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유치원에 우리들은 안정권에...
리마에 내려와서 신부님부터 시작해서 나이가 비슷한 또래들의 모임에서 우리들을 정말 많이 도와주셨다. 페루 리마에 있는 대한항공 카고담당 오빠네 부부, STX 다니시던 오빠, 코이카로 와서 자리를 잡은 동생들, 무역관 홍지, 교회에서 알게된 원단시장 사장님, 아씨마켓 사장님, 그리고 나보다 언니들이었던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는) 리마 민박집 언니네, 쿠스코 가장 오래된 한식당 언니네까지 정말 수 많은 사람이 우리를 도와줬다.
우리들의 사연을 듣고 집 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매끼마다 식사를 했는지 여부와 아이도 있는데 괜찮은지를 정말 많이 챙겨주셨던 것 같다. 우선 너무 운이 좋게도 A오빠의 활약으로 그 오빠 주변에 있는 아파트로 월세를 구할 수 있었다. 리마로 내려간지 3일만에 이룬 쾌거였다. 게다가 주인은 고등학교 교사였는데 아시아 문화를 전공한 사람이라 우리랑 이야기를 조금 한 뒤, 금방 우리를 파악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들을 해주기 시작했다.
페루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 이라는 베이스와 비슷한 삶을 살아간다. 물론 개발도상국이라서 일인당 GDP는 최악이지만 그래도 사는 사람들은 빈부격차가 클 정도로 산다는 게 특징이고 또한, 사람들이 너나 할 것없이 매우 친절하고 도움을 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저것 눈치보고 재고 따지고 그런게 없이 이야기를 조금 하다보면 금방 친해짐을 알 수 있다.
리마로 내려와서 좋았던 것들이 너무 많았지만 그 중 한 가지는 바로 내가 얻은 집에서 한국인 여행객들을 맞이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장 거주할 비자가 없었던 우리들은 외부로 나가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또 아이가 유치원에 가는게 중요하다는 주변 조언에 따라 스페인어를 잘 하는 분들과 함께 동네에 있는 유치원에 방문해서 상담을 받았고 큰 애를 바로 유치원에 보낼 수 있었다. 페루의 어린이집, 유치원은 도시락을 만들어서 보내야 한다. 점심시간에 한국처럼 따로 밥이 나오거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집에서 늘 점심 도시락을 만들어 보내야 한다. 이참에 잘 됐다 싶은 생각이 들어 간단하지만 특별해보일 수 있는 한국음식들을 만들어 보내기 시작했다. 꼬마김밥부터 시작해서 한국식 토스트, 볶음밥 등을 만들어 보냈다. 아이들은 신기해했고 선생님들도 한국인 이라는걸 신기해 하던 찰나에 우리랑 문화를 교류할 수 있었다.
중남미는 장기여행자들이 참 많은 국가들이다. 특히 페루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잉카문명의 시초가 페루이다. 마추픽추, 소금산, 나스카 고대문양, 잉카문명, 백색의 도시, 무지개 사막인 해발 5000미터 사막산 비니쿤카, 악어고기 씹는 이카 등 진짜 수없는 문명들이 존재하고 남아 있는 곳이 바로 페루이기 때문에 정말 많은 배낭여행자들이 방문을 한다. 그러다보면 리마에 많은 한식당을 방문해서 한국음식을 먹곤 하는데 문제는 비싸다는 것이다. 비슷한 나이 또래들끼리 만든 단톡방이 있었고 점점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행하는 분들이 들어와서 이것 저것 질문을 하시면 답변도 해드리고 정보도 드리는 그런 역할을 우리들이 다 같이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제 비싸다는 한식의 이야기가 나오게 되어 장사를 하고 비자를 고민하는 동안 우리집에서 하숙은 아니지만 가정식으로 식사를 판매하기로 했다.
메뉴는 그때그때 달랐다. 만약 어떤 여행객이 오시겠다고 연락이 오거나 다른 분을 통해서 연락을 받게 되면 그 분이 못 드시는 음식이 있는지를 물어본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주문을 하는 음식을 토대로 해드기도 했고 오늘은 특별히 만든게 있다고 하며 오셔서 드시기만 하면 된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주로 주문이 오던 메뉴들은 김치찌개, 된장찌개가 거의 투탑이었고 떡볶이 김밥도 제법 연락이 많이 왔다. 다행히 페루는 한식을 위한 재료들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김치볶음밥을 먹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손님이 방문을 하시면 금액은 정해진 금액으로 받지만 솥단지로 드리고 눌린밥까지 같이 다 퍼드렸다. 진짜 배 찢어지게 드시고 화이팅 하시며 다시 여행의 길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는것도 참 뿌듯하긴 했다. 이렇게 운영을 하는게 합법적이진 않다.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한 노력중 하나였기에 그냥 합리화를 시키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 비자는 어떻게 해야할까? 라는 고민이 계속 들던 어느날, 신부님이 우리에게 현지인 동생을 한 명 소개해주셨다. 이름은 야넬리. 한국문화를 굉장히 좋아하고 한국사람을 정말 좋아하는 친구였다. 영어랑 스페인어만 할 줄 알고 한국어는 못 하는게 다소 아쉬웠지만 어짜피 우리도 언어를 배워야하는 입장이었으니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야넬리와 스페인어 연습을 할 수 있었고 난 추천을 받아 어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아주 기초레벨부터 시작을 해서 3개월 정도를 다녔다. 어느정도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정도의 레벨이 됐다. 너무 순식간에 언어가 늘어난게 신기할 정도였다.
야넬리와 적당선 이상으로 친해지고 난 뒤, 우리의 고민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비자 문제로 인한 거주를 논하게 된 자리가 있었다. 그때 야넬리는 곰곰히 고민을 하다가 우리가 앞으로 가게를 오픈하려고 하는 상황이고 거주를 하려면 비자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한 뒤, 본인의 사촌이 세무사로 일을 하고 있고 그의 누나는 변호사로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그들에게 문의를 하고 상의를 한 다음에 이야기를 해주겠다는 뜻밖의 이야기를 전해줬다. 이런이야기를 듣게 되면 사람은 보통 희망이라는 것을 갖게 되고 "혹시? 설마?"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뜻밖에 들었던 야넬리의 사촌들은 날 만나고 싶어했다. 페루사람 답지 않게 재빠르게 약속을 잡더니 좀 멀지만 자기들 집으로 우리를 초대해줬다. 가족들과 버스를 타고 먼길을 향해 방문을 하게 됐다. 전문적인 스페인어가 난무를 하던 자리에서 영어와 스페인어를 혼합해서 사용을 해준덕에 그들에 날 보고 싶어했던 이유들에 대해서 어느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내 비자를 해결해주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돈을 바라거나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가족들 모두가 한국이라는 나라를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이라는게 이유였다. 게다가 가족간의 정이 워낙 끈끈한 페루에서 사촌 동생이 이야기를 하니 사촌언니,오빠가 들어주는 셈이었던 것. 그들이 말하는건 이런 내용들이었다.
-내가 세무사잖아? 그리고 누나가 변호사잖아. 그러니까 누나가 회사를 하나 설립하고 내가 세무사로서 관리를 하는 담당이 되고 우리가 사업자와 재무관리를 동시에 해서 그 사업자 안에 너랑 네 남편이 직원으로 들어오는거야. 그리고 그 계약서를 가지고 이민청을 가서 비자를 신청하는거지. 우리가 회사를 만들때 업종을 무역이나 국제 쪽으로 찾아서 세금을 최소로 낼 수 있는 사업장을 낼게. 대신 그 사업장에서 너희가 직접 가게를 운영할 수 있도록 연관되게 만들테니까 그렇게 해볼래?
우리에겐 정말 단비같은 제안이었다. 아무것도 바라는거 없이 이런 제안을 해주는 사람들이라니.. 우리에겐 선택을 하고 말고의 무언가가 없었던 것 같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