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이네 집

by 도라지

얼마 전 한복이네 집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식구들 저녁 밥상을 먼저 차려서 먹인 후, 나 혼자 조용히 남은 반찬에 막걸리 두 잔을 마시고 있을 때였다.


몇 달 전 독립해 나간 준섭이가 분식을 겸한 커피 배달 사업 관련해서 준섭 엄마 집(한복이네 집)에 한 시간 안에 도착할 예정이라 했다. 부부가 공직자인 한복이네 집 엄마가 내 절친이다.


한복이는 그 집에서 키우는 쪼끄만 강아지 이름이다. 그놈이 어려서부터 하도 앙알거려서 개를 무서워하는 나는 쬐만한 몸집의 한복이한 테도 근 십 년을 마냥 지고 살았다.


준섭이 아빠는 낚시를 가고, 준섭이 엄마는 준섭이 사업 설명하는 자리에 나더러 꼭 와달라고 요청을 한다. 이미 막걸리를 마셔서 운전도 어렵거니와, 남의 자식이 사업하겠다는데 내가 해라 말아라 간섭하는 것도 우스운 것 같아서, 막걸리를 핑계로 넌지시 사정 이야기를 건넸다. 그런데도 그녀가 준섭이랑 우리 동네로 오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어찌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뮤직 복싱 체육관에서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이 흔쾌히 한복이네 집엘 가겠다고 한다. 지난번에도 한복이네 집에 일이 있어 간 적이 있다. 그때 남편이 한복이 훈련을 맡기 위해 따라나선 적이 있어서, 이미 남편도 한복이와 일면식이 있는 사이였다.


강아지를 좋아하는 남편은 냉동실에서 무염 닭가슴살 하나를 꺼내서, 나를 차에 태워 한복이네 집으로 향했다.


준섭이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남편이 한복이네 거실 바닥에 앉아 가져온 닭가슴살을 한복이에게 잘라 주면서 즐거워하는 동안, 나는 준섭 엄마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준섭이의 사업 설명을 들었다. 한 시간 삼십 분이 넘도록 열정을 다해 브리핑을 하는 녀석의 얼굴에선, 성공을 향한 의지가 불타올랐다.

외국계 회사에 다니던 남편이 첫 사업을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서른두 살 쯤이었다. 지금도 반도체 기업으로는 세계적인 그 회사에 다녔더라면 연봉이며 퇴직금까지 빵빵해서, 우리 가족은 지난 이십 년이라는 시간의 강을 그 위험한 배를 굳이 타고 건너지 않아도 됐을지 모른다.


대신에 지금 준섭 엄마는 나를 이 자리에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남편이 도전과 실패를 몇 차례 겪으면서, 예전보다 똑똑해진 쪽은 남편뿐만이 아니었다.


열한 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우리 집 둘째 아들과 동창인 준섭이는 낡은 차를 타고 먼저 집을 떠나고, 우리가 뒤따라 그 집을 나섰다. 남편과 한복이가 작별인사를 나누는 사이, 나는 친구에게 준섭이 가게 오픈할 때 꼭 연락을 달라고 했다. 녀석의 첫 사업인 만큼 큼지막한 화분이라도 보낼 생각이다.


젊다는 것은 언제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업도 사랑도 젊어서 도전하는 게 수월하다. 실패할지언정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젊음의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준섭이 브리핑을 듣다가 한복이랑 둘이서 꾸벅꾸벅 졸던 남편이 보름달 사이로 운전을 한다. 지나 온 세월 속에 늙은 것은 나 혼자고, 하고 싶은 걸 다 해봐서 인생에 아쉬움이 없다는 남편의 얼굴은 아직도 보름달처럼 실하다. 둥그런 남편의 얼굴이 얄미운 건지 고마운 건지, 내 마음 나도 잘 모르겠다.


(2021년 7월 15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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