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 김해는 지금까지 비겁하게 살 지 않았다고.
지금까지 살면서 지나치거나, 잠깐이나마 함께했던 사람들, 그리고 지금 내 생활 반경에 있는 사람들을 찬찬히 생각해 봤다.
지금은 인연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은 사람들도 있고,
어쩌다가 가끔 연락하는 사람들도 있다.
참 오래전 일인데, J는 나에게 조금씩 돈을 빌렸다.
아픈데 병원 갈 돈이 없다, 교재를 사야 한다 등의 이유를 대며...
J는 그때 말했다. "김해야, 우리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도와줄 사람이 없어. 고맙다. 꼭 갚을게."
약속된 시간이 되어도 돈을 갚을 기미가 안 보여서,
나는 조심스럽게 J에게 말했다.
"J야, 전에 빌린 돈 갚아줬으면 해. 나도 그 돈으로 할 게 있거든."
그런데.... 나는 J의 대답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왜냐하면 의외의 대답을, 굉장히 아무렇지도 않게 해서 순간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김해야, 부모님이 안 도와주셔? 부모님께 달라고 하면 되지."
내 말의 요점은 빌린 돈을 갚아라는 것인데... 갑자기 왜 우리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지?
순간 두뇌가 멈췄지만 겨우 이성을 되찾고 J에게 말했다,
"J야, 내 말은 빌린 돈을 갚아라는 거야. 부모님 이야기는 여기서 나올 화제는 아닌 것 같다. 언제까지 갚을 수 있는지 명확하게 말해주라."
J는 예상은 했지만 빌린 돈도 갚지 않고, 연락처도 바꿨다.
그런데 J는 끝까지 이렇게 말했다.
"아니 부모님이 안 도와주시니? 도와 달라고 하면 되지."
지금 생각하면 J와 인연이 끝난 것이 참 잘된 일이다라고 생각한다,
사람으로서의 신뢰가 없는 것보다, 마음씨가 삐뚤어졌다.
차라리 솔직 담백하게 말했어야 했다.
"정말 미안해, 김해야. 내가 여유가 없어서 도저히 갚을 형편이 못된다.
언제라고 장담할 수가 없겠네. 미안하게 됐다."라고...
거기서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우리 부모님 이야기는 왜 할까?
마치 '너는 좋은 부모님 있잖아.
너를 도와주는 부모님 있는데, 왜 나에게 굳이 돈을 받으려고 하니.'라는 것처럼.
C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뭐가 힘드니? 공부도 잘했고, 사랑도 많이 받고, 인기도 많았고."
J와 C의 공통점은 마음씨가 곱지 않고, 모났다는 것이다.
나 역시, 굉장히 힘든 시기를 건너왔다.
사기를 당해서 우리 집에 하루가 멀다 하고 빨간 차압 딱지를 붙이는 분들이 오고,
여자 아이들에게 심한 따돌림을 겪어서, 학교 가는 것이 지옥 같은 날들도 있었다.
그런데 J와 C는 공통적으로 "네가 뭐가 힘드니? 너는 잘 살고 있는데. 나보다는
안 힘들지."라는 부족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누구에게나 힘든 일은 닥치고, 관계 속에서 상처받는 감정은 비슷하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그렇게 안 가르치셨다.
세상 누구도 편하게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없다고 가르치셨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누구보다 꾸준하게, 성실하게 노력하라고 가르치셨다.
나보다 우수한 사람들을 밟으려고 하지 말고, 배워라고 가르치셨고,
나보다 실력이 낮은 사람들을 무시하지 말하고 가르치셨다.
나는 우리 부모님의 소중한 가르침을 보고 배우고 자랐다.
그래서 나는 비겁하게 살 지 않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