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뭐 하시나? 안 바쁘신가?"
남편의 말이 뒤에서 반 존칭으로 끝나며 물음표로 올라갈 때는 내게 부탁할 일이 있다는 뜻이다.
"집이쥬, 왜유?"
"청양에 장례식장 같이 갈랴?"
남편이 청주에서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청양에 장례식장 갈 일이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검은색 옷으로 갈아입고 남편을 따라나섰다.
한 동네에서 이웃해 살면서 퇴근 후 남편과 매일 만나 부모산에 함께 올라가는 짝꿍이 된 형님은, 처가에 아들이 없어서 상주의 명찰을 달고 있었다.
어두운 저녁 등산을 마치고 남편과 내려오다가 우연히 그 형님과 한번 스치며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지만, 밤길이라 어두워서 서로 얼굴을 잘 보지 못했었다. 그러니까 나는 어제 장례식장에서 동네 형님의 얼굴을 처음으로 자세하게 본 것이다.
"어떻게 먼 길을 함께 오셨어요~ 밤길 운전이 걱정돼서 따라오셨군요."
형님은 동네 동생이 마누라까지 대동하고 청양까지 온 수고를 그렇게 치하하는 것 같았다.
"실은 제가 장례식장 밥을 좋아해요~"
입고 간 코트를 조용히 식탁 의자 위에 걸쳐놓으며 검은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의자에 앉은 여자가 말했다. 품위가 아주 없어 보이지도 않는 중년의 여자가 긴 머리를 뒤로 묶고 점잖게 앉아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체면치레도 없이 장례식장에서 주는 밥을 먹으러 왔다고 고백했다. 가끔 이렇게 주책맞은 여자의 남편이 옆에서 거들며 말했다.
"장례식장에만 오면 밥을 두 그릇씩 먹고 가요~"
장례식장 밥값을 누가 내는 건지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고 밥과 국을 두 그릇씩 먹고 가는 마누라를 둔 남편은, 두 그릇씩 먹는 마누라의 먹성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남편은 결혼식장이나 어디 오픈 파티에도 마누라를 대동하고 다니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그 남자의 마누라가 제일 좋아하는 밥은 장례식장 밥이다. 그것도 시골 장례식장 밥을 더 좋아한다.
내로라하는 대형 도시의 큰 병원 장례식장에서 제공하는 음식보다 읍면 단위의 작은 마을 장례식장에서 나오는 밥과 국이 더 맛있는 이유가 그 여자는 때로는 몹시 궁금하기도 하다. 그날 그 여자의 생체리듬에 기인한 탓일지 아니면 정말로 작은 소재지에 있는 납품업체일수록 좋은 식자재와 양심적인 솜씨로 조화를 부리는 건지는 알 수가 없다.
여자는 장례식장에서 밥을 먹으며 자신의 장례식장의 풍경을 상상해본다. 나의 장례식장에 오는 손님들은 어떤 밥을 먹고 가게 되려나? 되도록이면 맛있는 밥과 국을 먹고 가면 좋겠는데, 그것도 다 업체 인연을 잘 만나야 가능한 일일 것 같다. 그 사이 장례 문화가 바뀌어 지금처럼 사람들이 모여서 밥과 술을 먹으며 앉아있는 시대가 아닐 수도 있으니, 행여나 공연한 상상이나 짐작 같은 건 아예 하지 말기로 한다.
이제 얼마 후면 내가 상주가 되어 장례식장에서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며칠 전에 조현병을 앓고 있는 언니들 앞에서 우리 부모님도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말을 했더니, 아직 마음이 어린애 같기만 한 언니들이 펄쩍 뛰며 부모님의 마지막을 마냥 거부하기만 한다.
가난하고 병든 빈민들처럼 생을 연명하며 삶을 유지하고 있는 친정집을 다녀올 때마다 깊은 한숨이 울음처럼 토해진다. 그런 날이면 내 삶의 고유한 빛깔마저 잃어버리게 되고, 마치 컴컴한 어둠 속을 끝도 없이 헤매며 두려움에 사로잡힌 무력한 존재가 되어버리곤 했다.
그렇게 어둠 속을 헤매다가 어느 날 나는 바뀌었다. 내 앞에는 네 번의 장례식을 치러야 할 의무가 남아있는 것이다. 그것도 다 내가 살아있다는 전제가 붙어야만 가능한 일들이겠지만, 이 모든 집안의 고통을 오빠와 나의 당대에서 끊어야 하는 막중한 책무가 우리에겐 있다. 그 책무를 다 하고 난 뒤, 나도 웃으며 이 세상을 떠나갈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2014년에 개봉한 영화 <노아>에서 러셀 크로우가 연기했던 노아는, 이 세상에 사악한 죄를 퍼뜨린 인간들을 벌하는 하느님의 분노를 그의 방식대로 이해하며, 지구 상에 더 이상 인간의 씨앗이 뿌려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비통한 사명감을 수행하고자 그의 큰며느리가 낳은 쌍둥이 손녀딸들마저 죽이려고 한다. 결국 손녀딸들을 죽이지 못한 노아를 태운 방주는 비가 멈추고 새로운 땅에 닿아 결과적으로 인류의 존속에 기여하게 되지만, 영화에서 표현된 방주는 기존의 "노아의 방주"에 대한 해석과는 많이 다른 부분이 있었다.
영화 <노아>에서 노아가 그의 아들에게 "장례"에 관해 말하는 부분이 있다. 순차적으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가정 하에 노아와 노아 아내의 장례는 큰아들이, 큰아들과 아내의 장례는 둘째 아들이, 둘째의 장례는 셋째 아들이 치르고 난 뒤 마지막으로 셋째 아들 역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지구 상에 더 이상 인간의 존재는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나는 그날 영화를 보면서, 장례의 의미를 참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노아의 방주와 상황은 다르지만, 나는 노아가 혼자서 계획했던 모든 장례의 마지막 상주인 막내아들의 심정으로 내 삶을 살아간다.
장례식장에 앉아 올갱이 아욱국 두 그릇을 비우고 귤로 입가심을 하며, 여자는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먹고 그녀의 삶을 스스로 이끌어야 할 충분한 이유를 다시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