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지금, 동양 최대의 백화점과 컨벤션센터, 현대 미술관이 빛을 발하며 도시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세련된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활기가 넘치지만, 화려한 풍경 아래에는 잊힌 과거가 깊게 묻혀 있다. 바로 그 자리는 오랫동안 미군 비행장이 자리 잡고 있었고, 주변 산들은 유격훈련장으로 사용되던 거친 공간이었다.
동네 이름도 '유격대'였다. 그 시절,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누군가 "니 어디 사노?" 하고 물으면, "유격대 산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때는 당연했던 그 이름과 풍경이 이제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채, 현대적인 도시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그 땅 아래 숨겨진 유격대와 훈련장의 기억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있다.
1980년대 초, 이곳은 황량하고 거칠었으며, 울퉁불퉁한 땅과 텅 빈 공터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이곳이 바로 강호초등학교 학생들이 흙먼지 속에서 뛰놀던 마을이었다.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흙바람을 맞으며 뛰어놀았고, 빈 공터가 그들의 놀이터였다. 오늘날 빽빽하게 들어선 화려한 건물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 시절의 마을은 가난했다. 주민들은 동네 곳곳에 자리 잡은 작은 공장들에서 힘겹게 생계를 이어갔다. 철수의 어머니는 콜라 공장에서 하루 종일 무거운 콜라 박스를 나르며 허리를 펼 새도 없었다. 현주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안경테 공장에서는 불빛 아래에서 피로에 찌든 얼굴들이 보였고, 그중에는 한때 태권도 유망주였던 영주의 아버지도 있었다.
바다에 나가 어부로 생활하는 이들도 있었다. 용수의 아버지는 나래의 아버지가 소유한 열 척의 배 중 하나를 타고, 거친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같은 하늘 아래서 힘겨운 하루를 묵묵히 버텨내며 살아가고 있었다.
용수의 아버지는 새벽마다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아 해운대와 광안리의 횟집들에 공급했다. 큰 수입이 되지 않는 작은 물고기들은 용수의 할머니가 바닷바람에 말려 시장에서 팔았다. 외항선을 타거나 먼 나라로 돈을 벌러 떠난 이들도 많았는데, 동진이의 아버지 역시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난 사람 중 하나였다.
아이들의 대화 속에는 다양한 배경들이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었다. 아버지들이 먼 타국에서 보내오는 돈이 가족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고, 남겨진 가족들은 그 돈으로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어린 시절부터 그들은 일찍 철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의 세계는 풍요로웠다. 마을 뒤편에 우뚝 솟은 산은 험하고 돌이 많았지만, 그 산에서 흘러나오는 개울물은 맑게 반짝였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깊은 숲 속에서는 산딸기가 붉게 익어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아이들은 산을 오르고 개울을 건너며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뛰놀았다.
개울가에서 가재를 잡는 일은 놀이 이상이었다. 작은 생명체가 손 안에서 꼼지락거릴 때면, 그들은 승리의 기쁨을 느꼈다. 자연은 그들에게 끝없는 모험과 기쁨을 주는 친구였다.
“형! 여기 산딸기 있어!” 한 아이가 외치면, 다른 아이들은 신나서 달려가 붉게 익은 산딸기를 손에 쥐고는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서로에게 자랑했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산딸기 즙을 빨아먹으며, "달다, 달아!"라고 외치는 그들의 얼굴에는 순수한 기쁨이 가득했다.
마을 뒤편에는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높은 산이 있었다. 산 정상까지 오르는 것은 철조망과 다양한 금지 팻말들로 인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 산은 아이들에게 모험의 장소로 여겨졌다. 산에는 정기가 흐른다는 소문이 돌았고, 기도자가 머물다 간 동굴과 굿을 하는 절이 산 곳곳에 있었다. 바위틈에는 과일과 음식들이 남겨져 있기도 했다.
산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서식했으며, 토끼, 노루, 멧돼지 같은 산짐승을 봤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비록 과장된 이야기일지 몰라도, 아이들에게 그 산은 상상과 모험이 가득한 신비로운 곳이었다.
“오늘은 꼭 정상까지 가보자!” 아이들은 외치며 산을 올랐고, 힘들 때면 서로를 끌어주며 끝내 정상에 도달했다. 정상에 서면, 멀리 펼쳐진 바다와 그 너머의 새로운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여름이 되면 개울은 그들의 피서지가 되었다. "이봐, 여기 올챙이 있어!" 누군가 외치면, 아이들은 바지 끝을 걷어붙이고 물에 뛰어들어 올챙이를 잡으려 애썼다. 미끄러져 물에 빠지기도 했지만, 자지러지게 웃으며 장난을 쳤다. 올챙이를 잡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 순간의 웃음이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강호국민학교는 학생들로 가득 찬 콩나물시루 같았다. 한 반에 60명이 꽉 들어차 있었고, 그런 학급이 무려 10개나 되는 교실은 아이들로 북적였다. 좁고 답답한 공간 속에서 아이들은 저마다의 작은 세계를 만들어가며 살아갔지만, 그 세계는 교실이라는 커다란 몸집에 갇혀버린 듯, 숨 막히는 곳이었다. 교실은 아이들의 호흡과 웃음, 때로는 눈물까지도 조용히 삼켜버렸다.
주변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잘 사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시골에서 올라와 힘겹게 도시 생활을 이어가던 빈민가 출신이었다. 그들은 가난과 싸우며 학교에 다녔지만, 그 안에서 작은 기쁨과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어가며 서로 의지하고 살았다.
"우리 아빠, 이번에 사우디에서 돈 벌고 돌아오면 새 자전거 사준다 했어!"
동진의 말에 아이들은 모두 부러움이 가득 담긴 눈빛을 보냈다. 자전거는 그들에게 자유와 속도의 상징이었고, 미래에 대한 설렘을 담은 꿈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비며 바람을 가르는 상상은 그들의 가장 큰 소망이자,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환상이었다.
아이들은 동진의 말을 듣고 저마다 작은 희망들을 속삭였다. 누군가는 새 운동화를, 누군가는 작은 장난감을 꿈꾸었지만, 모든 소망 속에서 자전거는 가장 찬란한 꿈으로 빛났다.
동네에는 고아원도 세 곳이나 있었고, 그곳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누구보다 빨리 어른이 되어야 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고아원 아이들 중 몇몇은 자신이 고아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함께 뛰놀고, 함께 웃었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오래된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듯 자연스러웠고, 개울물처럼 빠르고 강하게 흘러갔다. 그 순간만큼은 그들에게 고아라는 사실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저 아이로서 자유롭게 뛰어놀며 삶을 만끽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아원 아이들은 언제나 조금 떨어져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친구들과 어울렸지만, 그들 눈빛 속에는 자신들이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묵직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차이를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차이는 언제나 그들 사이에 존재했다.
때때로 그들의 눈빛에서 깊은 슬픔과 외로움이 비칠 때면, 순간 교실과 운동장에는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친구들은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웃음을 멈췄다. 비록 서로의 차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서로의 아픔을 알고 있었다.
마을의 작은 공장들은 언제나 톱니바퀴 소음과 기계 소리로 가득 차 있었고, 그곳에서 일하는 어른들은 묵묵히 그 소음을 견디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가끔 공장이 잠시 멈추는 날이면, 어른들은 아이들과 함께 산과 들로 나가 자연 속에서 잠깐의 평화를 찾았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풍경은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산을 스치는 바람 속에는 들꽃 향기가 섞여 있었고, 개울물이 바위를 때리는 시원한 소리는 모두의 마음을 맑게 씻어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마을의 고된 삶도 잠시 잊히고, 자연 속에서 작은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한국전쟁 때의 이야기가 아니다. 1980년대, 강호 국민학교 아이들의 이야기다. 척박한 땅 위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자란 그들은 거칠지만 따뜻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며, 그 속에서 친구들과 웃고 울며 세상을 배워나갔다. 어른들의 고단한 삶을 지켜보며 일찍 철이 들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과거의 기억이 아닌, 시대의 한 조각이었다.
그 시절 어른들의 세계는 힘겹고 고단했지만, 아이들의 세계는 그 나름대로 반짝였다. 저녁길을 걸어도 길가에 피어 있는 들꽃은 여전히 그들을 반겨주었고,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 속에서 아이들은 더 나은 내일과 밝은 미래를 꿈꾸었다.
"나중에 커서, 우리 꼭 여기서 다시 만나자. 우리 동네에서, 다시."
아이들은 그렇게 약속했다. 그들의 작은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 마을의 골목길을 지나, 그들의 미래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 약속은 그들의 가슴속 깊이 남아, 먼 훗날에도 희미하게나마 울리며 그들을 서로 이어주고 있었다.
그 시절, 아이들의 생활환경은 분명 가난했다.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여는 시간은 설렘이 아닌 부끄러움과 눈치 보는 시간이 되었다. 반찬이라고 해봐야 김치 몇 조각이 전부였고, 어떤 아이들은 밥만 담아 오는 경우도 많았다. 더 가슴 아픈 현실은, 밥조차 싸 오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교실 곳곳에서 그런 현실이 드러났지만, 아이들은 서로의 밥통을 힐끔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다. 배고픔과 부끄러움 속에서도 그들은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견뎠다.
강호국민학교의 진행우 선생님은 그런 아이들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였다. 점심시간이 되면 커피포트를 꺼내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커피포트 안에서 라면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교실은 순식간에 라면 냄새로 가득 찼다. 냄새는 배고픈 아이들에게 축복과도 같았다. 아이들은 그 향을 맡으며 군침을 삼키고는 선생님의 손짓을 기다렸다.
모두의 시선이 커피포트에 집중되었지만, 진행우 선생님은 늘 혼자 먹지 않았다.
“오늘은 누구랑 같이 먹을까?”
아이들 하나하나를 천천히 둘러보며 기다리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숨을 죽이며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길수야, 나와서 같이 먹자."
길수는 얼굴이 붉어진 채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 옆에 앉았다. 그 순간은 꿈을 이룬 듯한 기쁨이 가득했다.
아이들은 속으로 외쳤다. ‘내일은 내가 불릴 차례야.’ 그 기대감은 교실 안을 가득 채운 설렘으로 변했고, 모두가 선생님과 함께 라면을 먹는 꿈을 꾸며 서로에게 작은 희망을 나눴다.
선생님은 한 번에 모든 라면을 끓일 수 없었기에, 커피포트에 물을 다시 붓고 라면을 몇 번 더 끓였다. 라면 냄새가 교실을 다시금 채울 때마다 남은 아이들은 자신에게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며 침묵 속에 기대를 품었다. 라면이 끓는 동안 교실은 조용해졌다. 작은 특권을 누리는 아이들은 잠시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아이가 된 듯했다.
“라면 맛있지?” 선생님이 미소를 지으며 물으면, 아이들은 입을 맞춰 대답했다.
“네! 정말 맛있어요!”
그 순간, 그 라면 한 그릇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선생님의 따뜻한 배려와 사랑, 그리고 잠시나마 가난을 잊게 해주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진행우 선생님은 언제나 아이들에게 다정했고, 학생들 사이에서는 ‘진짱’이라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다리를 절게 만든 사연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에게는 감추고 싶은 아픔이 있었다.
진행우는 대학 시절 운동권 학생으로 활동하다, 정부의 탄압에 의해 녹화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징집된 경험이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험난한 환경 속에서 유실수를 심고 벌목을 하며 고된 노동을 견뎌야 했다. 비인간적인 대우와 과도한 노동은 그에게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남겼다. 특히, 어느 날 가파른 산길에서 벌어진 사고로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결국 그는 다리를 절게 되었지만, 상처를 안고도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진행우는 교사로 돌아온 후에도 상처를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속에서 배운 자유와 인간의 존엄에 대해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자신의 아픔을 통해 아이들에게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지, 억압 속에서 피어난 희망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려주고자 했다.
강호국민학교 근처에는 낡은 기차역이 있었다.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아이들은 기차의 쇳덩이가 땅을 울리며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등굣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 역에는 아이들을 보호할 장치 하나 없이 기찻길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차단기가 내려가는 동안 아이들은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고, 차단기가 올라가면 재빨리 철길을 뛰어넘었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야, 기차 온다! 빨리 넘어가!” 한 아이가 외치면 다른 아이들은 경주하듯 철길을 뛰어넘었다. 그들은 언제나 기차가 지나가기 전까지 아슬아슬하게 철길을 가로질렀고, 그 모험은 그들의 일상이었다.
교사들은 늘 아이들의 안전을 염려했지만, 철길을 넘나드는 일은 아이들에게는 오히려 놀이처럼 느껴졌다. 기찻길에서 친구를 잃은 기억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기찻길은 그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위험과 맞닿아 있는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철길을 건너는 일은 두려움이 아니라 일종의 모험이었다.
아이들은 학교 근처에 있는 군 유격장에서 떨어진 총알을 주워 모으거나, 공사장을 탐험하며 철근과 콘크리트 속에서 새로운 놀이를 찾아냈다. 기차가 지나갈 때 철로에 못을 놓아 기차가 못을 눌러 납작해지는 것을 보며 그것을 칼처럼 다듬어 놀았다.
위험이란 그들에게 하나의 장난이자, 일상 속의 모험이었다. 철길을 넘고, 총알을 줍고, 공사장에서 철근을 탐험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놀이였다. 어른들의 눈에는 위험천만해 보였지만, 그 속에서 아이들은 성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험난한 세상 속에서 자기들만의 규칙을 만들고, 그 속에서 삶을 배워가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강호국민학교의 운동장은 거대한 기마전의 전장이 되어 있었다. 이유도 없었고, 목적도 분명치 않았다. 그저 모든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서로의 어깨에 올라타, 군단을 이루어 운동장을 휘저었다. 그 광경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아가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길수와 동진이 짝을 지어 이인 기마로 시작했다. 두 명이 함께 달리며 서로의 균형을 맞추는 짜릿함은 새로운 세상을 정복하는 기분을 주었다. 이어서 영주가 합류하며 삼인 기마로, 그리고 이내 사인 기마로 발전해 갔다. 사인 기마는 전차처럼 크고 강력했다. 승차자가 앞에 선 아이의 목에 다리를 걸치고 타면 거대한 인간 탑이 완성되었고, 운동장 한가운데서 그들은 전사들처럼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이 싸움에는 전략도, 전술도 없었다. 편도 없고, 아군과 적군의 경계도 없었다. 심지어 학년조차 무의미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든 아이들이 기마전에 참여했고, 그 누구도 이 놀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운동장 전체가 전쟁터처럼 변했고, 그 위로 흙먼지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우와! 내가 이겼다!”
한 아이가 외치면, 다른 아이는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달려들었다. 승패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고, 서로를 밀치며 끊임없이 새로운 기마전을 시작했다.
사인 기마의 대장은 언제나 가장 강력했다. 승차자가 축구화를 신은 채 상대방에게 무차별적으로 발길질을 날리면, 충격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아픔을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고통 속에서 더 강해지는 듯, 이를 악물며 싸움에 다시 뛰어들었다.
“야! 기마 대장 나왔다! 피해라!”
누군가가 외치면, 아이들은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대장 기마를 쓰러뜨리는 일은 왕국을 정복하는 것과 같았고, 그 순간 운동장은 열기로 들끓었다.
기마전은 아이들에게 단순한 놀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만의 치열한 경쟁의 장이었고, 어른들이 알 수 없는 질서와 규칙이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흙먼지가 일고, 웃음과 외침이 뒤섞인 그곳에서 아이들은 자신만의 규칙 속에서 힘과 용기를 시험했다. 넘어지고 부딪히며 그들은 조금씩 더 강해졌다.
매일 반복된 이 기마전은 그들에게 일종의 의식이자 성장의 과정이었다.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서로를 이끌고 밀어내며 자신만의 세계에서 작은 승리를 쌓아갔다. 운동장은 그들의 전장이었고, 그 속에서 아이들은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자신들만의 질서를 찾아가며 강해지고 있었다.
강호국민학교가 자리한 동네는 점점 피난처가 되어갔다. 언제부터인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범죄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른 도시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헤매던 이들이 하나둘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마을의 좁은 골목들은 싸움 소리와 술 취한 사람들의 주정으로 가득 찼고, 그 사이로 종종 들려오는 경찰차 사이렌 소리는 마치 일상의 배경음악처럼 흘러갔다.
“또 경찰이네…” 아이들은 그런 소리에 무덤덤했다.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익숙한 일상의 일부였다. 어떤 집에서는 엄마가 갑자기 사라지고, 아버지가 경찰에 끌려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남겨진 아이들은 할아버지나 할머니 손에 자라났고, 친구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 속에는 ‘가족’이라는 단어보다 ‘생존’이 더 자주 등장했다.
“우리 할머니가 오늘도 도시락 싸줬어.” 한 아이가 자랑하듯 웃으며 말하면, 다른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가 라면 끓여줬어.” 그들은 부모 없이도 다양한 방식으로 자라났다. 그렇게 가족의 부재가 일상이 된 동네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강해지는 법을 터득했다.
고아원에서 생활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강호국민학교의 전교생 중 10퍼센트가 고아원 출신이었고,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알면서도 어깨를 펴고 살아가려 애썼다. 하지만 그들의 세계는 동심보다는 무림의 법칙에 가까웠다.
학교의 교실이나 운동장은 단순한 놀이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일종의 전장이었다. 다른 학교들처럼 성적 순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중요한 것은 ‘싸움 순위’였다. 누가 가장 싸움을 잘하는지, 그 순위는 매달 갱신되었다. 싸움은 단순한 다툼을 넘어선 질서였다. 누가 더 강한지, 누가 더 두려운 존재인지를 통해 학교 내의 서열이 결정되었다. 공부 순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곧 자부심이자 지위였다.
새로운 전학생이 오면 그들은 반드시 검증을 받아야 했다.
“전학생이 왔대!” 이 말이 운동장에 퍼지면, 곧바로 순위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전학생은 그날부터 일종의 ‘도전자’로 여겨졌다. 운동장에서 아이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자리를 잡고, 전학생의 실력을 시험했다.
“너 어디서 왔냐?” “서울.” “서울? 그럼 여기서 한번 붙어봐라.”
싸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서로의 힘을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힘이 곧 그들의 서열을 결정했다. 승자는 운동장의 중심에 서고, 패자는 그늘 속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패배가 끝은 아니었다. 언제든 다시 도전할 수 있었고, 다시 이기면 순위는 바뀔 수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경쟁하며 자신을 증명해 나갔다.
강호국민학교는 늘 시끌벅적했다. 흙먼지가 날리는 운동장에서는 매일같이 전투가 벌어졌다. 동심이 깃들어야 할 학교는, 무림의 법칙이 지배하는 전쟁터가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아이들은 단순히 싸움만을 배우지는 않았다. 그들은 서로에게 존중과 생존의 법칙을 익혔고, 혼돈 속에서 자신만의 질서와 힘을 쌓아갔다.
현주와 반장 1.
해운대 바다를 바라보던 둘은 고개를 돌리다 문득 눈이 마주쳤다.
반장은 현주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해운대도, 많이 변했네."
현주는 다시 고개를 돌려 말없이 파도만 바라보았다.출렁이는 파도 속에는 그녀의 지난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나, 사실... 중학교 때 많이 힘들었어. 그때 인사도 못하고 서울 가서, 너한테 말 못 했던 게 많아."
반장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국민학교 졸업 후 각자의 길을 걸으며 앞만 보고 달려왔다. 간혹 현주소식이 들려왔지만,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거나 마음에 새길 여유조차 없었던 자신이 떠올랐다.
"알고 있었어, " 반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늦은 거 알지만, 미안해."
현주는 놀란 듯 반장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바다로 돌렸다.
"네가 미안할 건 아니야. 그냥… 나도 아무 말 못 하고 갑작스럽게 떠났으니까."
둘은 말없이 파도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밤공기가 그들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현주는 과거의 상처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음속 무거운 짐이 조금이나마 덜어지는 것을 느꼈다. 바람이 그 무게를 실어 가는 듯했다.
"그래도 이렇게 다시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현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때처럼, 너는 여전히 나를 이해해 주네." 반장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들은 잃어버린 우정과 이해를 다시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현주는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멈칫했다. 아직 그에게 꺼내지 못한 비밀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