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작가

by 도라지

어제 낮에는 단골로 드나드는 총각 사장님 카페에서 여고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또 다른 친구들과 친구 B의 남편이 운영하는 음식점에 가서 고량주를 곁들인 식사를 했다. 카페 총각 사장님은 나에게 "형님"과 "누님"이라는 호칭을 번갈아 쓰는데, 나는 묘하게도 "형님"이라는 호칭이 더 마음에 들기도 한다.


카페의 주종목이 beverages라서 곁들여 파는 식사류의 종류는 많지가 않지만, 나는 십 년이 넘게 단골손님이라는 이유로 내가 좋아하는 와인도 가져다 놓고 마신 적도 있고 그가 개인적으로 먹는 술을 얻어마신 적도 있다. 어제 점심에는 친구들과 돈가스를 먹고 있는데, 복분자에 사이다를 혼합하여 제조한 일종의 복분자 칵테일을 그가 서비스로 내주었다. 다들 차를 가지고 왔던 터라, 모두들 입술만 축이는 정도로 복분자 칵테일의 맛을 보았다.


점심 후 집에 돌아와 어제 점심 먹다가 생각났던 입주자대표회의 선거 이야기를 대충 급하게 써서 브런치에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 5>라는 제목으로 올려놓고, 친구 B의 차를 얻어 타고 저녁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친구들이 아직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아서 잠시 기다리면서 휴대폰을 열어 오타가 있나 검사하고 있을 때였다. 친구 A가 들어오며 내게 물었다.


"뭐해?"

"응, 잠깐만, 여기로 오기 전에 브런치에 글 하나 올리고 나왔는데 오타 검사를 안 해서 체크 중~ 금방 끝나."

"너 그게 보이니?"

크지도 않은 휴대폰에 작은 글씨로 적혀있는 것을 수정하고 있는 나를 보며 친구가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응, 나 휴대폰으로 글 쓰잖아~"

"뭐? 휴대폰으로 글을 쓴다고?"

"응, 가족들 아무도 모르게 글 쓰려니까 휴대폰이 작업하기가 편해서. 금방 쓰고 딴짓하는 것처럼 하면, 아무도 내가 글 쓰는 줄 모르더라."


속속 도착한 친구들이 하나같이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녀들이 왜 신기한 표정을 짓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 휴대폰 글씨가 보인다는 게 일단 놀라운 거고, 태블릿이나 노트북도 아니고 휴대폰으로 글을 써서 올린다는 게 이차로 더 놀랍다~"


나는 휴대폰 글씨가 보이고, 휴대폰으로 브런치 글쓰기란에 직접 글을 써서 즉시 올리는 게 놀라운 일인 건가 싶었다. 젊을 적에는 하나도 놀라울 게 없는 일을, 갱년기 여성 친구들은 놀랍고 신기한 일로 간주하고 있었다.


친구 B의 남편은 친구 B가 큰 병을 앓을 적에 별 탈 없이 잘 굴러가던 사업도 접고 24시간 365일 친구 옆에서 간병을 했다. 친구는 남편의 극진한 보살핌 덕에 꿋꿋이 살아남아서 기적처럼 건강을 회복했고, 친구 B의 남편은 기존에 일해왔던 영역과는 다른 사업 분야의 음식점을 개업했다. 코로나로 음식점과 상가들이 심각하게 타격을 입고 있듯이 여기도 사정은 크게 다를 바 없지만, 홀 손님보다 배달 주문이 늘어서 그나마 유지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낮에 복분자 칵테일 맛을 보고 난 뒤라서, 나는 고량주에 사이다를 섞어 마실 것을 친구들에게 제안했다. 친구 B의 남편은 우리가 안주를 2개 주문하면 서비스로 안주를 3개 더 만들어주곤 한다. 고량주 칵테일에 중국식 안주 다섯 접시를 해치우고 있을 때, 친구 B의 남편이 보이차를 내왔다. 따로 격식을 차려 티포트와 세라믹 잔을 준비하진 않았지만 차맛은 일품일 게 분명했다.


"야, 네가 따르지 마, 나는 00 씨가 따라주는 차를 마시련다~"


주로 알바생이 왔다 갔다 하는 복도랑 접해 있는 테이블의 끝에 앉아있던 친구 A에게 내가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테이블 옆으로 보이차를 끓여다 준 친구 B의 남편이 서있다가, 간곡한 나의 청을 들어주듯이 차를 네 잔 크게 따라주었다. 어제 테이블에 앉아있던 우리는 합이 네 명이었다.


집에서 남편한테 그 흔한 믹스커피 한 잔 대접받아본 적 없는 나는, 바깥에서 웬만하면 남자가 해 주는 음식과 서비스를 받기를 좋아한다. 여자 친구들만 있을 때면 하는 수 없이 자급자족 구조로 간다지만, 버젓이 멋있는 남자분이 계신데 구태여 여자 친구의 손을 빌리고 싶지 않아서다.


그런데 내쪽으로 종이컵을 건네던 친구 B 남편의 손이 허공에서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종이컵의 방향을 바꾸어 그의 와이프 쪽으로 건넨다. 이미 친구 B는 보이차가 담긴 종이컵을 하나 받아 두었던 참이었다. 종이컵에 미리 이름이라도 적어 놓은 것처럼, 친구 남편이 손에 든 종이컵을 그의 와이프에게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이게 당신 거야~"

"나 여기 한잔 받았는데~"

"아냐, 그건 00 씨 줘~"


친구 B가 일분 전에 받아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종이컵을 내게 건네고, 남편이 건네주는 종이컵을 새로 받아 들었다. 네 개의 종이컵이 각자 주인을 찾아서 배분되고 친구의 남편은 홀연히 자리를 떠나 주방으로 돌아갔다. 네 개의 종이컵을 찬찬히 바라보던 내가 큰 소리로 말했다.


"뭐야~ A 니 컵에는 <누나, 잘 지내나요?>라고 쓰여있어, 그러니까 너는 00씨한테 누나 같은 존재다 이거야. 내 컵에는 <우리는 가족이니까>라고 적혀 있다~ 가족끼리는 남자 여자 그러는 거 아니니까 00씨를 아예 남자로 넘보지 말라고 나한테 경고하신 거네, 큭큭.. C 니 컵 봐봐, 여기에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요.>라고 적혀 있어. 얘들아, B 얘 컵에는 아무 말도 없고 남자와 여자 둘이 뽀뽀하고 하트 표시만 여러 개 날아다녀~ 종이컵에 담긴 의미가 있어서 각자한테 맞는 종이컵을 건네신 게로군."


우리는 종이컵 하나씩 받아 들고, 친구 B의 남편의 반짝이는 센스와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마치 신년운수 점괘라도 받은 것처럼 마음으로 새기며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저녁 아홉 시가 가까워 오자, 인심 좋은 사장님이 테이블을 돌며 손님들에게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일일이 건네고 있었다.


여자 넷은 별빛이 총총한 검은 밤길로 걸어 나오며, 친구 B와 그녀의 남편이 새해에도 건강하기를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기원했다. 우리에게 언제나 먹을 것을 주는 분이 귀한 분임을 너무 잘 아는 까닭이다. 나는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으나, 새해에는 휴대폰으로 몰래 글 쓰는 일에서 벗어나 가족들 앞에서 노트북을 당당하게 펴놓고 글을 쓸 수 있기를 더불어 바래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