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에 대한 생각 5

by 도라지

석 달 전쯤이었다. 아파트 게시판과 벽에는 <제2기 입주자대표회의 동대표 선거>에 대한 안내문과 현수막이 걸리기 시작했다. 두 해 전 1기 입주자대표회의 선거 때 다른 동의 선거구에는 많아야 2명 혹은 1명, 아예 출마도 하지 않은 선거구도 있었던 반면에 우리 선거구에서는 4명이 출마를 해서 신상을 공개하고 정책적인 포부를 밝혔다. 결국 가장 치열했던 4: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하게 당선된 동대표는 오직 나 혼자뿐이었고 여성 동대표 역시 나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입주자대표회의가 구성되고 두 달쯤 지나갈 무렵 독단적인 회장의 처사에 반기를 드는 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반란 세력 두 명중 한 명이 나와 같은 감사직을 수행하고 있던 터라서, 반란군 두 명은 나를 선봉에 세워 회장을 몰아낼 계략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회장의 독선적인 성격은 조직 내에 분열을 초래하기에 충분한 핑곗거리는 될지언정 내규에 어긋나는 위법적 행위가 없었기에, 나는 반란군의 편에 서서 동조하거나 선봉에 설 이유를 찾지 못했다.


몇몇 입주민들 사이에 감사 아줌마가 업무 능력이 뛰어날 뿐더러 매우 열정적이라는 평이 나돌고 있을 무렵, 입주민들의 평가를 민감하게 관찰하고 있던 회장이 어느 날인가부터 나를 은근히 견제하기 시작했다. 반란의 조짐을 눈치챈 것인지 아니면 입주민들이 감사 아줌마를 훌륭하다고 평가해주는 것이 못마땅했던 건지, 회장의 나에 대한 핍박은 수위를 지나치고 있었다.


입주자대표회의 조직 내부의 분열을 어떻게든 막으려면, 반란자들이 선봉장으로 내세우려는 내가 사퇴하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회장의 비겁한 처사도 눈꼴이 시던 차에 나에 대한 핍박까지 참아가며 동대표 임무에 헌신할 명분이 없어 보였다. 조직의 화합을 위해 차라리 내가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두루 평화로울 거 같다고 판단해서, 결국 나는 반년도 못되어 자진사퇴를 했었다.


그리고 이년이 흐른 뒤 벽에 걸린 <제2기 동대표 선거꽃이 피었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보는데, 문득 그 반란 세력들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선거에 출마한 사람들은 1기 때와 하나도 다를 바 없이 똑같은 멤버들이었다. 저들이 사이가 좋아져서 다시 연임하기로 한 것인지, 아니면 회장의 독주에 맞서기 위하여 다시 출마를 한 것인지 그들의 속내가 몹시도 궁금했다.


동대표 선거가 끝나고 며칠 뒤 임원 선거가 다시 올라왔다. 회장에 출마한 사람은 두 사람, 감사에 출마한 사람도 두 사람이었다. 1기 때 내가 감사직을 사퇴한 뒤 반란세력 중 한 명이 그 자리를 수행하게 되면서 반란군 두 명이 모두 감사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이번엔 회장 선거에 출마하여 전임 회장과 나란히 어깨를 겨루게 된 것이다. 판이 더욱 재밌어지고 있었다.


아파트 어플에는 회장에 출마한 반란군이 선거관리규정을 위반했다는 공고문이 올라오고, 판이 궁금했던 입주민들은 공고문을 더욱 샅샅이 살펴보며 읽었다. 선거운동 중 개인 홍보물을 선거관리위원회 승인을 받지 않고 홍보했다는 이유였다. 사실 1기 선거 때도 선거관리규정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동대표가 당선된 경우도 있었다. 전임 회장은 그걸 알면서도 눈감아준 적이 있었는데 그의 라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회장의 정적이 선거관리규정을 위반한 것이었고, 선거 후보자 홍보 기간 중에 전임 회장은 그걸 놓치지 않고 만천하에 공개해서 널리 알려야만 했다.


전임 회장의 온갖 전략에도 불구하고 결국 반란군 1인이 2기 회장에 당선되었다. 사태가 역전된 후 전임 회장은 다른 것을 걸고 넘어지며 또 꼬투리를 잡았으나, 당선된 새 회장은 관리규정상 어긋날 게 없었다.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새 역사가 쓰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현재 회장에 당선된 전임 감사라고 하여 순백의 눈같이 깨끗할 것인가 짚어본다면, 내가 겪어본 그 역시도 업무 추진에 있어서 미흡하거나 적절치 않았던 부분들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당당하게 내 한 표를 새 회장에게 행사했다. 리더에게 독선적인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는 것을 전임 회장을 통해서 깨우쳤기 때문이었다.


독선에도 종류와 양태는 여럿 있을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위협적이고 저급한 독선은, 스스로가 얼마나 저열한 인간인지 모르면서 천하 일인자인 줄 아는 독선이다. 딱 미스터 전과 미스터 윤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 같다.


석 달 만에 조우한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거리 교차로 신호 앞에서 대기 중인데, 신호등 아래 전신주 옆으로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 여사의 명복을 빕니다. 00000당 국회의원 000>라고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펄럭였다. 독선의 아이콘, 희대의 악마 독재자 미스터 전이 통치하던 1987년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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