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How long? 3

카운트다운

by 도라지

가을 숲은 조용하다. 차도와 조금 떨어진 숲 속은 아무도 없는 세상이다. 현진의 몸과 붙어있던 재영이 급하게 생각을 해본다. 차 안에 콘돔이 없다. 짐가방 속에 은밀하게 챙겨둔 것을, 펜션에 놓고 나왔다. 와이프가 아이 둘을 낳고 자궁 수술을 했다. 그래서 재영이 따로 수술할 필요가 없었다. 와이프 모르게 진작 수술이라도 해둘 걸 바보 같았다. 현진의 입술에 키스하는 것으로 여기선 끝내야 한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물건도 금세 가라앉았다.


현진은 재영이 눈앞에 있는데도, 재영과의 첫 키스가 떠올랐다. 현진과 재영은 대학 1학년 탈춤 동아리에서 만났다. 3월 봄이었다. 국문과 복학생 선배 중에 아래위로 한복을 입고 다니는 남자 선배가 한 명 있었다. 그 선배가 탈춤 동아리라는 걸 알고, 현진은 거기에 가입 신청서를 냈었다.


재영은 신문방송학과였다. 그 시절 지금처럼 다양한 댄스 동아리가 있었다면, 재영은 탈춤반 같은 데는 들어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유일한 춤 동아리가 탈춤반이었다. 자위도 지긋지긋하고 몸은 풀고 싶은데 댄스 동아리마저 없단다. 하는 수 없이 탈춤반이라도 들어갔다.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에서 현진을 처음 보았다. 현진은 키가 크고 말랐지만 건강하고 강단 있어 보였다. 학기말이 끝나고 6월 말에 동아리 엠티 갔을 때, 달빛 아래에서 현진과 어설픈 첫 키스를 했었다.


현진이 재영과의 첫 키스를 떠올려 보는데도, 오히려 지금이 더 떨리고 긴장되었다. 그때도 지금도 현진에게 키스는 어려운 일이었다. 현진이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재영의 혀가 잠시 그녀의 입 속으로 들어오는가 싶었을 때, 재영의 묵직했던 아래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현진은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그때 재영이 장난치듯이 두 개의 손가락으로 현진의 감긴 눈을 열며 말했다.


"나 수술 안 했어. 지금 콘돔도 없고."


현진은 그제야 자기가 재영의 성욕을 감소시킨 게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애들 기다리겠다~ 빨리 고기 사서 들어가자."


재영이 현진의 몸 위에서 제 몸을 일으키며 따뜻한 눈빛으로 말했다. 재영은 오랜만에 만난 현진에게서 단지 성욕만 충족시킬 의도는 없었다. 다만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콘돔은 준비해왔을 뿐이다. 서울 가면 다음 달에라도 상황 봐서 수술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해본다. 수술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많이 아플까 순식간에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와이프가 모르게 하려면, 아파도 참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차라리 부모님 계시는 대전에 내려가서, 금토일 아이들과 와이프를 피해 있는 편이 나을 것도 같았다.


재영은 현진과 잔 적은 없었다. 이십 대 때 왜 현진과 잠자리를 하지 않았던 건지, 살면서 줄곧 궁금했었다. 지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현진과 꼭 섹스를 해봐야겠다. 더 늦으면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할 것 같았다. 인간은 모두가 늙는다.


유지은은 간단하게 먹은 점심 라면 뒷정리를 야무지게 한다. 그걸 서동우가 유심히 바라본다. 아직 미혼인 서동우는 여자에게 얽매이는 게 싫었다. 동우는 사회학과였다. 탈춤 같은 건 촌놈들이나 하는 거라며, 동우는 나이트를 열심히 다녔다. 사회학과를 졸업한 동우가 신문사에 근무하다가, 세무사가 되겠다며 재영이를 찾아갔던 게 십 년 전이다. 삼 년 동안 재영이가 동우 뒷바라지를 한 셈이다. 동우가 삼 년 만에 세무사 시험에 합격했다.


세무사가 된 이후로, 동우는 여자들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결혼하겠다고 덤벼드는 여자들은 열 트럭도 넘는데, 그중에 쓸만한 여자는 하나도 없었다.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세무사가 됐는데, 아무 여자와 결혼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젊은 여자와 결혼하는 건 당연하다. 동우의 성욕을 앞으로도 이십 년은 채워주어야 하고 아이가 생기면 길러야 하니까, 동우의 상대로는 33세 이하 정도면 적당할 것 같았다.


지금 만나고 있는 한선영이 서른셋이다. 직업도 약사고 나쁘지 않다. 그런데도 동우는 망설이고 있다. 선영도 동우를 휘감을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늘 부족한 무언가가 있었다. 동우는 아리송한 상태에서 현재 선영과 결혼을 전제로 연애 중이다.


유지은은 서동우가 마음에 든다, 아니 서동우의 직업이 마음에 들었다. 외모도 지은의 남편보다야 동우가 훨씬 낫다. 이십 대에는 "남자 상품"에 대해서 잘 몰랐다. 학원 선생을 하며 겪어본 세상에서는 남자 상품을 고르는 것에 대해 크게 배울 기회가 없었다. 지금 남편의 직업이 은행원이라고 고모가 적극 추천하는 통에, 엮이듯 결혼했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깨달았다.


고모가 말했던 것만큼 남편은, 남편으로서도 남자로서도 상품 가치가 없었다. 그래서 유지은은 아기를 갖지 않았다. 언제든 지은의 허기진 욕망을 채워줄 남자만 나타나면, 미련 없이 이혼할 준비가 되어있다. 지은이 그렇게 독한 여자일 줄은 친구들도 가족들도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드디어 서동우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지난여름에 현진의 첫사랑 재영이 서울에서 내려왔을 때, 현진은 자랑스럽게 친구들을 불렀다. 재영은 듣던 대로 따뜻하고 재밌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은은 재영이가 부른 서동우를 보고서, 마음을 굳혔다. 저 남자의 아내가 되겠다 라고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현진이를 구슬려서 가평까지 온 것도, 유지은의 계략이었다. 순진한 현진은 재영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지은의 여행 기획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시간이 얼마 없다, 유지은은 자기의 강점과 상품가치를 서동우에게 최대한 어필해놓아야 한다. 유지은은 아무도 모르게, 총성 없는 전쟁터에서 격전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유지은의 작전은 "여자 상품성"이 아니다. 성적 매력으로 어필해보았자, 이삼십 대 애들과 게임이 안된다는 걸 지은도 잘 안다. 혼자 지내고 있는 서동우에게, 엄마나 누나처럼 보살펴주는 "아내 상품성"으로 우선 마음을 열어놓는 작전이다. 그녀에게 서동우가 호감을 갖게 만들어 놓은 뒤엔, 대전에 돌아가서 얼마든지 서동우를 일대일로 만날 구실은 충분하다. 지은의 입시학원 세무 일을 의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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