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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fessor Sunny Sep 08. 2021

세 자매의 둘째로 살기

어린 시절 이야기

어느 집이나 형제자매가 있는 집은 그 관계를 한 번씩 생각해보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우리 집의 경우 내가 불혹으로 접어들면서 동생은 34살, 언니는 43살이 되었다. 우리 세 자매는 굉장히 우애가 좋은 편이다. 원래도 큰 문제없이 흘러가던 어릴 때의 모습에서, 성인이 된 채로 더 세련된 관계를 유지하는 자매가 되기까지는 세 자매 각각 나름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철저히 내 기억에 의존해 이 관계의 역사를 기술해보자면, 서로 간에 나이 차이가 꽤 나던 우리 자매는, 어릴 때는 관계가 꽤 애매했다. 특히 9살 나이 차이가 나는 언니와 동생은, 오랜 시간 ‘다 성장한 여성’과 ‘어린이’의 모습으로 자매관계가 유지되곤 했는데, 그 서열 차이는 어마어마했고 동생은 매우 파이팅이 넘치던 언니를 꽤 무서워했다. 나는 그 사이에 낀 둘째로서, 어떨 때는 그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고- 특히 동생 편을 들면서- 어떨 때는 둘의 갈등에서 방관자로 있었다. 돌아보면 그 당시 약자였던 동생은 그게 나한테 굉장히 섭섭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언니와 나는 어릴 때부터 성향이 굉장히 달랐고, 잘 어우러지는 타입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나 스스로도 그랬고, 언니도 나와 다른 결로 잘 어우러지는 타입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언니는 늘 무엇인가에 진지하게 몰두해 있는 타입이었다. 그런 성정은 그녀가 후에 공부로 이름을 날리는 데에 큰 밑거름이 되었을 거 같다. 우리 둘은 그렇게 선을 잘 지켜가면서 서로를 건들지 않았고, 기억에 남는 자매 다툼이란 게 없이 성장했다.  


동생과 나는 다른 느낌의 관계였다.  내가 7살이던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고, 티브이로 그 올림픽을 봤던 기억이 있다. 그즈음 동생이 태어났다. 아들을 엄청 바랬던 우리 부모님은 또 딸을 봤다며 실망을 했겠지만, 사실 그 자녀는 사는 내내 우리 가족에게 큰 버퍼가 되어주었다. 동생이 태어나서 집으로 온 날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언니도 같은 기억이 있다고 들은 거 같다. 안방에 누워 그 더운 여름날에 이불에 돌돌 싸여서 빽빽 울어대는데, 한동안 그런 갓난이를 못 봤던 7살과 10살 아이에게는 그 모습이 굉장한 문화충격이었다. 언니도 나도 ‘아기’라고 생각했을 때 떠오른 이미지와 동생의 모습이 거리가 있었는지, 우리 둘은 안방의 문지방 앞에서 넘지 않고 그 밖에 서서 말도 없이, 우는 그 동생을 한참을 지켜봤다. 


나는 동생을 꽤나 살뜰히 챙긴 편이었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동생은 어느 순간 나보다 훌쩍이나 커졌는데, 모두들 키가 큰 우리 집 가족 중 어느새 내가 제일 난쟁이가 되어 있었다. 언니는 170cm , 동생은 176cm로 크는 동안, 나는 혼자 163cm으로 남아있었다.  동생이 태어나면서, 사실 집안에서 없던  내 입지가 더 줄어들게 되긴 했는데, 그 대신 더 큰 자유를 얻었다.  아무도 나에게 큰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크게 공부에 뜻이 있지 않았는데, 늘 반에서 10등 언저리를 했던 거 같다. 그래도 아무도 나에게 공부를 하라고 재촉하지 않았는데, 나는 그게 너무 좋았다. 공부를 유독 빼어나게 잘했던 언니가 부모님의 잔소리를 다 먹었던 거 같기도 하지만. 어느 날인가 동생과 중학교 졸업앨범을 보다가, 그 사이 꽂아져 있던 중학교 1학년 성적표에 영어 ‘양’ 성적에 동생이 나보고 “언니 이렇게 공부를 못했냐?” 충격받은 얼굴을 했었다.  아빠는 그즈음 나를  “가방 장사”라고 불렀다. 무려 12년 개근에 빛나는 학교를 열심히 다니는 그냥 성실한 학생이었다.   



여하튼, 나는 그 큰 동생을 마치 내 자식처럼 예뻐했다. 특히 내가 직접 자식을 낳아보니, 내가 지금 내 자식을 보고 있는 그런 마음과 태도로 동생을 봐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릴 적엔 내가 친구들과 놀 때도 동생을 데려가고, 뭘 먹을 때도 나는 동생을 챙겨줬다. 옆 사람을 신경 쓰고 살아야 하는 이유와 보람에 대해 깨치게 해 준 여린 존재라고 할까. 한 사람이 커가는 모습을 꾸준히 봤다는 건 굉장히 신기한 일이다. 질적 연구 방법론 중에 Ethnography (민족지학- 한국말로는 잘 모르겠다)라는 방법이 있는데, 현상이 일어나는 장소에 들어가 장시간 그 문화와 생태를 경험하고 관찰한 후 결과를 내는 방법이다. 한 부족, 부락의 습성이나 문화, 아니면 특이하게 갱 (gang) 단으로 서의 삶을 보는 연구들이 있어왔다. 


자매 관계는 세상 어떤 관계보다 장기전이다. 한 사람이 건강하게 100세 시대를 누린다는 가정하에 부모보다, 배우자보다 더 오래 볼 관계로 남는다. 우리 세 자매의 관계 정립은, 그 세 자매 모두가 현장에 뛰어들어 Ethnographical adjustment (민족지학적 방법으로 관계 조율)을 통해서 해왔을 것이다. 그만큼 서로 가까이서, 관심 있게 서로를 탐색하고, 각각의 행동을 조율했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관계 정립을 마쳤다. 그러는 동안, 내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내가 흑역사라 기억하는 순간순간에 나의 자매들이 종종 등장한다. 그것은 평생의 놀림거리로 남고, 이제는 즐거운 이벤트였다고 말할 수 있지만. 

또 우리 관계가 발전하는 데에는  ‘시간’도 한몫을 했다. 시간이 지나 모두 성인이 되고, 같이 늙어간다라는 느낌이 생기면서, 관계가 좀 더 동등해졌다. 아니, 이제 가장 젊고 에너지가 넘치는 동생이 이제 서열의 최상위로 치고 올라왔는지도 모르겠다.


생판 모르는 두 사람이 부부가 돼서 맞춰가는 과도기를 겪듯이, 한부모에게 나온 우리 세 자매도 30년이 더 넘는 조용한 전쟁 끝에, 서로의 선을 지켜주고, 기분을 맞춰주고, 좋은 날은 같이 좋아해 주고, 힘든 날은 진심을 담아 위로해줄 수 있는 능력의 무기들을 각각 지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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