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주방에서 퍼져 나오는 지글지글 튀겨지는 치킨 냄새가 시간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시계 초침 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끌어당기듯, 그때 그 시절로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가게 안은 어린 시절 놀이터처럼 소란스러워졌다. 겉모습은 달라졌어도, 그들 사이의 흐름은 여전히 매끄럽게 이어졌다. 서로의 눈빛에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감정들이 가볍게 흩날렸다가도, 때론 단단하게 맺혔다.
"기억나냐? 우리 운동장에서 공기놀이 하던 거."
만호가 테이블을 툭툭 치며 잊혔던 시간을 되살리려 애썼다.
"그럼, 기억나지. 그때는 참, 별것도 아닌 게 다 재미있었지." 상문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갑자기 쨍그랑, 물컵이 넘어지며 물방울들이 발치로 퍼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침묵조차도 오랜 추억을 속삭이듯 부드럽게 다가왔다.
그날의 대화는 오랜 시계가 다시 움직이듯,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기억은 시간의 먼지를 털어내고, 새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이어준 과거와 현재는 투명한 실처럼 가게를 감싸 안았다. 그곳은 그들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주는 따뜻한 서재였다.
길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치킨집을 열었다. 화려한 학력도 대단한 자본도 없었지만, 오로지 열정 하나로 시작한 가게는 어느새 동네에서 소문난 명소가 되었다. 가게는 작았지만, 그 안에는 소박한 정취가 가득했다.
다섯 개의 테이블이 단출하게 놓여 있었고, 벽 한쪽에는 낡은 소주 광고 달력이 걸려 있었다. 달력 속 모델의 웃음은 시간이 멈춰버린 과거를 지시하고 있었다.
낡은 달력마저도 친구들에게는 추억의 일부였다. 그들은 달력 너머로, 그 시절의 일상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처럼 느꼈다.
"저 달력 아직도 안 떼었네, "
영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길수는 잠시 달력을 바라보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왠지 없으면 허전하더라고. 가게 문 열 때부터 같이 있었거든."
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달력은 그들에게 시간의 흐름을 잊게 하는 상징이자, 추억을 간직한 오래된 동료였다.
가게 안에는 치킨 냄새가 퍼지고, 기름이 지글거리는 소리가 그들만의 추억을 다듬는 듯했다. 공간은 점차 따뜻한 온기로 가득 찼고, 그곳은 오래된 기억들이 머무는 안식처로 변해갔다.
서로의 얼굴을 조심스레 바라보며, 그들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1993년 강호국민학교 동창회"라는 플래카드가 벽에 걸려,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문을 열어주는 듯했다.
그날의 대화는 시계처럼 톱니 하나하나 다시 맞물려, 과거와 현재가 서로 얽히며 새롭게 피어나는 순간을 만들고 있었다.
현주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렸다. 소년의 얼굴은 여전히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고,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추억의 일부가 되었다.
무더운 여름날, 그녀는 서울에서 이곳으로 전학을 왔다. 낯선 교실과 처음 마주하는 새로운 사람들 속에서, 유독 그의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창문 너머로 쏟아지던 햇살 아래, 그는 어색한 듯 그녀를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미소는 처음엔 낯설었지만, 이내 그녀에게 따뜻하게 다가왔다.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것처럼 편안함이 밀려왔고, 그 순간부터 그녀는 알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
처음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차분하고 부드러운 울림이 그녀의 가슴속에 작은 물결을 일으켰다. 그의 웃음소리는 무더운 여름날 불어오는 산들바람처럼 그녀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두 사람은 교실에서 서로의 책상을 사이에 두고 점차 가까워졌고, 쉬는 시간에는 작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함께 뛰놀았다.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세계가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 시절의 기억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달콤하게 익어갔다. 마음속에서 감정은 점점 깊어졌고, 어느새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 현주의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부도로 모든 것을 잃었고, 가족은 도망치듯 서울로 다시 이사를 가야만 했다. 이별은 너무나도 급작스러웠고, 소년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전할 시간조차 없었다. 현주는 그날 밤, 학교에서의 추억과 첫사랑을 마음에 간직한 채 조용히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첫사랑은 그렇게 시간 속에 묻혔지만, 현주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의 따스한 감정은 오래된 편지처럼 가슴 한편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이 각인되었다. 비록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지만, 소년과의 기억은 그녀에게서 결코 떠나지 않았다.
길수의 치킨집에서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그 순간, 현주는 문득 소년을 떠올렸다. 오래된 기억 속에서도 여전히 따스하게 빛나던 그의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가 떠오르며,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음에도 소년과 함께했던 짧지만 깊은 순간들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변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치킨집의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친구들이 떠드는 소리는 어느새 멀게만 느껴졌다. 현주는 그때의 감정이 다시 가슴을 두드리는 것을 느꼈지만, 이번엔 그리움보다 고요한 감사가 그녀를 감쌌다. 그 시절의 추억이 있었기에 지금의 행복이 더 소중하게 다가왔다. 시간이 흘러도, 그 시절의 기억들은 여전히 그녀의 마음속 한구석에 따뜻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날 밤, 치킨집 안은 술잔이 오가며 적당히 취한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오랜만에 마주한 친구들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하지만 현주의 마음속엔 묘한 불편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반장이었다. 그가 이 자리에 올까 하는 기대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뒤섞여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반장은 안 오겠지?”
한 친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데, 오겠어?”
또 다른 친구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반장의 근황을 아는 듯, 그 말은 오지 않을 것을 기정사실화하는 듯 들렸다.
씁쓸한 웃음과 함께 다른 친구가 덧붙였다.
“그래도 반장이 오면 좋겠는데…”
그들의 대화 속에 나온 반장의 이름이 현주에게는 유독 무겁게 다가왔다. 그가 이 자리에 함께한다면, 묻어두었던 감정들이 다시 피어날까 두려웠다. 하지만 만약 그와의 재회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더 깊은 허전함이 찾아올 것만 같았다.
그들이 반장을 이야기하던 그 순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문이 열리며 바람과 함께 그가 들어왔다. 문간에 선 사람은 바로 반장이었다.
치킨집 안의 모든 시선이 한순간에 그를 향했다. 큰 키와 단정한 외모, 국민학교 시절 모든 여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의 모습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어딘가 더 성숙하고 단단해 보였다. 세월은 그의 외모에 성숙함과 자신감을 덧칠해 놓은 듯했다.
아이들은 놀란 듯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장은 과거의 시간을 이어주는 실마리처럼 그들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등장에 잠시 멈칫하던 대화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치킨집 안은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 묘한 온기로 가득 찼다.
현주는 그를 바라보며 심장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한때 자신이 알던 소년이, 이젠 어른이 되어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와, 반장 왔네!”
누군가가 먼저 소리쳤다.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가득했다.
“진짜 다들 오랜만이야,”
반장은 특유의 웃음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그의 목소리에는 친근함이 묻어 있었고, 그 순간 아이들은 다시 예전처럼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반장은 자연스럽게 현주 옆에 앉았다. 순간, 현주의 마음은 미묘한 떨림으로 가득 찼다. 그의 가까운 기척이 예전과는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인연이 다시 이어지는 듯 이 순간, 현주는 복잡한 감정 속에 잠겼다.
친구들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현주의 머릿속은 오직 반장과의 재회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현주야, 진짜 오랜만이다.”
반장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현주는 떨리는 마음을 숨기며 어색한 미소로 대답했다. “반장, 반갑다.”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속엔 숨겨진 감정들이 스며들어 있었다.
짧은 대화 속에도,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은 감정들이 조용히 떠돌고 있었다. 현주는 자신도 모르게 그 시절의 어린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겹쳐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불편함이 가시지 않았다. 반장을 향한 반가움 뒤편에 자리한 불편함은, 그가 여전히 모든 이들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반장이 모든 시선을 받고 있는 동안, 그녀는 그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는 생각이 점점 짙어졌다. 스물한 살의 나이,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현주는 자신과 반장 사이에 벌어진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한 학생은 18명 남짓이었고, 그중에서 반장은 서울의 명문대에 입학한 유일한 존재였다. 그는 성공의 상징이자 자랑거리였다. 현주는 그와 자신 사이의 점점 커져가는 신분 차이를 느끼며, 묘한 고립감에 빠져들었다.
무거운 분위기를 깨듯, 반장은 맥주병을 바라보며 무심히 말했다.
“맥주가 하이트네. 요즘은 카스가 더 맛있던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 친구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야, 누가 하이트 가져왔어? 반장이 카스라잖아.”
그 말에 두 명의 친구가 쏜살같이 냉장고로 달려가, 카스 맥주를 꺼내 들고 돌아왔다. 카스 맥주가 반장 앞에 놓이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냥 한 말이었는데, 아무튼 고맙다.”
그의 말 한마디에 치킨집 안의 긴장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현주는 그 순간에도 반장이 여전히 모두의 중심에 서 있음을 느꼈다. 반장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친구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며, 그들의 관계가 여전히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그 순간, 친구들은 웃으며 자연스럽게 그 시절 학교 분위기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 그들 사이 중심에는 늘 반장이 있었다. 그의 존재는 친구 이상으로 무게를 지녔고, 그 시절의 질서는 그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시간이 흘러도, 술잔이 오가며 나누는 이야기들 속에서 우정은 여전히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술기운이 오르자, 친구들의 말수가 늘고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동진이 가장 먼저 취기에 휩싸여 목소리를 높였다.
“와... 내가 현주 진짜 좋아했는데... 현주, 너 서울 가서 중학교 때 학교 잘리고 술집 나갔다는 소문 듣고 진짜 많이 울었다."
순간, 현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얼음물처럼 차갑게 흘러나온 동진의 말은 그녀를 강하게 내리쳤다. 치킨집 안에 가득했던 웃음과 대화는 순식간에 멈췄고, 공기가 얼어붙은 듯했다.
길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재빨리 동진을 말렸다. “동진아, 그만해. 너 너무 취했어. 이제 그만 마셔.”
길수의 다급한 말에도 동진은 취기가 가득한 얼굴로 계속 떠들었다. 현주는 속에서 솟아오르는 불편함과 억울함을 애써 눌렀다.
“야, 뭔 소리야. 너도 중학교 때 잘렸잖아.”
다른 친구가 동진을 타박했지만, 동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주는 어린 시절 자신을 따라다니던 소문과 그로 인한 상처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의 억울함과 고통이 다시 그녀의 마음을 후벼 팠다. 그녀는 동진을 노려보며 무심히 담배를 물었다.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 그게 네가 신경 쓸 일이냐?” 현주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그 순간 터져 나왔다.
동진은 여전히 취한 목소리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아니, 내가 진짜 너 좋아했는데, 네가 중학교 중퇴하고 술집 나간다는 얘기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그의 말이 계속될수록 치킨집 안의 분위기는 점점 더 얼어붙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웃음과 농담이 오가던 자리가 이젠 묵직한 침묵과 어색함으로 가득 찼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
“야, 그만해라.”
또 다른 친구가 말렸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동진이 뱉어낸 말들은 현주의 마음을 깊이 할퀴고 지나갔다. 과거의 상처들이 다시 피어나 그녀를 옥죄었다.
현주는 담배를 피우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려 애썼다. 가슴에 묻어 두었던 고통이 다시 떠오르며, 더 이상 그 자리는 화기애애한 동창 모임이 아니게 되었다.
그때, 반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현주야, 해운대 바다나 보러 가자. 술도 좀 깼으면 좋겠고, 잠깐 걸어.”
그의 차분한 제안에 무거웠던 분위기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반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친구들이 환호하며 분위기를 바꿨다.
“오~ 반장 멋있다!” “해운대, 좋지!”
어색했던 공기가 반장의 한마디로 누그러졌고, 친구들은 다시 웃음과 농담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현주는 반장의 제안을 듣고 잠시 고민했지만, 그의 진심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장은 말없이 현주의 가방을 들어주며 그녀와 함께 치킨집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밤공기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문을 닫고 나가려는 순간, 낡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중계방송이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롯데 자이언츠, 또 한 번의 어이없는 패배…”
그 익숙한 목소리에 두 사람은 묘한 허탈감을 느꼈다. 반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현주는 미소를 지었다. 그들만의 조용한 공감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은 바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밤바람이 차갑게 불어왔지만, 그 속에서 현주는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감정들이 조금씩 풀려가는 것을 느꼈다. 파도가 잔잔하게 밀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오랜 시간 동안 가슴에 쌓여 있던 억울함과 분노가 바람에 실려 서서히 흩어져가는 것 같았다.
반장은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었다. 그와의 조용한 동행이 현주에게는 오히려 큰 위로가 되었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 그들은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현주는 오랜만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평화가 찾아오는 것을 느끼며, 묵었던 감정들을 바람 속으로 날려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