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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파랑 Sep 24. 2024

노숙자

현주와 반장 4.




노숙자 


노숙자는 고아원에서 강하고 거친 소녀로 통했다. 이름부터가 노숙자다. 그 이름처럼 그녀는 싸움 잘하기로 유명했고, 강 국민학교 전체에서 넘버 10 안에 드는 실력자였다. 남자들조차 그녀 앞에선 꼼짝 못 했고, 숙자가 한 번 눈을 부릅뜨면 싸움은 금방 끝이 났다.


노숙자는 싸움만 잘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늘 반장을 향한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멀리서 반장을 지켜보았다. 반장이 다른 아이들과 있을 때는 고개를 돌리며 관심 없는 척했지만, 반장이 없을 땐 그의 빈자리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겉으로는 강한 척했지만, 반장이 웃을 때면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번지곤 했다.


그날도 노숙자는 고아원의 구석에서 벽돌을 쌓으며 반장을 떠올리고 있었다. 고된 노동 중에도 그의 따뜻한 미소가 머릿속에서 떠오르며 가슴 한쪽이 간질간질했다.

그때, 반장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노숙자는 일부러 그를 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노숙, 오늘은 왜 혼자 있어?" 반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노숙자는 벽돌을 내려놓으며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잖아."


반장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 곁에 앉았다. "그래도 혼자 있으면 좀 걱정돼서."


노숙자는 반장의 따뜻한 눈빛에 순간 얼굴이 붉어졌지만, 차갑게 대꾸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 난 네가 걱정할만한 애가 아니니까."


반장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가 강한 거 알아. 누구보다 잘 싸우는 것도. 하지만 넌 나한테 그냥 싸움 잘하는 애가 아니야."


그 말에 노숙자의 가슴이 뛰었다. 반장의 말 한마디가 그녀의 마음 깊숙이 파고들었지만, 애써 티 내지 않으려 했다. "그럼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해야 해?"


반장은 잠시 고민한 뒤 조용히 대답했다. "난 너랑 더 가까워지고 싶어. 네가 있으면 왠지 든든하거든."


노숙자의 마음은 흔들렸다. 고아원에서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녀였지만, 반장 앞에서는 방어막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오랫동안 감추려 했으나,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넌… 바보 같아, " 노숙자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낯선 감정에 사로잡혀 일어나려 했지만, 그 순간 반장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손길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노숙, 조금 더 얘기하지 않을래?" 반장의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노숙자는 그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둘은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고아원의 바람은 조용히 불어왔고, 멀리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 순간, 노숙자는 자신의 마음속 단단한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반장과 함께 있으면 평온함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 노숙자는 반장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여전히 강하고 거칠었지만, 그에게만큼은 부드러워지고 싶었다. 반장은 언제나처럼 조용히 그녀 곁에서 미소 지었다.


그날 이후, 노숙자는 반장을 멀리서 바라보는 대신, 가끔씩 나란히 걸었고 서로의 마음을 나누었다. 고아원의 메마른 시간 속에서, 두 사람 사이에 작은 로맨스가 서서히 피어나기 시작했다.




병준이는 또래보다 세 살이 많았다. 그가 초등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집안 사정 때문이었다. 병준이의 가정은 늘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그로 인해 그의 학업은 여러 번 중단되었다. 부모님의 잦은 이사와 생계 문제로 인해 병준이는 자주 학교를 빠졌고, 결국 학년을 제대로 이수하지 못한 채 세 살이 많은 상태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다 4학년 때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고, 병준이는 고아원으로 오게 되었다.


그의 무뚝뚝한 태도와 싸움 실력은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쌓인 외로움과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병준이는 세상이 자신에게 가혹하다고 생각했고, 그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힘으로 맞서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자가 되었고, 힘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했다.


하지만 반장은 달랐다. 비록 병준이와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특별한 우정이 피어났다. 처음에 병준이는 반장을 어린애 취급하며 무시하려 했으나, 반장은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반장은 병준이의 나이를 묻지 않았고, 그의 상처를 캐묻지도 않았다. 대신 병준이를 하나의 동등한 존재로 대했다. 다른 아이들이 병준이를 두려워하며 피할 때도, 반장은 늘 그의 곁에 있었다.


"왜 나한테 겁 안 먹어?"
어느 날 병준이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의심과 불안이 섞여 있었다.


"겁을 먹을 이유가 없잖아. 넌 나한테 겁을 줄 사람이 아니니까."
반장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병준이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반장의 눈빛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그 진심이 병준이의 경계심을 조금씩 허물어갔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친구가 되었다. 병준이는 반장의 냉철함과 강인함을 존경했고, 반장은 병준이의 숨겨진 고독을 이해했다. 병준이에게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인한 육체가 있었지만, 반장에게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내면의 힘이 있었다. 병준이는 반장 곁에 있을 때 자신도 약한 존재임을 인정할 수 있었고, 반장은 그런 병준이의 약함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반장이 한결같이 다가오자, 병준이는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반장이 그를 동정하지 않고, 마치 자기 자신처럼 대해주자 병준이는 처음으로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 주는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로 다른 환경과 경험을 지닌 두 사람은 오히려 그 차이 덕분에 더 깊은 우정을 쌓았다. 나이를 넘어선 그들의 진정한 우정은 서로의 상처를 감싸 안으며 더욱 단단해졌다.


그렇게 병준이와 반장은, 나이를 뛰어넘어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




고아원 아이들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준수였다. 병준이처럼 싸움에서 밀리지 않았지만, 준수는 그것만으로 평가될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고아원에서 '이상적인 아이'로 불리며, 공부와 싸움 두 분야에서 모두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준수는 비범한 집중력과 학습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언제나 최상위권을 차지했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논리적이고 정확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의 이름은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자주 회자되었고, 고아원 아이들 사이에서는 늘 책을 펼치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하지만 준수가 단순히 공부만 잘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타고난 리더십과 결단력이 있었다. 싸움이 벌어지면, 그는 언제나 침착했고, 상대가 아무리 크고 강해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병준이처럼 거대한 힘으로 상대를 압도하지는 않았지만, 준수는 전략과 침착함으로 싸움을 이끌었다. 그는 언제나 상황을 분석하고, 최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너, 싸움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네?"
다른 아이들이 물을 때마다 준수는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냥, 둘 다 쓸 일이 많아서."


병준이가 '힘의 상징'이었다면, 준수는 '지성과 힘을 겸비한 아이'로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아이들은 그를 존경했고, 어려운 문제나 갈등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준수에게 의지했다. 그의 판단은 언제나 신뢰할 만했고, 그는 아이들 사이에서 든든한 기둥 같은 존재였다.

반장 역시 준수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들은 자주 대화를 나누었고, 때로는 반장조차도 준수의 의견을 경청하며 조언을 구했다. 반장은 준수를 단순히 고아원의 아이로만 보지 않았다.


"넌 나중에 뭔가 큰 일을 해낼 거야, "
반장이 진지하게 말할 때, 준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그냥 아이야, 반장. 그래도 고마워."


준수는 그가 가진 능력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겸손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다른 아이들이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더 즐겼다. 고아원 아이들 사이에서 그는 든든한 동료였고, 그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였다.


싸움에서도, 공부에서도 남다른 실력을 자랑했던 준수는 병준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고아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조용하지만 단단한 힘으로 아이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위치를 지키며, 고아원의 미래를 이끌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고아원 아이들은 하루 종일 이어진 노역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며 잠자리에 누웠다. 방 안은 고요한 어둠 속에 잠겼지만, 그 속에서 아이들은 낮게 속삭이며 오늘의 고단함을 나누고 있었다.


"오늘 벽돌 나르는 게 정말 힘들었어, "
한 아이가 힘없이 말하며 천장을 바라봤다. 가쁜 숨을 내쉬며 하루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나도... 손에 물집이 또 생겼어, "
다른 아이가 말하며 손바닥을 살펴봤다. 물집 잡힌 손을 보며 잠시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듯한 표정이 섞여 있었다.


준수가 그때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우린 해냈잖아. 힘들었지만 오늘도 버텼고, 내일도 그렇게 될 거야."


준수의 말에는 언제나 묵직한 힘이 담겨 있었다. 아이들은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 그 진실된 말이 주는 안도감에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의 목소리는 고된 하루를 마무리하며 아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맞아, 오늘 수제비도 많이 먹었지. 반장이 와서 아주머니들이 듬뿍 퍼주셨거든, "
한 아이가 미소 지으며 말을 꺼냈다. 그 말에 방 안에서는 작은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반장, 정말 대단하지 않냐? 반장이 오면 모든 게 조금 더 나아지는 것 같아, "
또 다른 아이가 덧붙였다.


"응, 맞아. 반장이 있으면 그냥 마음이 편해져, "
준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반장은 그들에게 단순한 친구가 아니었다. 그는 그들에게 작은 희망이었다. 그가 있으면 세상이 잠시라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있을까?"
한 아이가 호기심에 물었다. 그들은 고된 하루 속에서도 미래를 궁금해했다.


준수가 차분히 대답했다.
"내일도 오늘과 비슷할 거야. 힘들겠지만, 우리 힘내자. 우린 해낼 수 있어."


아이들은 준수의 말을 가슴속에 새기며 몸을 돌렸다. 힘든 하루였지만,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버텨냈고, 이렇게 잠자리에 누워 나누는 작은 대화는 그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서로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잘 자, "
준수가 조용히 속삭였다.


"잘 자, "
아이들이 하나둘씩 대답했다.


그렇게 아이들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잠에 들었다. 비록 그들의 하루는 힘들고 고됐지만, 그들은 서로의 따뜻한 존재와 대화 속에서 작은 희망을 찾고 있었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내일을 향해 다시 걸어갈 준비를 하며.




현주와 반장 4.


그렇게 그들은 바다 앞에 오래 머물렀다. 바닷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마음속에 묵던 감정들이 조금씩 흩어지며 대화는 점점 깊어졌다. 현주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조개껍데기를 만지작거리며 반장에게 물었다.


"너는 지금 행복해?"


반장은 잠시 멈춰, 생각했다. 성공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정작 ‘행복’이라는 단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공부와 미래에 대한 준비에 바쁜 나날을 보내며,  스스로의 감정을 돌아볼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행복... 글쎄, "

반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지금까지 행복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거 같아. 앞만 보고 달려온 것 같아."


현주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그랬던 것 같아. 모든 걸 다 잃고 나니, 행복이라는 게 뭐였는지 몰랐어.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반장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현주도 자신과 같은 상처를 안고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강해 보였던 그녀도 아픔을 겪고 있었고, 그 사실이 그의 마음을 울렸다.


"그래도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
반장은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조금씩 행복을 찾아가면 되지 않을까?"


현주는 그 말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행복을 찾아간다는 말... 낯설지만, 너라면 같이 해보고 싶어."


들의 대화는 그들 사이 새로운 약속처럼 들렸다. 과거의 아픔을 딛고, 이제 서로를 의지하며 나아가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때 반장은 주머니에서 작은 노트를 꺼냈다. 그 속에는 평소 적어두었던 짧은 문구들이 담겨 있었다. 다짐과 소중히 여긴 것들, 잊지 않고 싶었던 생각들이었다.


"여기, "
반장은 조심스럽게 노트를 건넸다.
"예전부터 적어둔 건데, 네가 읽어줬으면 해서."


현주는 노트를 받아 들고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거기에는 그의 진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짧고 강렬한 문구들이 그녀의 가슴에 깊이 와닿았다.


"이거, 네가 직접 쓴 거야?"
현주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반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끄럽게 웃었다.
"응.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은 거라 서툴지만... 언젠가 너한테 보여주고 싶었어."


현주는 노트를 천천히 다시 읽었다. 그 속에서 그의 외로움과 노력, 그리고 스스로에게 했던 약속들이 느껴졌다.


"참 대단해, "
현주가 조용히 말했다.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니... 나도 배우고 싶어."


반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대단한 건 아니야. 너도 이미 충분히 강해졌잖아. 이제 우린 서로 배워가면 돼."


그 순간 현주는 깨달았다. 자신이 혼자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반장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싸워왔다는 것을.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들 사이에 생긴 새로운 연결이 그들을 더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우리, 자주 보자, "
현주가 부드럽게 말했다.


반장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절대 놓지 않을 거야."


그들은 바다를 뒤로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발걸음은 전보다 가벼웠고, 마음속 짐은 조금 더 풀려나가고 있었다. 해운대의 밤은 깊어갔지만, 그들은 새로운 날을 향해 나가고 있었다.


그날 밤, 그들의 마음속에는 다시 시작할 용기와 함께 작은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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