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하면 다 견뎌야 하나요
'화가'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
상처를 양분삼고 절망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현실과 타협할 줄 모르는, 아직은 알아주는 이 없어 라면으로 끼니를 떼우는 고독하고도 가난한 미술가.
이 이미지는 확실히 편견이다. 돈만 있으면 사람을 써서 얼마든지 '걸어놓기 좋은' 작품을 양산 및 유통할 수 있고, 소위 요즘 먹히는 장르인 키네틱아트나 AR/VR 미디어아트를 완성도 있게 만들어낼 수 있다. 아니면 금이나 다이아를 박아넣는 말그대로 눈부신 작품을 찍어낼 수도 있고. 본인은 엘리트코스를 밟았으면서도 달동네를 낭만적으로 그려내며 남의 가난을 재단하고 전시하는 작가도 있다.
물론 고루한 편견 너머엔 어느정도 나의 현실에 가까운 면면도 있어서 씁쓸해진다.
대학교 1학년 때, 유럽유학파 교수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한국에서 물건을 담아주는 검정 봉투가 혐오스럽다"고. 그는 종이봉투에 담아주는 것이 더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나이프 하나도 국산 말고 홀베인 같은 수입제품을 사용하라고 했다. 잘난 척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듯 했다.
또,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학교생활에 소흘해졌던 내게 한 조교선배는 "주객전도잖아. 뭐가 더 중요한 지 몰라?"라고 했고, 해외여행 한 번 가보지 못한 내게 한 동기는 "돈 모아서 가면 되잖아." 라고 했다.
이 같은 말들에 나는 언제나 "그러게요." 라는 말만 반복했다.
교수님에게 가난은 다른 세계의 일이었다. 그는 국산 제품을 살 수밖에 없는 학생들의 가벼운 지갑사정 같은 건 상상할 수도, 상상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객전도임을 알면서도 아르바이트에 갈 수 밖에 없었던 심정을, 생활비를 벌기에도 벅차서 해외여행을 꿈꿀 수 조차 없는 상황을, 다 이해시키긴 어려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오랫동안 '원래부터' 부유한 작가들을 부러워했다. 당연하게 대학원을 가고, 당연하게 유학을 가고, 당연하게 커다란 작업실을 가진 작가들. 넓은 세계를 보고 오면 시야가 넓어진다. 세계 곳곳의 시각언어를 체득한 작가들은 그 언어만큼 넓게 사고할 가능성이 높다. 천고가 높은 작업실에서는 큰 화면에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곳이 아닌 곳에서 하는 붓질에는 더 에너지가 실릴 수밖에 없다.
손목이 아니라 어깨를 쓴 붓질에서 물감은 '필력'이라는 이름으로 더 멀리까지, 더 자유로이 나아간다.
난 지금도 문화자본이라는 말의 선연함을 알고 있다. 진짜 그런 게 있다.
선배들도 선생님들도 모두가 창문이 많은 작업실을 구하라고 했지만, 창문없는 지하 작업실이 나와 반려인의 최선이었다. '내 작업실' 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다.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 해도 내가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사람은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하지만 굳센 마음가짐도 '난리' 앞에서는 와르르 무너졌다. 이 작업실에서 펌프 고장과 수도관 파열로 물난리가 났다. 그것도 세 번이나. 폭포 소리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나서는 안 될 곳에서 나는 자연의 소리는, 공포다.
종아리까지 차오른 물을 휴지통과 쓰레받이로 퍼다 날랐다. 컴퓨터 본체에서 물이 쏟아져나왔다.
작동하지 않는 전자제품들에 폐기물 스티커를 붙이고, 젖은 종이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폐지를 수거하러 오신 할머니가 역정을 냈다. 이렇게 다 젖은 것들을 내놓으면 어쩌냐고.
다 젖은 것들, 젖어서 뭉쳐 버려진 덩어리들이 내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도 젖고 싶지 않았는데.
곰팡이 생긴 드로잉과 틀어진 캔버스를 버리면서, 반려인과 소식 듣고 달려온 아빠 앞에서 웃지는 못했지만 동시에 울지도 못했다. 이 일이 그들에게 또 하나의 불행이 아니었으면 했다. 그당시 우리는 모두가 벼랑끝이었으므로.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있다. 그치?"
실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내 작가생활에는 정말 별 일이 다 있었으니, 그런 별 일 중에 하나니까 괜찮다고. 그러고보면 단 한 번도 마음놓고 작업한 적이 없다.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돈을 벌다보면 작업할 시간이 없었다. 몇 년은 일만 하고, 적금을 깨서 재료를 사고, 예술지원사업에 매달리느라 몇 달을 허비했다. 생업을 구하고 관두기를 반복하고, 그럭저럭 다음 작업을 구상하다가도 대출금이, 병원비가, 가스비가 내게 달라붙었다.
운이 좋아 전시가 잡히면 또 바짝 몰아치듯 작업하다, 전시가 코앞으로 다가오면 나는 늘 악몽을 꿨다.
일단 전시를 오픈했는데, 나는 작품을 다 완성하지 못했거나 무슨 일이 생겨서 설치를 하지 못했다. 전시장 벽에는 아무 작품도 걸려 있지 않아 무섭도록 흰 벽이 끝없이 펼쳐진다. 이제 수많은 관람객과 기획자와 평론가가 전시장에 도착했다. 도망가고 싶지만 나는 식은땀에 온 몸이 젖고 몸이 굳는다.
반면 실제 개인전 풍경은 이렇다.
'스타작가'가 아닌 신진작가, 아니 그냥 그럭저럭 작가의 경우에도, 일주일 전시에 100명의 관람객이 오는 경우는 드물다. 그림이 팔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누구도 이 전시를 언급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지인들만 찾아와 형식적 인사만 나누고 돌아간다.
나는 몇 년을 갈아넣은 전시를 오픈해 놓고도 괜히 민망해져서, 자조하며 스스로를 '무명세를 떨치고 있는 작가'라고 소개하곤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견뎌야 해." 라는 말은 이제 너무 무용하게 들린다. 이따금 지인들이 나를 보는 표정에서 미처 숨기지 못한 몰이해를 읽는다. 그럴때면 내가 한없이 뜬구름만을 좇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아직도 철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슬퍼진다. 이게 다 뭐라고. 뭐하려고 내가 이러고 있지. 끝내 잡히지 않는 내 꼬리를 내가 잡기 위해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현실에서 나는 예술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취미로 하는 미술과 직업인으로서의 미술을 구분하는 기준은 오로지 '금전적 보상' 뿐일까? 나는 왜 순수미술을, 그림을 그리는 걸까?
현대미술에 뛰어든다는 것은 성공 확률이 지극히 낮은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 문제는 이걸 알면서도 하려는 데에 있다. 이쯤되면 스스로의 예술성 혹은 상업성을 의심하고 포기할 용기를 낼 법도 한데, 끝내 놓지 못하는 것은 고집일까, 미련함일까?
여전히 모든 질문에 뾰족한 답을 내리지 못하면서도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