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이 영주의 가게를 습격한 밤, 과일가게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는 조직원들과 함께 진열된 과일을 망가뜨리고, 가게 곳곳을 부수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숨죽인 시선을 즐겼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어딘가 불안감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을 거슬러 오르는 유일한 존재처럼 느껴졌고, 이는 그를 더 무모하게 만들었다.
사건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동네 인근에는 동진의 행적에 대한 얘기가 돌았고, 사람들은 서로의 귀에 대고 그날의 일에 대해 속삭였다.
경찰은 그를 놓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빠르게 수사를 시작했다. 동진이 이런 상황에서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그의 이름과 얼굴은수배 명단에 올랐고, 도망자의 삶이 시작되었다.
동진은 쫓기는 신세가 된 현실을 실감하지 못한 채, 조직의 은신처에서 며칠을 숨어 지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편안함은 느낄 수 없었다. 밤마다 문 밖에서 작은 소리라도 들리면 가슴이 내려앉았고, 눈을 감으면 영주의 가게에서의 난장판이 다시 떠올랐다. 그날의 선택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고 갈지,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사건이 벌어진 뒤, 반장은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평소 맡은 일외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던 그였지만, 이번 일은 달랐다. 친구의 가게가 난장판이 된 채로 발견됐다는 소식에 마음 한구석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더욱이 그 뒤에 동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감정은 분노로 변했다.
반장은 어린 시절부터 동진을 잘 알고 지냈다.
구슬전쟁의 영웅 동진이었다. 한때는 학교에서 함께 뛰놀며 속 깊은 얘기를 나누던 친구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동진이 지금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지를 깨달을 때마다 그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떻게 친구였던 녀석이 이런 짓을…”
반장은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사건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도망자 신세가 된 동진은 혼란스러운 날들 속에서도 마음속에 한 가지 결심을 굳혔다. 오랫동안 억누르고 감춰온 감정, 현주에 대한 사랑이었다. 도망 중에도, 한적한 골목에 숨어 지내는 순간에도 머릿속은 온통 현주로 가득했다.
어릴 적부터 현주를 보며 느꼈던 미묘한 감정은 세월이 흘러도 희미해지지 않았다. 현주가 환하게 웃으며 반장과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애써 눈을 돌려야 했고, 그럴 때마다 마음은 아릿한 통증으로 가득 찼다. 감정은 점점 내면을 갉아먹었고, 이제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만큼 부풀어 올랐다. 반장과의 관계 속에서 한없이 밀려났던 마음은 혼란스러운 도피 생활 속에서 오히려 뚜렷하게 떠올랐다.
“현주를 만나야 해,”
그는 다짐하듯 속삭였다.
이제 비겁하게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라 해도, 현주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것만이 유일한 탈출구처럼 느껴졌다. 그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현주를 만나기 위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눈에 띄지 않게 몰래 접근할 방법을, 그녀에게 어떻게 자신의 진심을 전할지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그려보았다.
하지만계획은 만남 이상의 것이었다.
동진에게 있어 결심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끝없이 갈구해 왔던 소속감을 되찾는 일이기도 했다. 숨어 지내는 불안한 시간 속에서도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선명하고 뜨거웠다. 과연 그의 진심이 현주에게 닿을 수 있을 것인가, 그 순간이 다가올수록 동진의 가슴은 점점 더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