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숲

by 도라지

오후 다섯 시, 벌써 해가 길어진 느낌이다. 달력을 보니 내일이 정월 대보름이다. 지난주에 남편과 산행을 하면서도 길어진 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정월 대보름이 가까워지면 해가 서쪽 하늘에 머무는 시간이 조금 길어진다고 내가 어른처럼 말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정월 대보름이 되면 슬슬 농사일을 시작할 준비를 하는 거라고도 했다. 농사일에 문외한인 나지만 정월 대보름이 농경 사회에서 갖는 의미가 그러할 거라고 짐작이 가는 것은, 나도 이 땅에서 반백년을 넘게 살아낸 까닭이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어설프게 읊어대는 마누라 꼴을 보고도 시골 출신 남편이 어쩐 일로 면박을 주지 않았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우리 집 남편도 사람이 참 좋은 사람이다. 언젠가 그 사람도 자기 마누라가 브런치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라서, 그의 마누라가 미리 떡밥을 뿌리는 건 결코 아니다.


오늘은 식구들이 밖에서 다들 저녁을 먹고 온다고 했다. 해는 길어졌지만, 곧 비가 내릴 것처럼 하늘이 울상을 짓고 있었다. 도로 집에 들어가서 접는 우산 한 개를 들고 아파트 뒤에 바로 붙어있는 부모산을 향했다. 저녁밥을 안칠 시간이라서 그런지 산에서 내려가는 여자들의 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그 시간에 천천히 산을 오르고 있자니, 공연히 내가 시간을 선물 받은 기분이 들었다. 남들은 직장에서 아직 퇴근 전이기도 한 월요일 오후 다섯 시라는 시간이 주는 고요한 평화가, 산 중턱에 있는 집에서 나는 나무 타는 냄새와 함께 내 마음을 간질거렸다.


작은 아들 의경 시절에 입었던 회색 후리스점퍼를 겨울철 등산복으로 입고 다니는 나를 보고, "착한 우리 집 남편"과 작은 아들이 한 마디씩 거들며 핀잔을 주었었다. 그래서 남편과 작은 아들이 보는 앞에서는 그 점퍼를 입고 집 밖을 나서지 않게 되었다. "점퍼가 다 똑같지~"라고 말은 하면서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데 시골 어머니가 따로 없긴 했었다.


오늘은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편안히 그 점퍼를 입고 당당하게 집 밖으로 나왔다. 후리스점퍼라고는 해도 사이즈가 너무 커서 어벙벙해 보이는 잠바를 입고 한 시간을 넘게 부모산을 싸돌아다니며 김연자의 '수은등'을 흥얼거렸다. 그 점퍼를 입고 성시경의 발라드를 흥얼거리는 것은 왠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어둠이 내려앉고 있는 겨울철 저녁 여섯 시의 숲길을 혼자 걸어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의 모습에 지레 움츠러든 나는, 아들의 후리스 점퍼 안에 둥그렇게 말려있던 어깨를 활짝 펴고 듬직한 사내처럼 큼직하게 걸음을 재촉했다.


모처럼 저녁 산책을 나왔으니 산에서 내려와서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동네를 한 바퀴 더 어슬렁거렸다. 일곱 시가 될 무렵 캄캄해진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을 펼치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오늘 저녁 산책길이 참 행복하다고 느껴졌다.


철학 강사로 출강하고 있는 고등학교에선 올해 철학 수업과 별개로 심리학 수업까지 해달라고 요청이 왔으나, 김연자의 수은등을 따라 부르는 늙은 아줌마는 심리학 수업은 정중히 거절했다. 내가 전공한 적이 없는 심리학까지 새롭게 공부해가며 학생들에게 전달할 자신이 없는 까닭이었다.


음력 기준으로 한 해가 물러간 자리에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어 내일이면 첫 보름달이 뜬다지만, 어둠이 내려앉는 저녁 숲이 무서운 늙은 아줌마는 이제 새로운 시도를 하는 일이 조금씩 두려워지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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