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도라지

자꾸만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아도, 휴대폰으로 날씨 검색을 연달아해보지 않아도 방충망을 통해 거실 바닥까지 침범해 들어오는 빗줄기는 우악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제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하고 과학기술이 좋아졌다고 해도, 장마철에 날씨 검색은 정확도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데이터 값의 예언보다 비구름을 담고 있는 자연은 한결 더 자유롭고 비범하다.


헛걸음할 것이 뻔한 데도 불구하고 나는 남편을 말리지 않았다. 네 명이 팀을 이루어 골프를 나가기로 했다고 하니, 그들 네 명 가운데 이런 날씨에도 라운딩을 고집하는 바보가 있다면 한 명쯤은 제대로 된 판단력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어이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선 남편이 한 시간 후에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평일 한낮에 골프를 즐기는 사람 치고 상사의 눈치를 보며 빠듯하게 직장에 얽매여 있는 사람은 드물다. 사장님인 남편은 직원인 마누라에게 병원에 납품 관련 입찰 업무를 맡기고는 거센 비바람을 뚫고 당당히 초록의 들판을 향해 차를 몰았지만, 일행 중 한 명의 교통사고로 그들의 라운딩은 무산되었다. 하필이면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골프를 하러 가다가 교통사고라니, 새 차를 뽑았다는 남편의 선배님도 참 운이 없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이 다친 곳은 없고 새 차만 치명상을 입었다고 하므로 그나마 운이 좋았다.


나는 여태껏 가르치는 일이나 글 쓰는 일 이외에, 특별히 소속된 직장 생활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남편 회사의 입찰 업무까지 도맡아 할 수 있는 건, 아마도 매사에 세심하게 공부하듯이 풀어가는 탐구 자세 때문일 것도 같다. 하나를 알면 열을 아는 정도까지의 두뇌형은 아니지만, 하나를 알면 두 개 세 개를 차분하게 진행시켜가는 수준은 된다. 그러니까 나이 들어가며 뇌 기능이 저하된다는 속설은 어찌 보면 타당한 말이 아닐 수도 있다. 늙은 아줌마도 생짜 초보 업무에서 가르쳐주는 상사 없이도 혼자서 일을 처리해가니 하는 말이다. 늙어간다고 기죽을 거 하나 없다. 나이 들어가면서 일 처리 속도가 조금씩 더뎌진다면, 조금 더 시간을 투자하면 된다.


예지몽은 아니지만, 가끔 그날 벌어질 일들 가운데 어느 하나와 맞아떨어지는 일종의 암시를 미리 꿈으로 볼 때가 있다. 지난밤엔 수학 문제를 하나도 풀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다가 꿈에서 처참한 심정으로 깨어났는데, 그날 입찰 가격 평점 산식 표를 보고 투찰 가격을 계산하였다. 공과대를 졸업했지만 인문학도였던 마누라보다도 산수력이 취약한 남편을 대신하여, 늙은 마누라는 행안부에서 고시한 낙찰자 결정 기준 변경 사항까지 살펴가며 투찰 가격을 써낸다.


그러니까 우리 부부는 "그나마 두뇌형" 마누라와 "역마살형" 남편이 2인 1조로 구멍가게만 한 규모의 사업체를 운영한다. 남편은 몇몇 직원이 있는 사무실로 출근을 하지만, 마누라는 집에서 노트북으로 업무를 본다. 정작 부려먹을 건 다 부려먹으면서도, 남편은 결단코 마누라의 업무량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다. 나는 어딘가로 출근하는 삶 보다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고, 남편에겐 회사 업무를 봐줄 직원이 집에 하나 더 있는 것뿐이다.


괴산고등학교로 출근하는 친구가 사다 준 옥수수를 두 솥 쪄서 냉동시켜놓았다가 친정 부모님 댁에 가져다 드리고 왔다. 드실 만큼만 몇 개씩 꺼내서 드시라고 말했는데도, 귀가 어두워진 어머니는 마스크를 쓴 막내딸 목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하신다. 옥수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큰언니는 듣는 둥 마는 둥 시큰둥한 표정으로 화장품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있다. 자신의 망상과 그 순간 일어나는 감정대로 행동하는 언니들이 요즘 조현병 약을 잘 먹고 있지 않는다고 어머니는 한숨을 지으셨다. 일찌감치 이부자리에 누우신 아버지의 작은 등이 더 왜소하게 느껴졌다.


캄캄한 어둠에 갇혀 있는 듯한 친정집을 다녀올 때마다, 내 몸에서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축 쳐져서 돌아오곤 했다. 억세게 쏟아지던 장대비도 멈출 때가 있는데, 사람의 인생에도 고통과 슬픔의 시간은 멈출 때가 있어야만 한다.


아름다웠던 다이애나비도 불의의 사고로 죽었고, 상록수처럼 우리 곁에 오래오래 함께 있어주리라 믿었던 노무현 대통령도 떠나갔다. 인생은 어차피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조현병을 앓고 있는 언니들과 늙으신 부모님과, 다이내믹한 부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나도 가야 할 최종 목적지는 같다. 인생은 한바탕 꿈이다. 꿈이라면 남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좋은 꿈을 꾸고 싶다. 친구에게서 다시 얻어온 옥수수 한 자루가 솥에서 맛있게 익어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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