼, 훨씬 폭넓은 폭을 보이고 있었다. 촘스키의 삶에 관심을 지니게 되면서, 노력하는 천재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거대한 산 같은 존재인 촘스키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이 버트런드 러셀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천재가 존경했던 천재에 대한 관심으로 러셀의 저서들을 읽고자 했었다. 그러나 그가 쓴 책들의 목록을 점검하다가, 마음에 브레이크가 잡혔다.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방황을 하더라도, 기독교라는 정체성에서 떠날 수 없었던 내게 이 책은 제목부터가 너무도 아프게 찌르는 칼이었다. 그래서 너무도 궁금했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러셀만큼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에 여러 형태로 방황을 하고 있던 터인지라, 이 책을 읽고, 내가 신앙을 떠나게 될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치관에 대한 영역이 아닌, 지식에 대한 내용으로 우선 접근하자는 생각에 [서양철학사]를 읽었다. [서양철학사]를 읽으면서, 이러한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 젊은 날에는 수학 전공자였다는 사실에 놀랐다. 세상에는 진짜 천재들이 있었던 것이다. 망설이다가 [러셀 자서전]을 읽게 되었다. 90살이 넘은 노학자가 자신의 삶에 대해 서술하면서 적은 서문의 첫 구절은 그보다 한참이나 어린 나라는 인간의 심장도 때렸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촘스키가 자신의 연구실에 붙여 놓았다는 이 구절을 러셀 자서전 서문을 통해서 접하고 보니, 러셀에 대한 경계심이 한 번에 사라졌다. 이어지는 러셀의 자서전을 통해, 이 세가지 열정이 러셀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왔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정말로 멋진 어른이었다. 그리고 젊은이보다도 훨씬 더 열정적이었던 사람이었다.
하나. 사랑에 대한 갈망.. 러셀은 평생 격정적으로 사랑을 했다. 지적으로 똑똑한 사람이라고, 사랑 앞에서까지 통달한척하지 않았다. 일흔이 넘어 마지막 연인으로 만난 이디스에게 시를 써서 사랑을 고백한다. 이러한 뜨거움과 당당함이 너무도 멋있었다.
당신을 알아 인생의 환희와 평온을 찾았다오.
그리고 쉼을 얻었소.
둘. 지식에 대한 탐구욕.. 나는 돈이 많은 사람들에 대해 그다지 감흥이 없다. 젊은 날에 재테크에 열을 내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비웃음이 나왔다. 젊은 날에 돈을 모으기보다는 지식을 모으고 싶었고, 경험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용기가 없어서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을 해왔다. 그런데 러셀은 달랐다. 지식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에 자신의 온 삶을 기꺼이 바쳐왔다. 그 어떠한 권위도 부정한 채, 철저히 자신의 이상을 믿으며 책임있는 행동을 강조하며, 끝없이 의심하면서 끝까지 진리를 추구했다. 비록 이 과정에서 그는 기독교와 결별을 하게 되지만, 그가 권위를 부정하면서 끝까지 추구했던 그 철저함은 너무도 닮고 싶은 모습이었다.
셋.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한다. 그분이 그립다. 내가 그분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그분이 다른 이의 고통에 둔감하지 않는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러셀은 귀족 출신으로, 마음만 먹으면 인류의 고통에 신경쓰지 않고, 편히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가 일류의 고통에 참기 힘든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다.
러셀같은 대가의 삶은 참으로 어렵다. "두뇌가 명석할 땐, 수학을 했고, 약간 흐려졌을 땐 철학을 했고, 그도 저도 아닐 땐 사회운동을 했다"는 이 사람은 이 모든 영역에서 어영부영하지 않고, 온전히 전념을 다했다. 세상을 관조하면서 훈수두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 속에서 온전히 자신을 불살랐다. 그 뜨거운 인생이 책 넘어로도 느껴지는 듯 했다. 문제는 이런 대가의 삶을 감히 나같은 평범한 사람이 따라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내가 그의 발치를 쫓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그가 품었던 세 가지의 인생 동력을 함께 품으며, 따라가보고자 한다.
[러셀 자서선]에서..
* 사랑의 희열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 기쁨의 몇 시간을 위해서라면 여생을 모두 바쳐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왜 반짝이는지, 삼라만상의 이면에는 수의 원리가 있다가 말한 피타고라스의 말을 알고 싶었다.
* 부모가 가지는 감정은 대단히 복잡하다. 그 중에서도 으뜸은 자식에 대한 완전히 동물적인 감정과 귀여운 어린것이 청년으로 커가는 것을 지켜보는 기쁨이다. 그 다음으로는 피해갈 수 없는 의무감이 있는데, 그것은 회의주의자도 쉽사리 의문을 달지 못하는 일상생활의 목적을 제공해 준다. 다음에는 매우 위험스러운 이기적 감정이 있다. 즉 내가 실패한 분야에서 자식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 내가 죽거나 노쇠하여 더는 노력해 볼 수 없게 된 일을 자식들이 계속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여하튼, 나는 자식들을 통해 생물학적으로 죽음을 면했고, 따라서 나의 인생은 미래로 흘러들어 가지 못하는 정체된 물웅덩이로 덩그러니 남겨지는 게 아니라 전체 강물의 일부가 되어 흐를 것이라는 생각, 나는 이 모든 감정들을 경험했으며, 그로 인해 몇 년동안은 행복과 평화로 충만한 생활이 이어졌다.
* 나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비전을 좇아 살아왔다. 개인적으로는 고귀한 것, 아름다운 것, 온화한 것을 좋아했고, 더욱 세속화된 시대에 지혜를 줄 수 있는 통찰의 순간들을 두고자 했다. 사회적으로는 개인들이 거리낌 없이 성장하는 사회, 증오와 탐욕과 질시가 자랄 토양이 없어 죽어버린 사회의 탄생을 그렸다.
"나는 근소한 내 무게를 보태어 저울이 희망쪽으로 기울도록 최선을 다했으나, 거대한 힘들에 맞선 보잘것없는 노력이었다. 우리 세대가 못한 것들을 후세가 이어가기 바란다. "
* 자유주의자의 10계명 중에서
1.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지 마라.
4. 반대에 부딛힐 경우, 설사 반대자가 당신의 아내나 자식이라 하더라도 권위가 아닌 논쟁을 통해 극복하도록 노력하라. 권위에 의존한 승리는 비현실적이고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5. 다른 사람의 권위를 존중하지 마라. 그 반대의 권위들이 항상 발견되기 마련이니까.
7. 견해가 유별나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마라. 지금 인정하고 있는 모든 견해들이 한때는 유별나다는 취급을 받았으니까.
9. 비록 진실 때문에 불편할지라도 철저하게 진실을 추구하라.
10. 바보의 낙원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을 절대로 부러워하지 말라. 오직 바보만이 그것을 행복으로 생각할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