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유토피아

by 도라지

"너는 사랑을 찾았니?"

고작 맥주 서너 잔을 마셨을 뿐인데, 그녀가 말짱한 정신으로 내게 물었다. 순간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 대답은 어쩌면 정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내 가슴을 일렁이게 하는 질문을 들었던 것 같다. 그날은 장대비가 쏟아지던 저녁이었다. 아직 결혼 경험이 없는 남자 후배의 카페에서 돈까스 안주를 시켜놓고 대학 동기와 맥주를 마셨다. 후배는 어쩌다 사회에서 알게 되었지만, 나를 가끔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알고 지낸 세월이 길다.


청주시청이 재건축을 위해 문화 제조창으로 청사를 임시로 옮기면서, 시청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대학 동기는 후배의 카페가 있는 그 동네로 일터를 옮겨왔다. 옛날에 연초제조창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각종 문화 행사 공간으로 탈바꿈하면서 문화 제조창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지만, 창문이 없는 사무실에서 시청 직원들은 약 2~3년을 일해야 하는 실정이다. 창문이 없는 대신에 천장이 높아서 위로 공기가 순환하게끔 무슨 시설을 갖추었다고는 하지만, 다들 일하다가 임시 사무실에서 병들 거라고 원망과 탄식이 끊이질 않는단다. 게다가 대학 동기의 등 뒤에는 커다란 배전함마저 턱 하니 놓여있다고 했다. 인생은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무실 자리 배치도 예외는 아닌가 보다.


대학시절부터 유달리 멋있었던 그녀와는 얼굴과 이름 정도만 아는 소원한 관계였다. 나는 대학시절 뭘 모르기도 하거니와 덜 떨어진 모지리였고, 그녀는 나와는 반대점에 서있을 것만 같은 텐션의 소유자였다. 우스운 것은 얼추 다 늙어버린 지금의 외모에서도 내게 "형님"이라는 호칭은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 쉽고, 오히려 그 호칭은 어쩐지 그녀에게 더 어울릴 법도 하다. 금발에 가까운 색으로 탈색한 머리를 좌우 비대칭 컷트를 하여 개성을 살린 그녀를 보면, 도저히 공무원이라는 신분이 떠오르질 않는다.


카페의 문이 여닫힐 때마다,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길에선 빗소리가 음악소리처럼 크게 들려왔다. 작은 카페에 앉아 내게 사랑을 찾았느냐고 묻는 그녀의 얼굴을 나는 따뜻하고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노란 머리의 그녀는 아직도 사랑을 찾고 있다고 했다. 나보다 두 살이 위인 그녀(나는 양력으로 삼일절에 태어났다. 그때 당시 국민학교 입학 법에 따라서 2월생까지 입학이 가능하다면 삼일절은 공휴일이므로 3월 1일생도 입학이 가능해야 한다고 우기셔서, 어머니는 나를 기어이 한 해 일찍 국민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래서 나는 또래 친구들보다 한 살이 적고, 그녀는 일 년 재수를 했다.)에겐 갱년기 따위는 접근 불가할 것만 같아 보였다.


결혼도 운칠기삼에 해당하는 것 중 하나인데, 나는 이번 생에 결혼은 운빨이 좋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글쎄, 대한민국에서 대체로 만족해하는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커플이 얼마나 될까 알 수 없지만, 불만족한 결혼 생활에 대한 보상 심리로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갖기 마련이다. 나는 칠십이 되어서도 하이힐을 신고 막걸리를 마시다가 "쿵~"하고 내 눈앞에 나타나서 내 심장을 뛰게 하는 남자를 만나면, 그 사랑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고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을 먹은 바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바이오리듬이 저조해지고 몸의 움직임이 둔탁해짐을 느끼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거울에 비친 늙어버린 내 모습에 스스로 좌절하면서 나는 '사랑의 유토피아'를 잃어버렸다. 아직도 "사랑을 찾을 거야~"라고 말하는 그녀는 나이와 상관없이 젊은 게 맞다. 몸이 젊어야 마음도 젊게 채색된다.


서로 경쟁한 것도 없는데, 여름에도 부츠로 멋을 부릴 줄 아는 그녀가 이번 생은 무조건 이긴 게임이다. 아직 오십 대 초반인데 하이힐은커녕 운동화만 주구장창 고집하는 나는 이미 사랑의 유토피아를 잃어버렸기에 그녀에게 진 게임이다.


작년부터 기능 작동이 원활하지 못했던 냉장고를 바꾸었더니, 이번엔 오래된 자동차가 멈춰버렸다. 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스스로 시스템을 제어시킨 은빛 재규어를 견인차 트럭 위에 고이 모셔 동네 정비소에 데려갔다. 연예인 뺨치는 외모의 정비소 사장이 늙은 아줌마를 바라보며 큰 일 날뻔하셨다고 위로를 건네 오는데, 어디론가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사랑의 유토피아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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