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불의 in 부부 2

참지 말고 항거하자

by 도라지

부스럭부스럭, 주르륵주르륵, 탁탁탁탁.. 남편이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 물에 씻은 뒤 과도로 잘라먹는 소리가 들렸다. 식탁 위에 모시송편 세 개와 고구마가 있던 걸 어젯밤 자기 전에 보았으니, 아마도 남편은 두유랑 송편이랑 고구마 등을 사과와 곁들여 먹을 것이다. 밤새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아침을 맞았으나, 나는 일부러 일어나지 않았다. 싸워도 일어나서 밥상을 차려주던 옛날의 나는 이제 사라져야만 한다.


남편이 출근을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일단 내 먹을 것부터 챙긴다. 성질난다고 굶고 할 나이가 아니다. 달랑 거시기 두 쪽 가지고 장가를 온 남편을 대단하진 않지만 작은 사업가로 성장시키고, 두 아들을 보통의 성인으로 성장시키는 데 쏟아부은 에너지와 함께 내 연골도 빠져나갔다. 비싼 한우는 못 먹을 망정 달걀 후라이라도 부쳐 먹어야 할 판인데, 그 흔한 달걀마저 잘 먹히지가 않는다. 토마토랑 고구마와 믹스 커피로 간단히 에너지를 보충했다.


어제 일요일, 혼자서 산에 갈 때 싸가지고 나갔던 가방을 열어보았다. 먹지 않은 500미리 물통 한 개와 다 먹은 물통 두 개, 사용한 휴지와 과자봉지 등을 정리하는 데 자줏빛이 도는 꽃자루가 하나 딸려 들어와 있었다. 데크길가에 늘어선 벚나무의 꽃잎들이 바람과 함께 떠나간 자리에 꽃자루마저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가방에 딸려 온 꽃자루를 바라보며, 잠시 어제 혼자 걷던 오봉산과 고복저수지의 풍경을 떠올려보았다.


엊그제 토요일 시작된 남편과의 기싸움에서 내가 한 발 물러서 주고 다시 날이 바뀌었는데도 남편은 여전히 본인의 '기분 나쁨'만을 주장하며 나를 완전히 굴복시키려 하였다. 그러한 '보편적 불의'에 대응하는 나의 방식은 무관심이지만, 그 무관심은 다시 남편을 자극하여 그의 '기분 나쁨'을 증폭시키는 꼴이 되고 만다.


아직 남편과의 팽팽한 신경전이 지속되고 있는 중에, 큰아들 놈이 내 책상 서랍에 들어있던 것을 임의로 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제는 그 녀석의 대형 PC가 올라가 있는 책상이지만, 그래도 그 책상에 대한 소유권은 나에게 있었다. 세 개의 서랍 칸 중에 아래 두 개의 칸에는 사무실 관련하여 업무용 자료가 들어가 있고, 첫 번째 서랍 속엔 아들이 쓰다 버린 자질구레한 펜들과 메모지가 볼썽사납게 가득 들어 있기는 했었다.


아들이 사용하다가 버린 펜을 내가 쓰느라 모아놓은 것이긴 했어도 지금은 그래도 엄연히 내 물건들인데, 녀석의 태도는 옳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당장 써야 할 지우개마저 녀석은 과감하게 버리고 돌아왔다. 1단계, 좋게 물어보기를 시도하여 아들에게 버린 품목들 중에 중요한 것은 없었느냐 확인을 하고 2단계, 그래도 엄마 물건을 함부로 버리는 건 옳지 않았다고 내 의견을 주장했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남편이 개입하여 2:1 편먹기를 시도하며 잘 버리지 않는 나의 생활 습관에 대한 비판이 가해지면서, 숫적으로 열세인 나는 꼭지가 돌아버려 드디어 터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국을 끓여놓고 배추 겉절이가 다 되었던 시점인지라, 손에 끼고 있던 일회용 비닐장갑을 벗어던지고 물과 간식거리를 챙겨 집을 나갔다. 함께 등산할 수 있던 친구는 가족 확진자라 당장 외출이 어렵다 하여, 혼자서 오봉산엘 맨발로 올라갔다. 산을 내려와 근처에 있는 고복저수지로 가서 또 혼자 데크길을 걸었다.


땅거미가 내려앉기도 전에 저녁 식사 시간이 되고, 사람들은 저수지 근처 식당으로 이동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주차창에 세워놓은 차 안에서 혼자 사과를 먹고 빵 부스러기를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공원 위로 슬금거리는 고양이 눈빛을 한 어둠이 스며들고, 공원 바로 뒤에 불빛이 영롱한 카페에선 봄저녁에 어울리는 음악들이 감미롭게 흘러나왔다. 아무도 없는 공원 벤치에 앉아 귀동냥으로 음악을 들으며,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오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번도 혼자 생활해본 적이 없는 나에겐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부모님 슬하에서만 생활하다가 바로 결혼이라는 생활로 접어들어서, 나는 평생토록 혼자만의 독립된 공간을 가져본 적도 없다. 예전엔 내가 경제적 독립 주체가 되지 못해서 이혼도 못하고 사는 것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경제력도 원인이 될 수는 있겠지만 혼자 사는 삶의 경험이 없다는 것이 더 큰 원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혼을 해도 재혼을 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혼자 독신으로 살아가는 것도 젊은 시절 혼자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더 잘할 수 있는 것인가 보다. 2022년에 대한민국에서 갱년기를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 가운데 아직도 이혼을 하지 않고 가정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을, 온전히 능력 없어서 이혼 못하고 사는 것으로만 해석할 일은 아닌 듯싶다. 누군가는 이제껏 가정 공동체를 벗어나 혼자 삶을 살아가는 훈련을 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헌신과 배려라는 구태의연한 덕성의 가치와 보편적 불의에 항거하는 정신의 가치 사이에서 주춤거리는 사이, 세월은 순식간에 나를 갱년기에 데려다 놓았다. 헌신도 연골이 닳아 없어지기 전에 가능했던 이야기다. 이제는 내 몸에서 빠져나간 연골만큼이나 헌신의 시간은 줄이고, 보편적 불의에 내 방식대로 지혜롭게 항거하는 시간을 늘려야겠다.



keyword
이전 05화보편적 불의 in 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