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TS Apr 25. 2024

13th. 인간의 굴레 -서머셋 몸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별로다. 무엇이 문제인가?

[나를 키운 팔할의 책]

# 13. 인간의 굴레 – 서머셋 몸


 의도치 않게 국어 선생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이과였다. 고등학교 때의 문이과라는 게 이제사 사실 별게 아님을 알지만, 당시에는 진로 진학의 방향을 결정하는 방향타 역할을 해서 나름 고민이 많았던 선택이었었다. 의사가 되기 위해 이과에 있었다가,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기말고사 시험기간 중에 문과로 옮기는 것을 결정했다. 이러한 변경의 이유는 글을 쓰면서 살고 싶다는 하나의 바람 때문이었는데, 그 결정을 한 2학년 겨울방학 중에 이 책에서 다음 구절을 만나게 되었다.


  “글을 쓰건 그림을 그리건 예술하는 사람이 먹고 사는 일을 자기 예술에만 의존한다면 그런 사람을 정말 가련하게 보네.”


  이 말이 계속해서 생각이 났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사는 다른 방책을 마련하자는 고민 중에, 국어선생이 되기 위한 학과를 선택했던 것이 27년 전의 일이었다. 물론 대학 입학 이후, 사춘기도 심하게 겪고, 진로에 대한 고민을 몇 번을 다시 하는 가운데, 국어 선생이라는 길에 들어서게 되었지만, 국어 선생이라는 방향의 시작점은 [인간의 굴레]를 읽으면서였던 것이다. 당시 내게는 교육적 철학 이런 것은 없었다. 그냥 먹고 사는 일이 무서워서, 선생이 되는 일을 택했던 것인데, 이러한 불순한 의도로 들어선 교사의 길이 12년 동안 이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내가 좋은 선생이었을까. 모르겠다.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를 너무도 인상적으로 읽었었다. [달과 6펜스]를 읽었던 당시에 나 또한 의사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었을 때여서, 의사 출신인 서머셋 모옴이 쓴 소설에 더욱 열광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서머셋 모옴이 쓴 다른 소설을 찾아 찾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그러나 1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겨울방학이 되어 읽었던 것이다. 이 소설은 [달과 6펜스] 만큼 수월하게 읽히지는 않는다. [달과 6펜스]는 소설적인 완성도로 봤을 때, 너무도 매끄럽게 만들어진 날렵한 스포츠카 느낌이라면, [인간의 굴레]는 훨씬 투박하고, 거칠고, 끈적거리는 느낌이었다. 읽으면서도 그다지 재밌지가 않았다. 주인공이 얼마나 답답한지, 속칭 말하는 암을 유발하는 캐릭터였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소설을 다 읽은 후에는 묘하게 생각이 많이 났다. 그 디테일한 서사 구조들은 산산히 사라져서, 뚜렷이 기억이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끈적거리는 느낌, 그 꿈틀거리던 느낌이 계속 떠올랐다. 그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마도 생명력같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인생이라는 게 이렇게 꿈틀거리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묘한 생각이 마음을 채우게 된다. 서머셋 모옴은 소설가가 된 뒤, 마음속에 오랜 세월 동안 갇혀 있던 기억들을 쏟아내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2년간에 걸쳐 [인간의 굴레]를 집필했다고 하는데, 그 치열함이 소설 한가득 담겨 있다.


 주인공의 이름은 “필립 케리”이다. 이 친구는 절뚝발이라는 장애를 지니고 있다. 이 때문에 많은 괴롭힘을 당하고, 슬프고 고독한 소년 시절을 보낸다. 내성적인 채로 다른 사람과의 교제를 피하며 항상 자기 마음을 억누른 채 지내야 했다. 그랬기에 그가 이후로 맺는 인간관계는 무언가 착취적이며,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들... 그는 진로에서도, 관계에서도 방황한다.


 이 소설은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는다. 주인공은 소설의 말미 어떠한 성공을 거두는 것도 아니고, 인생의 뚜렷한 방향을 발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많이 흔들렸던 그는, 그 흔들림 가운데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위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패배한 자신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결심한 그에게 삶은 계속된다. 그런데 자신이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것을 인정하고 패배를 받아들이며, 이어지는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필립의 모습이 나약하거나 초라하게 보이지 않고, 아주 멋지게 보였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별로다. 나도 그렇다. 무엇이 문제인가.  


 어느새, 나는 필립보다 나이를 더 많이 먹었다. 이제 웬만하면, 내게 영향을 끼쳤던 소설 속 인물들보다 나의 나이가 많아진 셈이다. 그런데도 나는 흔들린다. 나의 이 찌질함은 47년을 넘게 지속되었으며, 앞으로도 그다지 나이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바라기는 나의 여정도 필립처럼 제법 멋지게 미끌어지는 패배였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별로다. 나는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그래도 필립처럼 끈쩍끈쩍하게, 강인하게, 삶을 살아보리라.  



[인간의 굴레]에서...


  “세상에 가장 굴욕스러운 일은 말이지, 먹고 사는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일이야. 난 돈을 멸시하는 사람들을 보면 경멸감밖에 들지 않네. 그런 자들은 위선자가 아니면 바보야. 돈이란 육감과 같아. 그게 없으면 다른 오감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지. 적정한 수입이 없으면 인생의 가능성 가운데 절반은 막혀버리네. 예술가에겐 가난이 제일 좋은 채찍이 된다는 말들을 하잖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가난의 쓰라림을 직접 겪어보지 못해서 그래. 가난이 사람을 얼마나 천하게 만드는지 몰라. 사람을 끝없이 비굴하게 만드네. 사람의 날개를 꺽어버리고 암처럼 사람의 영혼을 좀 먹어 들어가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 방해받지 않고 일 할 수 있고, 너그럽고 솔직할 수 있을 정도, 그리고 독립적으로 살 수 있을 정도는 있었야지. 나는 말이야, 글을 쓰건 그림을 그리건 예술하는 사람이 먹고 사는 일을 자기 예술에만 의존한다면 그런 사람을 정말 가련하게 보네.”


* 양탄자를 짜는 사람은 어떤 목적에 구애됨이 없이 오직 심미적인 기쁨만을 위해 무늬를 짠다. 삶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그 의미의 굴레에 예속되고 만다. 살면서 만나는 행복이나 고통은 모두 삶의 다른 세부적인 사건들과 함께 디자인을 정교하게 만들어줄 뿐이다.


* 사람은 고집대로 하고 나면 언제나 나중에 후회하게 되는 것일까.


* 사람은 자기 시대가 믿는 것을 믿는다는 말이지.


* 경험을 쌓고 싶습니다. 사는 준비만 하는 데 이제 지쳤어요. 이제 진짜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 인생을 살 만하게 해주는 것은 세상에 두 가지뿐인세. 예술과 사랑이지. 난 자네가 사무실에 앉아 장부 따위나 들여다보고 있는 걸 상상할 수 없네. 실크햇을 쓰고 우산과 조그만 검정 가방을 들고 나니나? 난 말일세, 우리는 인생을 하나의 모험으로 생각해야 하며, 단단한 보석 같은 불길로 타올라야 한다, 그리고 위험을 무릅써야 하며, 더 나아가 위험 앞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네.


* 인생의 가치란 위험을 무릅쓴다는 데 있지 않겠어.


* 천재란 무한히 노력할 수 있는 능력, 바로 그거예요. 열심히 하는 것, 그것 말곤 없어요, 무슨 일이든, 일단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 그거죠.


* 인생이란 쓰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있는 것이니까. 내 목표는 인생의 다양한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네. 삶의 순간순간에서 그 순간의 정서를 음미하면서 말야. 난 내 글쓰기를 말이지, 존재로부터 기쁨을 흡수한다기보다 거기에 기쁨을 부여하는 아름다운 행위라고 보네.


* 세상을 살 말한 장소로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도 우선 필요한 일은 인간의 불가피한 이기성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모든 개인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자신을 위한다는 사실을 자네가 받아들여야 자넨 다른 사람들에게 덜 요구할 수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덜 실망할 거고, 다른 사람들을 더 자비롭게 바라볼 수 있어. 사람은 인생에서 단 한 가지를 추구하지. 그건 자기 자신의 쾌락이야.  


* 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지만 어떤 신비한 힘이 그의 안에 있어 어둠 속에서 출구를 찾아 나오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힘이 상대방에게 감명을 주었다.


* 필립에게는, 인생이란 그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살아야 할 대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삶의 다양한 체험을 추구하고, 삶의 매 순간이 주는 모든 감동을 향유하고 싶었다.


* 중요한 것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를 발견하는 일이며, 그러고 나면 철학 체계는 저절로 형성되어 나왔던 것이다. 필립에게는 알아내야 할 것이 세 가지라고 여겨졌다. 사람과 그가 몸담고 사는 세계와의 관계, 사람과 그가 함께 어울려 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사람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그것이었다.


* 필립이 분명하게 들은 말은, 불신자는 사악하고 부도덕한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위크스는 필립이 믿는 것을 아무것도 믿지 않으면서도 기독교인처럼 순결하게 살고 있었다. 여태껏 친절이라는 것을 거의 받아보지 못하고 살아온 필립은 늘 그를 도와주고 싶어 하는 이 미국인의 마음에 감명을 받았다. 한 번은 감기에 걸려 사흘 간이나 일어나지 못했는데, 위크스가 어머니처럼 극진히 간호해주었다. 그는 부도덕하거나 사악하기는커녕 성실하고 자애롭기만 했다. 불신자이면서 유덕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가능한 일이었다.


* 필립은 인생의 나그네가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그전에 메마르고 험준한 세상을 얼마나 넓게 돌아다녀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젊음이 행복하다는 것은 환상이며, 그것은 젊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환상이다.


* 지금까지 그는 조롱과 멸시를 엄청나게 받아왔지만, 그 조롱과 멸시는 그의 정신을 안으로 향하게 했고, 영원히 그 향기를 잃지 않을 정신의 꽃들을 피워냈다고 할 수 있다. 그 순간 그는,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오히려 드문 일임을 깨달았다.


* 모퉁이 저편에 결찰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되,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르라.


* 사람이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되어먹은 대로 생각하는 거 같기만 하다. 진리란 사상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저마다 철학자이며, 과거의 위대한 인물들이 세워놓은 정교한 사상체계라는 것도 그것을 쓴 본인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 내가 그동안 겪어본 바로는요,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은 생각만큼 없어요. 다 소설가들이 지어내는 이야기죠. 자살은 주로 돈 때문에 해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전 13화 12th. 러셀 자서전 - 버트런드 러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