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시련
"누구나 강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말만 보고 무턱대고 뛰어든 나의 좌충우돌 진로 시련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 슬슬 제 앞가림할 때 즈음.
나는 학부모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차츰 교육을 들으러 찾아다니면서 나도 저렇게 강의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만약 강사라면 이렇게 저렇게 해야지.라는 대단한 포부까지 세웠다.
그러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진로교육강사로 먼저 시작하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무릇 강사라면 강의를 해야 하는데 그 한 번의 강의 기회를 잡는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트레이닝받을 때만 해도 이미 여러 번의 시연과 매서운 피드백을 받아서 지겹다 했는데, 산 넘어 산이었다. 그러던 중, 나에게도 기회란 것이 찾아왔다. 교육청에서 공모하는 강사로 지원을 했는데, 1차 심사에 합격한 것이었다. 쟁쟁하다고 듣긴 들었는데 그때까지는 얼떨떨했다. 2차 심사는 면접이었다. 나는 이 2차 심사에 만전을 기하였다. 떨지 않고 자신 있게. 당당한 내 모습을 위하여 블라우스와 정장도 준비하고, 그에 맞는 구두도 샀다. 드디어 심사 날이 왔다. 우황청심원도 먹고 만반의 준비를 한 나. 새 구두를 신고 당당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웠다. 그 걸음걸이 때문인지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그날 그 버스를 놓친 게 복선이었을까. 아니다. 다음 버스를 타고 내리는데 등에서 무언가 부~욱~ 하는 소리가 나더니 얇디얇은 블라우스가 그만 쟈켓 안에서 터지고 말았다. 그날 놓친 버스부터 복장까지 모든 게 다 복선 투성이었던 것 같다.
대기실에 들어가니 베테랑 강사들이 수두룩했다. 그 대기실에 있던 대기자들만 보고도 나는 실패를 예감했다. 우황청심원을 먹은 효과는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바이브레이션이 마구 들어간, 시종일관 떨리는 음성으로 면접을 보고 나왔다. 내가 이것밖에 안되나 처참한 심정이었다. 면접장이 우리 집과 얼마 떨어지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또 복장이 터질까 봐 버스를 타기 싫어서였는지 나는 터덜터덜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걸어오는 길 서러운 생각에 뜨거운 용암 같은 무언가가 눈에서 솟구쳐 올랐다. 얼마나 더 해야 할까. 얼마나 더 성장해야 할까.
늘어나는 생활비에 한숨 쉬는 남편 얼굴과 무엇이든 하고 싶을 나이인 아이들 얼굴, 그리고 나만 바라보고 있는 우리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이래서는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조바심과 함께 이 길이 정녕 내 길일까 하는 생각에 사무쳤다. 결혼하기 전에는 매일매일이 정장이고 주말까지 7일 내내 하이힐만 신던 내가, 그동안 애둘엄마로 산다고 정장이 어색하고, 3cm짜리 단화 구두가 부자연스러워진 것이다. 나 자신이 한없이 작고 초라했다. 노을 지는 허공만 쳐다보며 한참을 걷다 보니 이번엔 또 발 뒤꿈치에서 무언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잠깐 멈춰보니 새 구두를 신고 많이 걸어서인지 뒤꿈치가 다 까이고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아픈지도 모르고 걸었던 것이다. 상처를 인지했을 때는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신던 운동화를 들고 마중을 나오셨다. 구두를 벗으니 피가 발바닥까지 흘러 내려왔다. 엄마의 눈에서도 볼을 타고 뜨거운 응어리가 흘렀다. 엄마가 눈물로 신겨준 운동화를 신고 엄마 손잡고 집까지 용케 걸어갔다. 그렇게 긴긴 하루가 저물었다. 퇴근한 남편이 얘기를 다 듣고선 괜찮다고 툭툭 내 어깨를 두드리며 별명을 지어줬다.
'서촌 피발 바닥'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