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해서 하는 사랑, 그 안의 공허함

eunparang

by 은파랑




해야 해서 하는 사랑, 그 안의 공허함


사랑은 자유로 시작된다. 처음의 사랑은 언제나 자발적이다. 끌림은 의무가 아니라 본능이며, 우리는 이유 없는 떨림에 이끌려 마음을 연다. 하지만 사랑이 깊어지고 시간이 흘러가면 사랑은 감정만으로는 유지되지 않는다.


그 자리에 조금씩 책임과 헌신 그리고 의무감이 자리를 잡는다. 의무감은 사랑의 무게다. 무게는 때론 어깨를 짓누르지만, 또 어떤 날엔 흔들리는 관계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기도 한다. 부모가 자녀를 안아주는 손길처럼, 연인이 서로를 지켜보며 무너지지 않게 받쳐주는 것처럼


그림 프리다옥


사랑은 의무감 속에서 조용히 자란다. 감정은 사라질 때도 있다. 사랑의 열기가 잠잠해지고, 설렘은 사소한 일상에 묻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의무감이 빛난다.


사랑하니까 하는 일, 사랑하니까 견디는 마음, 사랑하니까 계속 곁에 머무는 선택. 의무감은 그런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다. 하지만 무게가 지나치면 사랑은 짐이 된다. 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사랑을 의무의 영역으로 몰고 간다. 그 속에서 감정은 메말라가고, 마음은 천천히 닫힌다. ‘이렇게 해야만 한다’라는 믿음이 강요될 때 관계는 숨이 막히기 시작한다.


한 사람이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길 때도 사랑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다. 의무감이 깊어질수록 자신을 돌보는 일은 점점 멀어진다. ‘사랑하니까 참아야지’, ‘사랑하니까 포기해야지’하는 생각은 결국 자신을 지우는 일이 된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을 억누르는 의무감은 사랑을 약화한다.

사랑은 희생으로만 유지되는 감정이 아니다. 의무감은 사랑을 억압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랑을 지탱하는 다리여야 한다. 다리는 서로의 마음을 연결하고, 마음과 마음 사이를 더 가깝게 만든다. 그 위를 함께 걷기 위해서는 서로가 같은 걸음으로 나가야 한다.


부담스러운 감정은 솔직한 말로 풀어야 한다. 나는 지쳤다고 말하고, 너는 어떻게 느끼느냐고 묻는 시간이 필요하다. 대화 속에서 우리는 의무감이 억압이 아니라 협력의 형태로 작용하도록 만들 수 있다.


무언가를 해야 하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 사이의 사랑을 지키고 싶으므로 하는 것임을 서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친 하루 끝에도 정성을 다해 저녁상을 차리는 일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사랑이 남긴 흔적일 수 있다. 그 마음을 알아주고, 고마움을 표현하는 순간 의무는 사랑으로 바뀐다.


사랑은 감정 이상이다. 그것은 책임이고 약속이며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 안에는 의무감이 함께 따라온다. 하지만 의무감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흩어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중심이다. 사랑과 의무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다. 사랑이란 바람이 스스로 멈추지 않도록 그 아래 닻을 내리는 일이다. 닻이 의무감이다. 그리고 닻 덕분에 어지러운 파도 속에서도 서로의 마음을 지킬 수 있다.


사랑은 감정으로 시작되지만, 때론 의무감이라는 무게를 안고 자란다. 함께한 시간, 약속, 책임감이 쌓이면서 마음이 아닌 ‘해야만 하는 관계’가 될 때도 있다.


미국 유전학 교수 윌리엄 리스(William R. Lee)는 사랑에서 의무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의무감은 때론 사랑이 흔들릴 때도 관계 약속을 지키는 접착제가 되어주지만, 과도하면 감정을 무색하게 만들고 사랑을 피곤하게 만든다.”


의무감에 이끌려 머무르는 사랑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닌 ‘묶임’이 된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진짜 감정을 숨기고 관계는 점점 소원해진다. 하지만 건강한 사랑에서 의무감은 책임감이 아니라 서로를 위한 진심 어린 헌신이어야 한다. 헌신은 자유로운 마음에서 우러나올 때 사랑을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든다. 사랑과 의무감 사이 미묘한 균형을 찾아가는 일은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 위한 도전이자 가장 큰 선물일지 모른다.


은파랑




은파랑 콘텐츠 에세이 '토닥토닥'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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