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단의 치트키
어린 시절, 여름이 오면 엄마는 백태콩을 불리고 삶고 갈아서 콩국수를 하셨다. 에어컨도 없던 그때, 불 앞에 한참을 서야 했던 엄마의 노고는 생각지도 못한 나는, 냉면이 더 좋은데, 텁텁한 콩국수가 밥상에 올라오는 게 내심 못마땅했다. (그렇다고 안 먹은 건 아니고, 먹긴 잘 먹었다.)
소금이냐, 설탕이냐 논란이 많지만, 어떤 걸 넣든 웬만큼 넣어서는 텁텁한 콩 맛을 이길 수 없어서, 소금이든 설탕이든 넣을 땐 아주 왕창 넣어 먹었다.
그러던 나도, 나이가 드는지, 몇 년 전부터 여름이 오면 콩국수를 찾아먹기 시작했다. 문제는 직접 갈아 만든 걸쭉한 콩국수 한 그릇은 만 원대 후반에서 2만 원에 육박한다는 점이다.
가격이 부담되니 콩물을 사서 해 먹었는데, 먹다 보니 콩물 자체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여름에만 먹던 콩국수를 사계절, 콩물을 주문해 먹거나 근처 두부가게 가서 사다 먹기에 이르렀다.
어릴 땐 텁텁하고 맛없던 게 지금은 간 없이 먹어도 그렇게 고소하고 맛있다.
최근에 들은 사실은, 콩국수는 아빠가 좋아하시는 메뉴라 아직도 자주 하신다고 한다. 입맛도 유전이란 사실보다 아직도 엄마가 콩물을 갈고 있음에 깜짝 놀랐다.
“엄마, 날도 더운데 뭘 자꾸 해.. 그냥 사드셔.”
라는 나의 말에, 엄마는 이젠 세상이 좋아져서, 두유메이커 하나면 30분 내로 따끈한 콩물을 만들 수 있다며, 나도 써 보라고 하나 사주셨다.
만원 정도 주고 서리태콩 한 봉지를 사서, 한 줌을 씻어 불렸다가 기계에 넣고 버튼을 누르면 콩물이 완성됐다.
다 된 콩물을 식혀 냉장고에 넣어두고 매일 먹는다.
출출할 때, 시원한 거 먹고 싶을 때, 단백질 챙기고 싶을 때, 아무 때고 먹는다.
어제 점심은 걸쭉한 콩국물에 우무를 말아 콩국수를 해 먹었다.
백밀가루를 피하는 내게 먹어보라며 엄마가 보내주셨다. 덕분에 평생 안 먹어봤을 ‘우무’라는 식재료도 접하게 됐다.
우무는 ‘無’ 맛이다. 아무 맛이 없고, 식감만 있다.
사실 나는 한 끼, 한 끼가 소중해서, 이렇게 식감만 있고 배 채우기용 식품을 좋아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콩물’을 끼니로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만족스럽다.
콩물을 이렇게 열심히 먹는 이유는, ‘맛있어서’가 가장 크지만, 콩이 식물성 단백질 보충에도 좋기 때문이다.
단백질양을 크게 신경 쓰고 살아 본 적이 없는데, 기능재활치료를 시작하며 근육의 중요성에 대해 알게 됐고, 운동 못지않게 먹거리의 중요성도 알게 됐다.
특히, 단백질과 식이섬유를 꼬박꼬박 챙기는데, 이렇게 식단을 신경 써서 먹으려니 음식을 먹기 전이면 항상 저울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음식을 앞에 두고도,
‘여기엔 충분한 양의 단백질과 식이섬유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 그에 미치지 못한 식사를 하게 되면 어쩐지 죄책감도 느껴졌다.
여러 전문가들의 권장에 따라 체중당 0.8~1g의 단백질을 섭취하려고 노력 중이다.
내 체중을 고려하면 매일 대략 60g을 섭취해야 한다. 처음엔 계란 하나당 5-6g, 식물성단백질음료 하나에 20g,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 40g 정도를 채우고 나머지는 음식으로 채우려 했는데, 매일 이렇게 먹으려니 물리기도 하고, 배도 불러서 오래 지속하기 어려웠다.
식습관을 바꾸며, 삶은계란, 계란프라이, 고기, 두부, 요거트를 골고루 먹게 됐고, 여기에 콩물까지 더하니 굳이 매끼 단백질양이나 기타 영양성분을 체크할 필요가 없어졌다.
간식으로도, 한 끼 식사로도 좋은 콩물은, 그렇게 내게 식단의 ‘치트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