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피아노와 옷방

by 도라지

올해 2월에 대학을 졸업한 큰아들은 간호사란 전공 때문에 졸업도 전에 출근을 시작했다. 1월에 국가고시를 치르고 나서 합격자 발표가 나기까지 약 보름을 기다리는 동안, 남편과 나는 별의별 경우의 수까지 다 생각했었다. 그 녀석을 키우는 이십오 년 동안 공부하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는 까닭이다.


이번 국가고시를 앞두고 난생 처음으로 녀석이 공부란 걸 하는 모습을 본 것도 한 달 남짓이 될 뿐이다. 남들 다 붙는다는 간호사 국가고시지만, 해마다 몇 프로의 불합격자가 발생한다는 것을 아들보다 우리가 더 상세히 알고 있었던 것도, 우리 집 자식이 거기에 해당되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랬으니 아들의 합격 소식을 듣던 날, 우리 집은 얼마나 잔칫집 분위기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밖에서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남편이 크게 기뻐하자, 맞은편 자리에 앉아있던 지인이 '아드님이 시험에 합격하셨나 보다'라며 축하인사를 건네 왔다고 한다.


남편이 '우리 아들이 간호사 국가고시에 합격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자, 지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커피잔으로 시선을 떨구더란다.

아마도 지인은 의사나 약사 국가고시, 행정고시나 임용고시 정도를 예상했던 모양이다.


어려서부터 음악과 미술 등에 약간의 소질이 보였던 큰아들이, 어제는 전자피아노를 주문했다고 통보해온다. 내가 중학생 때 아버지 따라나가서 장만했던 피아노를 아들들이 치다가, 이 집으로 이사 오면서 처분을 했다.


큰아들은 벌써부터 전자피아노를 사달라고 요청했으나, 나는 아들의 요청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지난번 집과 같은 평형 아파트라 해도 이 집이 실평수가 적어서 공간이 부족했던 탓이다.


그러다 녀석이 월급을 받게 되니 제가 번 돈으로 전자기타를 우선 샀다. 그리고 이젠 전자피아노를 들여놓겠다는 것이다. 34평형 아파트에 방이 4개짜리로 지어진 아파트라서 방마다 사이즈가 작은 편이다. 아들 녀석의 방에 전자피아노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작년부터 전자피아노 문제로 큰아들과 함께 공간 활용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녀석은 대안으로 아이들의 옷방 겸 내가 공부하는 책상 하나가 있는 방을 어떻게든 정리해서, 전자피아노 놓을 공간을 마련해 달라고도 했었다.


옷방에 전자피아노가 들어가게 되면 아들이 수시로 피아노 친다고 그 방에 들어가 있을 텐데, 나는 어디에서 공부를 하란 말인가. 비록 내가 지금은 늙은 대학원생 신분도 아니지만, 우리 집에서 여전히 강의 준비 등으로 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은 늙은 엄마인 내가 틀림없지 않은가.


몇 해전 대학원 시절엔 지금 있는 옷방마저 따로 없었다. 아들 녀석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까지 비어있는 시간 동안 아들들의 책상을 번갈아 메뚜기 뛰며 공부했었다. 그나마 지금은 내 책상이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나는 여전히 저 옷방을 정리하지 않을 참이다. 날은 더워지고 장마가 시작됐다느니 아니니 하는데, 갱년기로 겨우 일상을 버티고 있는 나에게 하루 빨리 큰아들부터 독립을 시켜야 할 분명한 목적이 또 하나 생긴 셈이다.


부모란 무조건 베푸는 존재가 아니다. 상황에 적합하게 부모라는 위치에서 처신할 뿐이다. 조나단 리빙스턴 갈매기의 꿈 이야기 같은 건 빈지노의 랩보다도 시들한 요즘 세상에서, 나는 무조건 희생하는 어머니는 결코 될 수 없을 거 같다.


아이들 옷방 안 한 구석에 자리한 내 책상 사수에 대한 굳은 다짐을 하면서, 나는 한 입에 먹기 좋게 잘라 놓은 수박의 씨를 뺀다. 꼼꼼하게 씨를 뺀 수박 접시는 그래도 큰아들 앞으로 밀어놓고, 씨 빼기 귀찮아서 씨가 그대로 있는 수박 접시는 남편 앞으로 밀어 놓는다.


(2021년 6월 29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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