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에서는 수도에서 정착하세요.
중남미라고 사실 만만하게 본 것도 있었다. 한국돈 3000만원을 들고 남미 페루를 가서 우리나라보다 생활비의 1/3만 사용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나라. 강도가 비일비재한 그런 나라. 버스에 탑승해서 창문 근처에서 핸드폰 들고 있으면 창 밖에서 핸드폰을 낚아 채가는 나라. 그런 나라가 남미 페루다. 우리는 그냥 너무 가볍게만 생각을 하고 간 것같다. 그게 화근이었을까?
한국인을 만났지만 정말 엉망인 사람을 만났고 바보같이 생판 남을 믿은 우리가 진짜 바보 같았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상대방은 우리에게 나쁜 행동을 하려고 했겠지만 그걸 보고 선의라고 생각하며 다가간 우리가 잘못이라고 해야하는 그런 상황인 것이다. 사실 이제는 더이상 우앙까요라는 지방도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건 전혀 없었다.
비자도 물거품이었고 우리에게 존재하는건 집다운 집 하나 월세로 얻은거 말고는 없었으니까.. 결국은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페루의 수도 리마로 내려가기로 결정을 했다. 그걸 결정하기까지도 거의 3개월이 걸린 것 같다. 그동안 리마에서도 어떻게 우리가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고 결국은 종교의 힘을 빌리기로 결정을 했었다. 한인교회는 가기 싫었기 때문에 페루에 거주하는 내 나이와 김오빠 또래의 커뮤니티를 찾아봤다.
그 중에서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리마에 사는 김오빠와 동갑인 A오빠를 만나게 됐다. 파라과이 여자분과 결혼을 하시고 아들이 하나 있는 사람. 리마에서 한국 게임회사를 다니며 직장으로 지내고 있는 분이었다. 믿는건 아니었지만 그 분과 통화를 하게 되었고 우리의 사정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그 분은 친한 신부님이 있다며 그 분을 소개해주셨다. 거의 비슷한 또래들의 커뮤티가 형성됐다.
우선 집주인에게 1년을 계약했지만 그 계약을 취소해야 하는 부분에 있어서 우리를 도와줬던 도리스와 함께 정중히 사과를 드리며 설명을 드렸다. 페루분인 주인분은 분노를 하셨다. 우리에게 화가난게 아니라 그 한국인 강씨에게 그렇게 화가 났던 것이다.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하고 사람을 이 먼곳까지 불러서 그런 대우를 할 수 있느냐 이게 주 된 원인.
현지인이 들어도 황당한 사건. 일요시장에 대해 문의를 드렸더니 집주인 분께서는 시청에 직접 문의를 해주셨다. 집 계약을 이어가던 못 이어가던 그걸 다 떠나서 리마로 가기로 결정을 했지만 강씨가 우리에게 했던 말들이 거짓인지 사실인지를 알기 위해서 직접 발벗고 나선 것이다. 집주인이 시청에 확인 결과 일요시장은 우리 조건에서는 신청을 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일요시장의 조건은 나랑 같이 일 할 현지인 종업원이 2명이상 무조건 있어야 했고 푸드트럭같은 공간을 제작해야 했다. 그 공간 또한 시청에서 직접 허가를 내줘야 제작이 가능했다. 시장에 자리는 시청에서 자동으로 배치를 해주는데 참가금이 있어서 돈을 내는대로 (액수) 좋은 자리로 배정을 받기도 하는 그런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거주비자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조건이었다.
집주인은 시청을 다녀온 뒤, 우리에게 이야기 했다.
-너희는 어짜피 여기서 오래 산다고 했어도 문제가 있었을 것같아. 신분증이 있어야 하는데 여행객 신분으로는 이곳에서 일요시장이나 다른 장사 어떤것도 할 수가 없겠더라. 리마로 가는게 좋겠어. 수도로 가면 대사관도 있고 너희를 도와줄 다른 한국인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집주인은 그렇게 우리를 보내주셨다. 월세를 더 받지도 않았고 오히려 한 달치 월세를 받았던 돈을 돌려주시며 3개월간 즐거웠다고 또다시 이런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는 말과 함께 이삿짐 센터도 불러주셨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내려가기로 했고 우리의 이삿짐들은 차량을 불러 리마까지 이동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현지인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끼기는 처음인 것같았다.
리마로 이동을 하는것 자체가 우리에겐 너무나 큰 부담이었던 것같다. 키로수로는 서울-부산 거리도 되지 않는 그런 거리인데 산자락을 넘어가다보니 4800미터까지 올라갔다 내려와서 길이 너무 구불구불하고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리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집주인과 도리스의 도움으로 침대 매트리스와 옷장등을 다 이동할 수 있었다.
약 3개월간의 페루 우앙까요의 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우리는 리마로 내려왔고 리마 버스정류장에서는 또 다른 우리 또래의 한국인 A오빠가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원이라 그런지 개인 차량도 있었다. 우선은 리마에 집이 없었기 때문에 그 분집에서 당분간 지내기로 했다. 다행인지 타이밍이 아주 좋게 그 분의 부인과 아이가 파라과이에 있는 친정집에 가 있는 상태였어서 A오빠가 혼자 집을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3일 정도만 집을 빌려쓰기로 했고 밖에 나가서 숙소를 구하기로 했다.
하지만 A오빠와 소개해주셨던 신부님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를 도와주셨다. 같은 또래에 결혼하고 아이도 있고 그렇다보니 진짜 우리에게 빙의하듯 도와주신 것같다. 몇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는 그분들을 절대 잊지 못한다. 이 고마움은 언젠가는 갚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하고 있는 중이다. A오빠는 한국에서 페루로 왔을때 스페인어를 잘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여기서 학원도 다니고 부인도 파라과이 사람인지라 스페인어에 노출이 되어 공부를 할 기회가 많았다고 한다.
여기저기 인터넷을 찾아보고 전화를 해줬고 기적같이 우리는 리마에 내려간지 3일도 채 되지 않아 집을 구할 수 있었다. 그것도 방과 거실 주방이 모두 따로 있는 볕이 잘 드는 바닷가 옆의 아파트. 지방과 월세도 크게 차이가 없었다. 집주인 부부도 우앙까요 집주인 만큼이나 너무 친절하고 좋았다. 페루사람들은 한국사람들 만큼이나 정이 많은데 우리가 한국에서 온 줄 알고 있다가 우앙까요에서 왔다고 했더니 너무 신기해하며 우리의 이야기를 듣길 바라는 모습이었다.
할 말은 산더미 같은데 스페인어를 너무 못해서 모든걸 전달하지 못해 답답했던 것같다. 지금도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듣고 말하는데 문제가 없어서 그런지 지금은 꼭 전해주고 싶은데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들의 리마 생활이 새롭게 시작이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