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릴 적 꿈은 시인이었다. 기왕이면 학생들 앞에서 시와 인생을 이야기하는 대학 교수라면 더 멋있을 것도 같았다. 위대한 개츠비 정도는 아니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경로로든(유산을 상속받았든, 비상한 머리로 사업에 성공을 했든) 성공한 남편 덕에, 내가 좋아하는 학자와 예술가를 초대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공간을 자랑하는 저택의 귀부인을 꿈꾼 날들도 많았다.(개츠비에 얹혀 사는 저택의 귀부인이라니, 기생충도 아니고 참 비겁할 만큼 황당한 꿈이긴 했다.)
오십대로 들어선 지도 벌써 몇 해째가 되어가는데, 오늘 아침에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잊혔던 꿈이 떠오른 건 왜일까. 내 나이 스물한 살에 시내버스에서 내 꽁무니를 따라 내렸던 남편 덕에 귀부인이고 뭐고 다 물 건너간 얘기라고 묻어두었는데, 한물 간 이야기도 아니고 열물도 훨씬 더 지나간 정말 꿈같은 꿈이 오늘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아마도 다음 주에 있을 이번 학기 마지막 철학 강의 때문 인가 보다.
대저택의 귀부인이 되기는커녕 젊어서 두툼한 살집 덕에 그나마 있어 보이던 귀티마저 상실해버린 지금, 갱년기 아줌마는 학자가 된 친구와 나보다 가난한 예술가 친구에게 막걸리는 언제고 대접할 수 있을 만큼 딱 고 정도로 살고 있다. 대학교수는 못되었지만 고등학교에 간간이 철학 강의하러 들르고 있다. 영혼을 울리는 아름다운 시는 쓸 줄 모르지만, 몇 줄의 글 안에 솔직한 내 삶의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 나는 어릴 적 꿈을 얼추 비슷하게 다 이루었구나~ 내 자신에게 속삭여본다.
지나간 어린 시절의 꿈과 현실의 내 모습 사이에서 회한과 자족을 오고 가는데, 건물이며 땅이며 현금까지, 게다가 잘 나가는 자식까지 두루 가진 아는 언니에게서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전화가 걸려왔다. 어제 백화점엘 나갔다가 의류매장 직원이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언니는 늙었다고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거 아니냐며 투덜거린다. 휴대폰 너머로 그녀의 격앙된 음성을 듣고 있던 내가 그녀의 가슴에 한번 더 염장을 질렀다.
"그러게 왜 이삼십대 매장에 가서 어슬렁거려? 오륙십대 매장을 가셔야지~"
옆에 있었으면, 그렇게 놀려 먹고 냅다 튀어야 할지도 모른다. 까불다가 언니한테 등짝 스매싱을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전화기 너머로 약이 바짝 오른 언니가 버럭 소리를 질러댄다.
"아이구, 귀청이야, 언니, 소리 지르는 거 보니까 삼십대 맞네~그 직원이 잘못했네"
그제야 기분이 풀린 언니가 한풀 꺾인 채로 말을 이었다.
"너도 지금 입어보고 싶은 옷 있으면 당장 사 입어, 더 늙어서 언니 꼴 나지 말고~"
어릴 적 꿈도 얼추 비슷하게 이루었겠다(? ㅎ) 대학 때 입어보고 못 입어봤던 청 멜빵바지나 하나 사러 아울렛이나 가봐야겠다.
(2021년 7월 10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