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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뜬구름을 사랑하는 마음

돌에서 꽃이 피어날 수 있다면

by sliiky

"대체 그놈의 돈이 뭐길래"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먹고사니즘'은 공기처럼 내게 붙어서, 신념을 부술 기회만 엿본다.



부동산으로 재미를 보았다는 친구 앞에서 오늘만 사는 것 같은 내 통장잔고를 떠올리고, 반려고양이들의 병원비를 아껴보려 애를 쓰고, 내가 지지하는 시민단체의 기부금을 몇 만원 사이에서 갈등하고, 그러면서도 내 여가생활을 위해서는 턱턱 지갑을 열고만 싶을 때.



게다가 만약 이런 상황들을 가뿐히 뛰어넘는, 그야말로 내게 절체절명의 순간이 오면

내가 제일 먼저 놓아버릴 이름이 예술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니 내가 좇는 것은 뜬구름이 맞다.


(뜬구름 : 뚜렷하지 않고 막연하거나 허황된 것. 덧없는 세상일.)




만화 속 주인공들은 대개 역경을 딛고 무언가를 이루어낸다. 물론 내가 주인공이라는 낭만적인 생각은 유치원생 이후론 해본 적 없다. 흔히 예술가는 뭔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내가 특별하다는 생각은 나보다 더 특별한 예술가들을 만나면서 단박에 깨어진 지 오래다.



다만 주인공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엑스트라라 할지라도 뜬구름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살아갈 힘을 내기도 한다고, 믿는다.



정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 허황된 믿음이 내 작가생활의 동력이기도 하고, 내 작업들을 꿰는 중요한 열쇳말이기도 하다.(내 작업이 합리성과는 영 동떨어져 있다는 소리를 길게 했다.)

그러니 내 작업이 확답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질문으로 오래오래 남기를 바라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오랫동안 내가 이중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이 괴로웠다. 편견 따위가 없는 사람, 절대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들이 처한 폭력적인 현실에 직접 뛰어들지도, 무관심하지도 못하는 내가 무력하게 느껴졌다. 떼돈을 벌고 싶지만 돈과 관계없이 존재하고도 싶었다. 내면화된 관습이나 스테레오타입화된 여성상을 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한테 환멸이 날 때도 많았다. 인간이 입체적이라는 사실이 희망적이면서도 지독히도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내 동료들의 모든 애씀들이 아무 소용없는 것들이었을까?

평범함이, 그 불완전함 때문에 우리에게 용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거듭된 실패나 의미없어 보이는 행위의 반복일지라도 바로 거기서 희망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내 예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에서 꽃을 피우는 일' 처럼 뜬구름같은 것이다.





딱딱한 돌을 내가 데운다는 것, 그 온기를 양분삼아 꽃이 필 수도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것을 희망이라 부르면 안될까. 영영 꽃을 구경조차 하지 못하는 삶이라 해도 내 손바닥 안의 열기만큼은 진짜가 아닐까. 돌이 식어버릴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을 쥘 수 밖에 없는 마음. 나는 체온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정말로 뜬구름같지만 이것이야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하는 이유다.





덧.

언젠가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본인의 예술에 대해 해주신 이야기가 있다. 나는 그것이 오래토록 마음에 남아서 이젠 내 것인양 퍼뜨리는 중이다. 이 또한 일종의 뜬구름인데,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라 다시 한 번 남겨본다.


" 나는 예술을, 호수라는 사회에 자꾸만 돌멩이를 던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호수에 돌멩이를 던져 봤자, 잠깐 물결을 만들어 내는 것 외에 호수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하지만 호수는 이전과 같은 호수일 수 없다. 호수의 밑바닥에는 내가 던진 돌멩이들이 쌓여갈 것이고, 호수는 내가 일으킨 물결을 기억할 것이다."


(돌에서 핀 꽃보다 호수에 던지는 돌이 좀 더 멋진 표현인 것 같지만 뭐 어때요. 결국 비슷한 결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솔직히 요즘 여러가지로 삶이 힘겹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죠. 돌에서 꽃이 피어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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