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 사는 아이들 중 해인은 단연 화제였다. 예쁜 외모에다 서울에서 왔다는 배경까지 더해져, 전학 온 첫날부터 강호 국민학교 교실 안팎이 술렁였다. 복도에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남자아이들은 수군거리며 몰래쳐다봤다.
"해인아, 너는 서울에서 살았으니까 우리랑은다를 것 같아, " 여자아이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묻곤 했다.
해인은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뭐가 다르겠어? 다 똑같지, "라고 대답했지만, 그런 대답조차도 어딘가 신비롭게 들렸다.
병준은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묘한 설렘에 휩싸였다.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는 것도 모자라, 슬며시 가까이 다가가 대화할 기회를 노렸다. 쉬는 시간마다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병준을 친구들은 눈치챘다.
"병준아, 너 해인이 좋아하지?" 친구 중 하나는 짓궂은 물어볼만했지만, 모두가 형이라 부르는 병준에게 그런 용기를 내는 아이는 없었다. 가끔 병준이 혼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병준의 마음 한구석엔 이미 그녀를 향한 특별한 감정이 서서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해인의 환한 웃음과 부드러운 말투는 그의 마음속에 잔잔히 파문을 일으키며 더 깊이 스며들었다.
방과 후, 병준은 우연을 가장해 해인이 걷는 길을 따라갔다. 해인이 병준을 발견하고 미소 지으며 말을 걸었다.
“같이 가자, 병준아.”
해인도 반장처럼 병준을 격 없이 대하고 있었다. 짧은 말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들썩이게 했다. 그녀와 함께 걷는 동안, 병준은 온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듯 기분에 젖어들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병준은 해인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어느 날, 해인은 자신의 생일을 맞아 아파트 단지 아이들을 파티에 초대했다. 새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들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결심한 일이었다. 해인의 생일 소식이 퍼지자 아이들은 저마다 선물을 준비하며 들뜬 표정으로 기다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반장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병준이 해인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눈치챘던 터라, 이번 파티가 그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병준이 내내 어두운 얼굴로 교실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며, 반장은 마음이 쓰였다.
점심시간, 반장은 해인에게 다가갔다.
"해인아, 네 생일 파티에… 병준이도 와도 될까?"
해인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병준이도 오면 좋겠어. 나도 친구들 모두와 더 가까워지고 싶으니까."
그날 방과 후, 반장은 병준을 찾아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병준아, 너도 해인 생일 파티에 같이 가자."
병준은 반짝 눈을 떴다. "정말… 내가 가도 돼?"
반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해인도 네가 오는 걸 환영한대."
순간 병준의 얼굴엔 기쁨이 번졌다. 생일 파티에 갈 생각에 들떠 있던 병준은 밤새 무슨 옷을 입고 어떤 선물을 가져가야 할지 고민했다. 파티 당일, 병준은 손에 작은 선물을 꼭 쥐고 해인의 집으로 향했다. 설레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문 앞에 도착한 병준을 보며, 반장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병준이 해인을 향해 작은 선물을 건넸을 때, 해인은 환하게 웃으며 "고마워, 병준아. 네가 와줘서 정말 기뻐."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에 병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고, 그의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벅찼다.
병준은 사실 며칠 동안 고민 끝에 결심을 내렸다. 해인의 생일에 줄 선물을 준비하고 싶었지만, 형편상 고가의 물건을 사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방과 후 남은 시간을 쪼개 동네를 돌며 폐품을 모았다. 낡은 캔과 버려진 고철을 모아 마련한 귀한 돈으로, 병준은 해인이 좋아할 만한 작은 인형 하나를 살 수 있었다.
선물 포장을 하는 내내 병준의 마음은 두근거렸다. 손으로 쥔 인형이 자기 마음을 담은 고백처럼 느껴져 소중하게 감싸 들었다. 그의 머릿속엔 해인이 기뻐할 모습이 그려졌고,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들떠 있었다.
하지만 해인의 생일 파티에서, 병준은 곧 자신이 바라던 환한 웃음을 보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파티가 한창일 때, 해인이 반장에게 다정한 미소를 보낼 때마다 병준은 마음 한구석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눈길이 반장을 향할 때마다, 병준의 눈동자엔 잔잔한 슬픔이 깃들었다.
해인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미소 지으며 병준에게 “고마워, 병준아. 정말 귀여운 인형이야,”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반장 쪽으로 돌아갔고, 병준은 짧은 순간에도 해인의 미소가 반장을 향한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고아원으로 돌아가는 길, 병준은 파티의 밝은 불빛을 등지고 혼자 걸어가며 쓸쓸함을 씹어 삼켰다. 그의 손엔 남아 있는 것이 없었지만, 마음속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감정이 허전하게 남아 있었다. 병준은 그날 밤, 차가운 달빛 아래서 혼자서 속삭였다.
“그래도… 해인이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어.”
그날 해인의 생일 파티는 강호 국민학교에서도 손꼽힐 만큼 특별한 날이었다. 전교 1등 윤정이와 나래, 환기 같은 부잣집 아이들부터 병준, 철수, 길수 같은 가난한 집 아이들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어울리는 장면은 쉽게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반장의 리더십 덕분이었다. 반장은 아이들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어, 그날만큼은 누구나 거리낌 없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주도했다.
해인의 집은 아이들로 북적였다. 화려한 케이크와 풍선, 아이들을 위해 준비된 간식들까지, 그곳은 축제현장 같았다. 환기와 나래는 귀여운 선물을 해인에게 건네며 환한 미소를 보냈고, 병준과 철수는 조심스럽게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도 작은 선물을 준비했지만, 그것이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일까 봐 살짝 쑥스러워졌다.
반장은 아이들 하나하나가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 웃을 수 있도록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는 철수와 길수를 불러내 장난을 치며 분위기를 돋우었고, 그들이 어색하지 않도록 윤정이와 나래에게도 함께 어울려 놀자며 유도했다. 반장의 한마디에 아이들은 서서히 마음을 열고 오랜만에 자유롭게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한데 어울려 보물찾기 놀이를 하고, 서로에게 간식도 나누어 주며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은 서로의 집안 형편이나 배경 따위는 잊은 듯, 친구로서 함께 웃고 떠들며 즐거운 순간을 만끽했다. 그곳엔 평소 학교에선 찾아볼 수 없던 순수한 웃음과 다정한 대화가 넘쳐흘렀다.
병준은 그런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며 어딘가 따뜻해진 마음을 느꼈다. 그날의 기억은 어쩌면 오랫동안 그의 마음에 남을지도 모른다고, 병준은 희미하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