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에너지가 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우리는 어떤 활동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과를 기대하거나 염두에 두고 하게 됩니다. 특히 성인이 될수록 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인풋과 아웃풋의 차이를 비교하며 내가 쏟은 것이 대한 보상을 바랍니다.
인풋과 아웃풋에 있어서 정답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어떤 경험에 의해서 이 정도의 에너지와 노력을 쏟는다면 이 정도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적정선은 점점 생기게 됩니다. 혹은 사회적으로 그런 기준이 있기도 합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커다란 아웃풋의 하나로 돈이 기대되기도 합니다. 느끼기에 일한 정도보다 적은 돈을 받는다든가, 돈에 비해서 내가 쏟아야할 에너지가 너무 크다고 느끼는 행위는 기피를 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돈은 중요한 보상의 기준이 되어 있습니다. 혹은 돈을 준다면 그 전에 그냥은 안 하는 일을 하려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돈은 반드시 내 노력만큼 주어지지 않을 때가 많고 시장가격에 의해 형성이 되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조절하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내 노력이 얼마나 돈으로 환산되느냐의 가치를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된 가격을 보고 내가 그럼에도 그 일을 할지 하지 않을지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노력에 의한 실력의 향상, 성적의 향상, 어떤 물건의 완성 등의 성취가 포함된 부분은 마치 좀 더 내 노력 여하에 달렸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도 내가 가진 배경지식, 타고난 신체조건, 성향 등에 따라서 결과가 천차만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교를 시작합니다. 나랑 같은 시간을 들인 것 같은데 나는 해내지 못한 것을 누군가가 해내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 상대적인 박탈감과 자괴감을 느낍니다. 그 비교의 늪에 빠지는 순간 행복으로의 탈출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동일한 선상에 있는 것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송사리와 조개가 누가 다 헤엄을 잘 치는지 비교하지 않습니다. 잠자리와 날파리가 누가 더 잘 나는지도 비교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바다코끼리와 북극곰 중에서 누가 더 뛰어난지 비교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비교할 수 있는 선에 놓여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누가 더 뛰어나고 누가 덜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이미 그런 사고를 시작하는 순간 비교의 늪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비슷하거나 같다고 전제를 하고 비교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개개인이 타고 나고 또 사회 속에서 형성된 성향, 선호도, 마음, 성격, 취향은 저마다 다릅니다. 가정환경도 다르고 그것은 심지어 형제자매간에도 다른 부모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 개인들을 줄 세우기 하면서 똑같은 목적과 똑같은 목표 속에서 더 뛰어나고 덜 뛰어남을 가리는 행위는 모두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개개인이 가진 고유성 자체가 무시되기 때문입니다. 각자 개인의 목적, 목표는 그 개인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는 정답을 정해놓고 그 정답에 도달하느냐 마느냐로 개인을 구분하고 줄을 세웁니다. 결혼을 했는가, 대학을 나왔는가, 대기업에 들어갔는가, 자녀는 있는가 등 그 줄 세우기와 분류의 기준은 다양합니다. 그리고 그 줄 세우기는 이미 청소년기부터 시작됩니다. 교육과정은 개개인이 자신을 알아가고 삶의 목표를 세우고 자신의 고유한 색깔을 찾아가는 것을 돕도록 설계되어있지 않습니다. 각자의 개인을 성적이라는 숫자로 가치 평가를 하면서 줄 세우기를 합니다. 그 안에는 누군가는 어떤 과목에 더 능하고 훨씬 깊이가 생길 수 있고 누군가는 다른 분야에 자신이 두근거리고 행복감을 느끼리라는 것은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과목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습니다. 국어, 수학, 사회, 과학, 영어 이 과목들의 객관식 문제를 다른 사람보다 정답을 더 많이 풀어내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그 개인을 평가하고 줄 세우기를 합니다. 그 자리에는 그 사람의 말씨나 대화법, 사람을 대하고 사귀는 방식,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은 처음부터 설 자리가 없습니다. 개개인이 뭘 흥미로워하고 하고 싶은지에 대한 관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험 앞에 개개인은 얼굴 없고 목소리 없는 객체가 되어서 성적이라는 이름 아래 줄 세우기가 될 뿐입니다. 모두 동일한 문제를 풀면서 그 점수로 줄 세우기가 됩니다. 애초에 너무나 다양한 개인을 동일한 문제로 마치 그들이 서로 비슷한 조건 속에서 능력을 측정하는 것인 양 세뇌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비교할 수 있음을 학습당합니다.
그러면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을 사회에서 정하면서 개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개개인에게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 스스로 어떤 삶을 살고 싶고 무엇이 되고 싶은가를 물어볼 시간을 가지기 전에 이미 그들이 해야 할 일, 목표와 정답을 쥐어줍니다. 그것은 사다리의 꼭대기기, 비교의 정상입니다. 그리고 그 사다리의 특성 상 꼭대기기에 존재 할 수 있는 것은 한명 뿐입니다. 나머지는 다 실패자가 되고 박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정상에 선 자도 우월감을 느끼며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게 되기도 합니다. 어느 무엇도 서로가 서로를 진정으로 만나고 이해하고 마음이 통하는 길로 나아가게 되는 과정에서 벗어나있습니다. 줄 세우기는 서로가 존중하고 도우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좌절하고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그 바랐던 결과가 무엇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와 비교하는 상대적인 박탈감이 아닌가도 주목해야 합니다. 어떤 결과도 쉽게 주어지는 것은 드뭅니다. 그리고 쉽게 주어지는 결과와 노력해서 주어지는 결과는 설사 밖에서 볼 때 동일하다 할지라도 그 개인에게 가지는 비중과 의미가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결과만큼이나 그 과정, 하루하루의 일상 자체가 그 개인의 삶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끝이 아닌 지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설정한 목표와 그것의 달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는 다시 설정될 수도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추구되어야하는 그래야만 그 사람이 행복해지고 잘되는 하나의 목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설사 대부분의 수험생이 꿈꾸는 서울대라고 할지라도 그 대학에서의 하루하루의 일상의 경험이 본인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 없을지는 개인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세상이 정해준 목표가 아니라 나와 만나가며 내가설계하고 설정하는 목표를 만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목표가 골이 아닙니다. 목표는 어쩌면 이를테면 지속하기 위한 꾸준한 과정을 위한 하나의 화살표, 방향성 같은 것에 더 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